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연해주는 고려인에게 무엇을 의미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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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연해주는 고려인에게 무엇을 의미하는가?
  • 임채환
  • 승인 2003.06.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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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제2회의 동북아경제포럼에 참석하기 위하여 동북아평화연대 회원들과 함께 2003년 5월 16일 러시아 연해주 블라디보스톡에 도착하였다. 러시아의 다른 지역과는 달리 연해주는 나에게 많은 상념들을 갖게 하였다. 발해의 땅, 신한촌, 우스리스크강, 권업회, 국민회의, 의병운동, 독립군, 이상설 유허비, 선봉신문, 강제이주, 라즈돌노예역, 까레이스키, 시베리아 황단열차, 아리랑 등등 한민족의 희망, 좌절, 분노, 한 등이 이곳에 서려 있다. 연해주는 해방전 우리 조상들에게 생존을 위한 땅이였으며, 독립을 위한 기지였다. 그러나 오랜 세월 한국과 연해주의 시간적·공간적 단절은 이곳을 우리에게 낯설게 땅으로 만들었다. 하지만 한때 우리 조상의 애환과 숨결이 곳곳에 배여 있는 희망의 땅이였다.
  우리의 조상들이 연해주 이주·정착한 때는 1863년도였다. 이 당시 13가구의 우리의 조상들이 빈곤과 기근 때문에 남 우쑤리 구역 찌진허(Tizinhe) 유역에 정착해 농사를 지었다. 1869년 조선의 대기근으로 인하여 연해주 이주자 수는 계속 늘어 1870년 그곳의 우리 조상 수가 8,400명에 달하게 되었다. 1872년 사이르가(Samarga)강가에 최초로 큰 한인마을인 블라고슬롭벤노에(Blagoslovennoe)도 건설되었다. 1884년 조선과 러시아 사이에 외교관계가 맺어지고, 이어 1888년 통상조약이 체결됨으로써 우리 조상들이 이주에 대한 통제가 정식으로 가해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러한 조치에도 불구하고 연해주 이주자 수의 증가는 계속되었다.
  우리 조상들의 초기 러시아 이주는 주로 경제적 이유로 함경도의 농민이 선구였고, 또한 압도적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 주된 이유는 지리적 조건의 유리성, 이 지방의 자연적 환경의 혹박, 그리고 이 지방에 대한 조선왕조의 정치적 차별주의 등이다. 그러나 1910년 일제의 조선강점, 그리고 3·1운동 이후 정치, 경제적 동기로 인하여 우리 조상들의 러시아로의 탈출은 더욱 증가되었다. 1910년 우수리스크지방의 한인 수는 54,076명, 1914년 64,309명으로 늘어났으며, 1923년 10만명을 넘어섰다. 1927년은 25만여명이였다. 이러한 전체 이주자들 가운데 러시아의 시민권을 획득한 한인은 20-30%에 불과했다.
  {재소 한민족의 역사}의 저자 김승화씨에 의하면, 극동시베리아 한인 이주민을 위한 몇 가지  유형의 학교가 있었다고 했다. 러시아 시민이 된 한인들의 자녀를 수용한 러시아정교의 미션계학교, 한인민족학교, 러시아한인학교 등이 그 기본적 형태였다. 1904년 교회교구에 의해서 설립된 한인학교는 포세트(Poset) 구역에 6개교, 수이푼(Suif-un)구역에 4개교 등 10개교였으며, 비교적 많은 수의 한인들이 살았던 수찬구역은 하나의 학교도 없었다. 이러한 한인학교들은 매우 소규모적이었으며, 학습 역시 기본적으로 기도문의 기계적 암송과 슬라브어의 교육이었다.
  그러나 민족주의적 성향을 가진 한인들은 국민회의 조직을 통하여 여러 지역에 학교를 창설하였다. 예를 들어 불라디보스톡의 신한촌에서  이들은 1911년에 한인학교인 한민학교를 만들었다. 그들은 또한 성인을 위한 야간학교도 개설하였다. 이들 노력의 결과, 1917년 볼세비키혁명 전까지 5,750명의 학생을 수용하는 182개의 한인학교가 한인이 모금한 자금에 의해서 이 지역에서 만들어졌던 것이다. 이들은 교회교구 학교에 대하여 극히 부정적인 입장이였다. 다른 한편, 러시아어를 가르치는 공립학교는 2,599명 학생에 88명의 교사로 이루어진 44개 학교뿐이었다.
