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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칼럼
[역사산책] 연개소문과 당 태종의 진검승부 (하)임유관에서 당 태종을 생포하려고 기다리는 연개소문
이형모 발행인  |  dongponew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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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7.07.22  14:0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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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형모 발행인
‘누가 연개소문을 병법을 아는 자라고 했나’

선발대를 요동으로 먼저 보낸 당 태종은 오랜 준비 끝에 20만 대군을 거느리고 고구려를 향해 진격했다. 요택(요동의 발착수)에 이르니 2백 리에 뻗친 진펄에 사람도 말도 지나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장작대장(공병대장) 염립덕에게 명하여 나무와 돌들을 운반하여 길을 만들게 했는데, 수나라 때 그곳에서 전사한 장사들의 해골이 곳곳에 널려 있었다.

당 태종이 제문을 지어 애곡하고 여러 신하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오늘날 중국의 자제들은 거의 대부분 이 해골들의 자손이니, 어찌 복수를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리고 요택을 다 지나가자마자 말하였다. “누가 연개소문을 병법을 아는 자라고 말했는가. 병법을 안다는 자가 어찌 이 요택을 지키지 않는가?”

그러나 문제는 '요택 방어'가 아니라, 건안, 가시, 횡악, 안시, 오골 등 전략 요충지 몇 개 성을 제외한 요동 전 지역을 당 태종이 점령하도록 계획하고 기다리는 연개소문의 전략을 당 태종이 헤아릴 수는 없는 일이다.

첫번째 목표는 평양이냐, 안시성이냐

이때 강하왕 이도종은 먼저 오골성(지금의 연산관)을 쳐서 점령하고 곧바로 평양을 습격하자고 했으며, 이적과 장손무기는 안시성부터 먼저 치자고 했다. 수 양제가 일찍이 우문술 등으로 하여금 30만 대군을 거느리고 가서 평양을 먼저 공격하게 했다가 전군이 패몰했던 역사가 있었다. 당 태종이 수나라의 패배를 반면교사로 삼고자 했기 때문에, 그는 평양을 먼저 공격하자는 이도종의 말을 따르지 않고, 이적의 말을 좇아 먼저 안시성을 쳤다.

동년 6월에 당 태종이 이적 등 수십만 명의 군사로 안시성을 공격해 포위하고, 성 안 백성과 병사들이 굶주리고 지치게 하려고 했다. 그러나 성 안에는 쌓아둔 양곡이 넉넉했다.

당나라 병사들은 처음에는 가져온 양식이 풍부했으나 여러 달이 지나자 차차 군량이 떨어졌다는 보고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비록 요동의 여러 성들을 쳐서 점령했다고는 하지만 쌓여 있는 것들이 전혀 없는 빈 성들 뿐이었으며, 수로로 오던 배들은 모두 고구려 수군에 의해 격파 침몰되었기 때문에 군량을 운반할 길이 없었다. 요동은 날씨가 일찍 추워지므로 만일 추풍에 풀들이 말라버리면 소나 말, 양들은 먹을 사료가 없어서 굶어죽을 것이 분명한지라, 이에 당 태종은 낭패가 극심했다.

안시성에서 고,당 총력전

속전속결을 결심한 당 태종은 강하왕 이도종에게 명하여 안시성의 동남에 붙여 토성을 쌓게 했다. 당나라 군사들은 토성 건축을 저지하려는 고구려군과 교전하며 필사적으로 토성을 쌓았다. 열흘 동안의 품과 50만 인부의 공전을 들였다. 토산이 완성된 후에는 안시성을 내려다보며 토산 위에서 돌을 던지고 당차를 굴려서 성첩을 무너뜨렸다. 성 안에서는 무너지는 곳에 목책을 세워 막으려고 했으나 당군의 공격을 당해낼 수가 없었다.

안시성주 양만춘은 결사대 1백 명을 뽑아 성벽이 무너진 곳으로 달려 나가서 당나라 병사들을 물리치고 순식간에 토산을 빼앗아 토산 위의 당차와 돌 던지는 기계를 점거했다. 이로써 도리어 산 위의 당나라 군사들을 물리치니, 토산을 빼앗긴 당 태종이 더 이상 어찌 해 볼 계책이 없어져서 군사를 돌리려고 했다.

신크말치 연개소문은 어디갔나 ?

