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한을 넘나드는 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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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한을 넘나드는 가희"
  • 오재범 기자
  • 승인 2006.09.26 16:3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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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프리마돈나 전월선씨

지난 23일 재외동포예술제 갈라콘서트 공연을 위해 내한한 프리마돈나 전월선씨(사진, 48)를 공연전 만났다. 남북한을 넘나드는 가희라는 칭호를 얻고 있는 그녀는 과거 북한 김일성 주석 앞에서 공연을 비롯해, 현재도 한국과 일본을 넘나들며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

-우선 축하드린다. 지난 9일에 선생님이 내신 책 ‘해협을 넘나드는 가희’가 일본 ‘쇼가쿠간 논픽션 대상’을 수상했다고 하던데...
내용은 제 인생과 음악인생을 통해서 한반도와 바다를 낀 일본 사이에 힘들게 살아온 저 자신 이야기다. 우리 부모님 1세들의 일생과 음악을 통해서 국경을 넘고. 음악 자체도 양국해협을 놓고 흔들려 왔다는 것이 주 스토리다. 그것을 일본말로 ‘고히나와 사래’라고 하는데 한국말로 풀이가 안되네(웃음)... 그것은 사람이기 보다 양국해협이 있어서 많은 고통이 있다는 이야기. 제 자신이 음악을 통해 경험한 것들을 쓴 책이다.

- 한국인 최초로 일본 최고의 오페라단에 입단 했다고 들었다.
<이기회 오페라단>이다. 물론 입단 때도 많은 차별을 받았다. 일본인도 입단이 어려운 곳인데 조선 사람인 나에게는 더욱 힘들었다. 무엇보다 입단원서를 넣었을 때 전월선이라는 이름을 써 넣었더니 자격이 없다고 접수처에서 돌려주기도 했다. 외국인이기 때문이었다.

-그럼 도쿄예술대학에 진학할 당시에도 그런 차별을 당했는지.
물론이다. 전월선이라는 이름으로 넣었기 때문에 접수자체가 거부당했다. 실력여부와 관계없었다. 도쿄음악대학 뿐만 아니라 다른 음악대학에 원서를 넣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이탈리아 유학도 같은 상황이었나요?
마찬가지로 조선국적을 가지고 있어서 비자를 받을 수 없어 결국 못갔다. 학교입학허가를 받고 이탈리아 대사관에 비자신청을 했는데 끝내 받아들여지지가 않았다. 문제는 국적이었다. 그래서 당분간 이탈리아는 바로 못 가고 소련이라든지 사회주의 국가에 가서 실력을 쌓았다. 나중에 오페라 가수가 되고 한국국적을 가지고 나서야 이탈리아 유학을 갔다.

-일본에서 민단 활동하는 아버지와 북에는 어릴 때 헤어진 오빠가 있다는 기사를 읽었다.
민단활동이 아니라 학교활동을 이야기 하는 것이다. 어렸을 때 부모들은 자녀들 민족교육을 위해 학교를 지었는데 나중에 학교가 총련쪽으로 소속됐다. 당시에 대한민국 소속 민족학교는 아예 없었다. 아버님이 학교일을 한 것이 총련활동이 된 셈이다.

오빠는 지난 59년에 있었던 북송교포 사업때 북으로 들어갔다. 당시 일본에서는 재능과 실력이 있어도 조선족은 차별받았기 때문에 많은 조선족이 북한행을 선택했다. 또 총련쪽에서 조국통일이 멀지 않았다며 북한에 가서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하자는 선전을 많이 했었다. 많은 사람들이 북한을 택했고 오빠도 그중에 한사람이다.

-지금까지 공연하면서 가장 기억이 남았던 공연이 있다면...
너무 많아서 하나만 꼽기는 어렵지만. 한국 첫 번째 공연도 기억에 남고...96년 12월 31일 송년특집 ‘열린음악회’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수만 명의 청중이 체육경기장에 모여있는 가운데 제가 ‘고려산천 내사랑’을 불렀다. 노래는 한국에 알려지지 않았던 곡으로,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곡이다.

-재외동포신문 독자들에게 한 말씀.
동포들이 사는 곳이면 어디든지 달려가서 제 노래를 들려드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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