1917년 볼세비키혁명 이후, 1921년 6월 24일 극동공화국의 각료회의는 "단일학교에 관한 제원리"를 인준하고, 6월 30일에 "학교개혁에 관한 법"을 인준하였다. 그 결과, 1922년부터 1923년까지 공립한인학교의 수는 증가했고 한인자금으로 설립된 학교는 줄어들었다. 예를 들어, 44개의 공립학교가 1924년 6월 1일 6,794명의 학생을 수용하는 86개 학교로 증가하였다. 154개의 한인민족학교는 1925년 12월 1일 국영화되었다. 1930년 6월 25일과 1930년 8월 14일 볼세비키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의 결정에 따라 일반 초등의무교육에 관한 발표가 있었다. 이에 따라 1931-1932년도에 극동지방에 380개교의 한인학교가 있었다. 그 학생 수는 33,595명이었다. 더구나 1931년 불라디보스톡에 역사학과 , 문화과, 이학과, 생물학과 등 4개학과로 된 2년제 한인교육대학이 설립되었다. 이와 같이 학교의 증설, 학생수의 증가, 교원학교의 설립 등의 현상은 학생들의 교육환경의 수준을 향상시켰던 것이다. 이때까지만 해도 연해주의 한인들은 경제적 토대를 바탕으로 어느 정도 민족의 교육과 문화의자치를 하는 한인민족공동체를 이루면서 살아 왔던 것이다.
  그러나 1937년 9월 하순부터 12월 이전까지 약 15-20만명에 달하는 극동지역의 한인들은 기차로 보통 3-4주일 이상 걸리는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 당했다. 수송 도중에는 많은 수의 사람들이 병으로, 그리고 사고로 사망했으나, 그 숫자는 아무도 모르고 있다. 물론 중앙아시아 각 지역으로 이주되어 와서도 기후와 물이 맞지 않아 어린이들이 설사 등 질병으로 많이 죽었다. 1938년도의 극히 제한적인 인구조사자료에 의하면 천명당 42명이 사망했고, 아동사망률은 천명당 2백명에 달해 어린이 5명당 1명이 죽었던 것이다.
이러한 가혹한 강제이주와 중앙아시아의 척박한 황무지에서 살아난 한인들은 중앙아시아 여려 지역에서 근면과 높은 교육열로 모든 역경을 이겨내고 성공한 소수민족으로 다시 탄생되었던 것이다. 1991년  구소련의 체제 전환 이전 러시아와 중앙아시아에 살고 있는 한인들은 자신들을 '고려사람', '소련 조선사람', '재소 한국인', '소련동포', '소련교포', '소련한인'이라고 불렀다. 그들은 20세기 불행했던 한민족의 역사와 세계사적 흐름의 큰 변화들 속에서 잉태되었다. 세계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그들은 생존을 위하여 '자발적'으로 소련적인 정체성을 수용하여 '소련시민'임을 매우 뚜렷하게 인식하였다. 다시 말해서 구소련의 소수 민족인 러시아와 중앙아시아의 고려인들은 130여 년 동안 러시아 또는 구소련 체제의 복합 문화의 영향을 벗어날 수 없었으며, 그들의 정체성 역시 많은 변화를 가져왔고, 소련 국적의 소련인으로서 긍지를 갖는 정체성의 '창조'에 힘써 왔던 것이다. 구소련 체제의 붕괴와 중앙아시아 국가들의 독립은 이들에게 '소련없는 러시아인' 또는 '소련없는 중앙아시아 고려인'으로서 정체성의 혼란과 위기를 또 다시 경험하게 하였다.
  이러한 고려인 정체성의 근본적인 변화의 와중에서도 최근 가장 관심이 고조되고 있는 지역은 극동시베리아지역이다. 이 지역은 소비에트의 정치적인 대변혁으로 인하여 상당  수의 고려인들이 이동하는 곳이다. 연해주를 포함한 극동지역의 고려인의 총 인구수는 1990년대 말 현재 69,060명이며 그 중 사할린주의 인구수는 36,000명이며, 연해주 인구수는 18,260명이다. 최근 재이주한 고려인들이 가장 많이 집결한 곳이 연해주이다. 1997년 현재 연해주 고려인기금에서 파악하고 있는 고려인 수는 우스리스크에 15,400명,  나홋드카와 파르티잔스크에 3,000명, 불라디보스톡와 알촘에 2,000명 등 연해주 고려인 수가 총 30,063명이다.
