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칼럼] 조선의 신숙주,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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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칼럼] 조선의 신숙주,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하다
  • 노관범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조교수
  • 승인 2015.07.31 1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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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위기의 명나라를 구하다

▲ 노관범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조교수
  몽골의 통일은 언제나 중국에게 근심이었다. 조선 세종 말년에 동서 몽골을 아우른 오이라트족의 야센이 명나라에 침입하였다. 명나라 영종은 친히 군사를 이끌고 야센과 맞싸웠으나 명군은 전멸하고 영종은 야센의 포로가 되었다. 기세등등한 야센은 이듬해 다시 명나라에 침입하여 북경을 포위하였다.

  다급한 명나라는 조선에 구원을 요청하였고, 세종은 이를 수락, 수양대군을 총사령으로 하는 원군을 수륙 두 길로 파견하였다. 조명연합군은 북경을 포위한 몽골을 격파, 야센을 생포하였고, 다시 오이라트로 진격하여 마침내 영종을 명나라로 데려왔다.

  조선의 덕에 감복한 명나라는 조선과 형제의 의리를 맺었고, 조선에 만주와 시베리아를 할양하였다. 조선은 동으로 블라디보스톡, 북으로 바이칼 호수, 남으로 요동반도의 여순에 이르는 넓은 땅을 새 영토로 삼았다. 이로부터 조선은 나라 이름을 대조선이라 하였고 스스로 황제국이 되었다. 대조선의 새로 확장된 영토를 다스리기 위해 초대 만주 총독으로 김종서가 부임하였고 초대 시베리아 총독으로 하유경이 부임하였다.

  신숙주,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하다 

  
대조선의 황제 세종이 곧 붕어하고 문종이 즉위하였다. 이에 앞서 세종은 일찍이 수군을 보내 대마도를 평정한 적이 있었는데 세종 말년에 대마도 정벌 이후 조선과 일본 사이의 선후책을 논의하러 신숙주가 일본으로 떠났다. 일본에 파견된 신숙주 일행은 사명을 마치고 조선으로 돌아오는 길에 바다에서 풍랑을 만났다. 바다에서 수십 일을 표류한 이들은 우연히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하였다! 얼마 후 문종이 붕어하고 단종이 즉위하였다. 문종의 아우 수양왕이 섭정이 되어 김종서 등 원로와 협심하여 나라를 다스렸다. 대조선의 국세는 나날이 향상되고 문화는 점점 발달하였다.

  10년 후 단종은 친정을 시작하고, 어린 시절 자신을 가르쳤던 사부 김시습을 대조선의 대신으로 불렀다. 수양왕은 친왕의 신분으로 시베리아 총독이 되었다. 이때 정창손, 김질, 유자광의 무리가 수양왕이 다른 뜻이 있어서 성삼문, 박팽년과 역적모의를 하였다고 밀고했으나 무고로 판명되어 정창손 무리는 죽임을 당했다. 수양왕은 자신에게 덕이 부족해서 이런 사태가 발생했다고 책임을 통감하고 정계에서 은퇴하였다. 단종에게 아들이 없어서 황족 회의 결과 수양왕의 차손을 동궁으로 삼았는데 후일 성종으로 등극하였다.

  세계사는 팍스 코레아나(Pax Coreana)의 시대로

  이 무렵 세계정세에 변화가 발생하였다. 아메리카 대륙 발견 이래 서양인과 중국인의 아메리카 이주가 증가하여 그곳에 먼저 정착해 있던 대조선의 이주민과 자주 충돌하였다. 또한 서양 세력이 아시아에 쳐들어와 명나라의 번국이던 티베트, 시암, 베트남 등이 이를 견디지 못하고 조선에 보호를 요청하였다.

  이에 대조선은 명나라 및 일본과 삼국동맹을 체결하고 서양 세력과 대결하였다. 세계대전의 발발이었다. 조일연합군은 태평양에서 영국 수군을 격파하였고, 조명연합군은 인도에서 영국, 프랑스, 스페인 삼국 연합군을 전멸시켰다. 황인종과 백인종 사이의 대결은 황인종의 승리로 끝났다.

  세계대전이 끝나고 세계 각국의 선후책을 논의하는 강화회의가 북경에서 열렸다. 대조선은 김시습을 전권 대신으로 파견하여 북경에서 세계 각국 정상과 협의하여 조약을 정하였다. 새 시대가 열렸다. 대조선은 세계평화회의의 의장국이 되었고, 아시아 총연맹의 맹주가 되었다.

  대조선의 훈민정음과 아악은 세계 곳곳에 전파되어 만국의 알파벳이 되었고 만국의 클래식이 되었다. 대조선은 세계의 패권을 장악하고 인류의 평화와 행복을 추구하는 위대한 사명을 실천해 나갔다. 세계사는 바야흐로 팍스 코레아나(Pax Coreana)의 새로운 이정표에 진입하였다.

  1927년의 역사적 상상력이 흥미로운데 

  1927년 조선 사회에서 발행된 대중 잡지 『별건곤』에 실린 이 이야기는 정말 역사적 사실과 부합하는 이야기였을까? 하지만 『세종실록』, 『세조실록』, 『성종실록』을 아무리 찾아 보아도 이 이야기를 사실로 입증할 수 있는 증거가 없는 것은 어째서일까? 그럼에도 이 이야기에서 펄럭이는 역사적 상상이 흥미롭게 읽히는 것은 어째서일까? 사실의 역사와 다른 반사실의 역사를 재구성하는 것은 의미가 있는 일일까? 1927년의 근대의식과 다른 2015년 현재의 근대의식은 조선시대를 어떻게 호출하고 있는가? 

  노관범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조교수 

  ◇논서 
  △〈고전통변〉김영사, 2014 
  △〈대한제국기 실학 개념의 역사적 이해〉한국실학연구 제25호,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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