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의 하얀 물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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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의 하얀 물결
  • 최미자
  • 승인 2012.01.12 1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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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최미자 재미수필가

미국 남가주 샌디에고에서 살고 있는 재미수필가 최미자씨가 미국 생활의 소박한 이야기를 연재한다. <레몬향기처럼>(2007) <샌디에고 암탉>(2010) 등의 수필집을 발간한 그는 재미동포들이 일상에서 겪는 삶을 그려낼 예정이다.<편집자주>

텔레비전 뉴스로 우리 한국역사에 오래 남아 있을 어느 분의 장례식을 본다. 포항제철을 세웠던 강철 왕 박태준 사장의 영결식이다. 온통 검정 예복의 물결. 언제부터 우리나라가 서양식 장례문화가 이토록 깊숙이 파고들어 왔는지 장례식을 볼 때마다 어둡고 답답하다. 누가 가족인 상주이고 참석한 손님인지 멀리서 눈으로는 식별해 낼 수가 없다.
오래전 집안 어른들에게 들었던 이야기지만 매사에 창조적이던 나의 외할아버지는 대원군 장례식 때 하얀 갓을 만들어 돈을 많이 벌었다고 했다. 그 돈으로 외할아버지는 고향 제주도에 최초의 초등학교를 짓도록 많이 기부했다 한다.

1970년 동짓달, 친정아버지의 장례식을 지내던 무렵이었다. 광목으로 만든 상복인 한복을 내가 생애에 단 한 번 입어 본 추억은 아직도 아름답다. 온 세상이 하얀 눈으로 덮였던 싸늘한 12월이었지만 한복은 훈훈했다. 천이 지닌 자연 그대로의 보온성 탓이었다. 그 당시까지만 해도 장례 때 상주들은 여름엔 삼베 옷, 겨울엔 광목으로 만든 옷을 입었다.
역사책이나 영화에서 보았던 조선 시대 임금의 장례식 날엔 온 국민이 하얀 광목으로 만든 한복을 입고 있었다. 문익점 선생이 중국에서 돌아오던 길에 작은 목화씨앗을 붓 통에 넣어 우리나라에서 재배가 시작되던 옷감이 아닌가. 목화에서 나온 실을 수직기인 베틀로 짜서 만든 광목은 표백하지 않은 자연섬유라 매끈하지도 않았다. 표면에 점 같은 티가 있고 색도 누르스름했다. 그런 탓인지 나의 시어머니 장례식 땐 세탁에 편리한 새하얀 깔깔이 나이론 상복을 형님은 우리에게 입혔다. 삼복더위라 칙칙하여 혼이 났지만, 지금의 검은색 상복보다 좋았다. 광목이 수십 년 동안 푸대접을 받더니 요즈음은 다시 인기란다. 사람들이 화학물질로 지어진 현대식 아파트에 살며 얻게 된 골치 아픈 피부병 때문이다.
미국에 와서 처음 살던 집에는 광목천 커튼이 방의 창문마다 드리워져 있어 반가웠다. 전 집주인의 지혜를 느꼈다. 멋있는 무늬가 없어 밋밋해도 햇빛에 강하다. 한 때 한국에선 멋스러운 화학섬유로 거부가 된 기업가도 많았다. 촛불에 그 섬유를 태워보라. 얼마나 허망하게 녹아드는가. 목화로 만든 자연섬유는 불에 태우면 먼지처럼 재가 되어 사라진다. 평소에도 내가 면 옷을 즐겨 입는 까닭이다.

역사 교과서에서 우리는 하얀 것을 좋아하는 백의민족이라고 줄곧 배웠다. 공교롭게도 성인이 된 후 나는 하얀 블라우스를 좋아한다. 때를 잘 타서 흠이지만 밝은 색상 옷을 입으면 마음도 밝아진다. 요즈음 멋쟁이들은 젊으나 중년이거나 검정 정장을 즐겨 입는다. 검은색은 화사해 세련되고 또 몸을 날씬하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어느 집의 응접실은 온통 검정 가구로 꾸며져 있었지만 근사해 보이지 않은 까닭은 어인 일일까. 얼마 전, 새로운 컴퓨터가 필요해서 데스크 탑을 사러 갔더니 온통 검정 색깔 뿐이었다. 몇 해 전 우리 집 부엌의 낡은 오븐을 바꾸게 되었을 때도 선택의 여지가 없어 검은색을 샀더니 부엌 안의 분위기가 조금 어두워졌다.
미국에 이민 올 때 어머니는 우리에게 검은색 정장을 한 벌씩 준비해오라고 했다. 마음이 내키지 않았지만, 친정어머니 장례식엔 상주이니 그 옷을 입었다. 하지만 미국에 오래 살며 가끔 미국 이웃들의 장례식에 가보니 상주가 아닌 사람들은 화려하지 않은 색인 평상복으로 정장을 입고 참석하고 있음을 볼 수 있었다. 미국에 사는 한국인들의 장례식에서는 온통 검정색이라 누가 상주인지 구별이 좀처럼 안 되었다.

대한민국의 정치력은 우리가 바라는 정상에 언제면 올라설까. 이젠 신성한 나랏법을 만드는 국회의 회의장에 폭탄을 터뜨리는 사람까지 등장했다. 수치스럽게도 대통령과 자녀는 임기가 끝나면 감옥에 가는 나라. 가끔은 바르게 살아가는 민초들이 나라를 지킨다는 내 좋은 친구의 말로 위안을 삼는다. 아, 마지막 떠나는 장례식 자리라도 옛날처럼 하얀 물결의 상복으로 분위기를 바꾼다면 해방의 밝음이 찾아왔던 것처럼 맑은 지도자가 있는 희망적인 나라가 되어갈까. 외국에 사는 이 동포도 잠시나마 나라 걱정으로 텔레비전 앞에서 이리저리 새해를 맞으며 엉뚱한 생각 속에 빠져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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