연개소문은 요동 전투를 양만춘과 추정국 두 성주에게 전적으로 맡기고, 당군의 후방으로 정예병 3만을 거느리고 신속하게 움직였다. 적봉진(지금의 열하 부근)을 지나 남진하여 장성을 넘어 상곡 등지를 격파하니, 당 태자 치(治)가 어양에 머물러 있다가 크게 놀라 위급함을 알리는 봉화 불을 올리니, 봉화가 하루 밤 사이에 안시성까지 연이어졌다.

당 태종이 임유관 안에 변란이 일어났음을 알고 곧 군사를 회군시키려 했다. 오골성주 추정국과 안시성주 양만춘은 그 봉화를 보고 연개소문이 이미 목적지에 도달했음과 당 태종이 급히 도망갈 줄을 짐작했다. 추정국은 전군을 거느리고 안시성 동남에서 당군의 측면을 덮치고, 양만춘은 성문은 열고 나와 정면을 공격하니 당군은 일제히 경황없이 도주했다.
 
당 태종의 퇴각

당 태종은 헌우락에 이르러서 말의 발이 진펄에 빠져서 움직이지 못하고 양만춘의 화살에 왼쪽 눈을 맞아 거의 생포될 뻔 했다. 당나라의 용장 설인귀가 달려와서 당 태종을 구하여 말을 갈아 태우고 전군의 선봉 유홍기가 뒤를 막으며 혈전을 벌인 지 한참 후에야 겨우 벗어나 달아날 수 있었다.

양만춘 등이 당 태종을 쫓아 요수에 이르러서는 수많은 당나라 군사의 장수들과 사졸들의 목을 베고 포로로 사로잡았다.

임유관에서 당 태종을 생포하려는 연개소문

10월, 요택을 지나 퇴각하는 당군이 임유관에 이르렀을 때 연개소문이 당나라 군사들의 돌아갈 길을 끊고 당 태종을 생포하려고 기다리고 있었는데, 뒤에서는 양만춘의 군사들이 추격해 오고 있었으므로 당 태종은 위급한 상황에서 어찌 할 바를 몰랐다. 그때 마침 눈바람이 크게 불어 천지가 아득하고 지척을 분간할 수 없었으므로 양쪽의 군마들이 서로 엎어지고 자빠져서 어지러이 널려있었는데 당 태종이 그 기회를 이용하여 도망갔다.
 
‘안시성 전투’는 동양 고대 역사상 큰 전쟁이었는데, 비록 동원된 양쪽 군사의 숫자는 수 양제와 을지문덕이 싸운 ‘살수 전투’에 미치지 못하지만, 그러나 피차 전략의 주도함과 군사의 정예로움과 물자와 기계, 장비 등의 소모는 살수 전투 때의 그것을 초과하며, 전투가 지속된 시일도 그때보다 두 배는 되었다. 당 태종은 '안시성 전투'에서 완패하여 대부분의 병력을 상실하고 목숨을 보전하여 장안으로 귀환했으나, 양만춘의 화살에 왼쪽 눈을 잃고 그 후유증으로 사망하고 말았다.

연개소문의 당나라 내륙 침공

당 태종을 생포하지 못한 연개소문은 북경까지 추격하여 여러 지방을 점령한다. 산동성, 직예(지금의 북경)등지에는 띄엄띄엄 '고려' 두 글자가 앞에 붙어있는 지명들이 남아있다. 연개소문의 당나라 정벌에 관한 기록을 찾기가 어려운 것은 무슨 연고인가?

첫째는 중국이 위존자휘(爲尊者諱)- 존귀한 자의 잘못과 수치는 감춘다. 위중국휘(爲中國諱) - 중국의 잘못과 수치는 감춘다고 하여, 중국의 사관들이 역사 기록을 왜곡하고 누락한 까닭이다. 둘째는 통일 신라가 백제를 도와 신라를 핍박한 연개소문에 대한 원한으로 그에 관한 기록을 말살하고 왜곡한 까닭이다.

연개소문은 중국의 소동파, 왕안석 등도 인정하는 불세출의 영웅이다. 또한 연개소문의 병법은 고금에 탁월하여 그의 제자 이정이 쓴 '이위공병법(李衛公兵法)'은 무경칠서(武經七書)'에 하나로 꼽히는데, 이 책의 원본 서문에는 연개소문에게 병법을 배운 이야기가 자세히 쓰여있다. 훗날 옹졸한 중국인들이 연개소문 같은 외국인에게 병법을 배우는 것을 수치라고 여겨 그 병법을 없애버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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