  한민족의 해외 이민사에서 가장 초기에 해당하는 1860년대부터 이주를 시작한 구소련의 한인들이 제2의 고향이라 생각했던 곳이 바로 이곳이다. 그러나 1937년 스탈린의 민족 정책에 의하여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 당하였고, 이제는 제3의 고향인 중앙아시아에서 다시 추방되거나 될 처지에 놓였다. 결국 이들은 자신 또는 자기 조상들의 생활 근거지였던 연해주로 다시 모여들고 있다.
  그러나 러시아 연해주 고려인의 정체성도 혼란·혼동 상태에 처해 있다. 왜냐하면 연해주 고려인은 중앙아시아로부터 재이주한 고려인, 사할린 고려인, 북한 출신 고려인, 그리고 연해주 토착 고려인 등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연해주 고려인이지만 출신지에 따라 관심과 성격이 다르고, 상호교류의 형태와 범위도 실제적으로 다르다. 또한 이들에게는  중앙아시아 거주 지역에서 생활 터전의 포기와 같은 경제적인 문제, 러시아,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간의 국제관계의 복잡성, 극동지역 거주 러시아인의 거부감, 재이주 지역에서의 생업문제 등 해결해야 할 과제들이 많다.
   2002년 3월 연해주 거주 고려인에 대한 민족정체성조사 연구에 의하면(임채완, 러시아 연해주 고려인의 민족정체성 조사연구, 2002), 연해주 고려인 대부분은 서로 친밀하게 지내고 있으며, 고려인으로서 높은 긍지를 갖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 이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주된 역할을 하는 것은 '민족의식'이라는 주관적 요소였다. 그들은 가치관이나 생활양식이 주로 '고려인'식이라고 응답한 반면, 자신의 조국이 '러시아'라고 하였다. 이것은 그들이 '러시아의 고려인'으로서 민족정체성과 국민정체성을 명확히 구분하고, 이 양자를 조화시켜 생활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특히 타민족과의 결혼에 대한 입장에서는 중앙아시아 고려인이 상당히 허용적인 태도를 보여준 것과 달리 이들은 반대하는 입장도 다소 많았다.
   한국 정부 정책 평가에 있어서, 그들 대부분은 한국 정부가 그들에게 관심을 갖고 있다고 응답했으나, 한국 정부의 지원 정책에 대한 만족도, 한국에서 활동하는 과정에서의 대우 인식, 다른 나라 동포들과 비교한 대우 인식 등은 상당히 부정적이었다. 그들이 한국 정부에 바라는 것은 이중국적 허용, 경제협력 확대, 교육 및 문화 센터 지원 등이었으며, 이들 사회의 선결과제는 취업문제, 러시아 국적 취득, 자녀 교육 등으로 나타났다.
   따라서 한국 정부와 국민은 이러한 그들의 요구와 어려움에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특히 최근 중앙아시아로부터 연해주에 재이주를 시도하고 있는 동포들에게 적극적인 지원과 관심이 절실하다. 한국 정부 내지 시민단체의 주요 지원사업은 극빈 이주민에 대한 인도적 지원, 문화교류·협력, 연해주 농업 지원센타 설립, 그리고 시베리아횡단철도연결 및 극동시베리아 에네지 공동 개발 프로젝트지원 등이다.
  연해주는 과거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를 당한 한인들의 고향이다. 현재 이곳에 거주하는 사람으로 중앙아시아에서 온 고려인은 대학을 졸업하고 근무지를 지원할 때 조부모의 고향인 이곳을 선택하여 옛 고향으로 간다는 의식을 가지는 것이다. 그리고 조국과 가까이 있어 중앙아시아보다 심리적으로 가깝다는 의식을 갖는 것도 이들이 연해주를 선택한 이유가 된다. 사할린을 제외한 좁은 의미의 연해주는 사할린에서 이주하여 온 고려인에게도 중용한 의미를 갖는다. 사할린에서 갇히어 이주의 제한에서 해방된 것이 연해주로 이주한 것이다. 따라서 사할린 출신 고려인에게 연해주는 해방의 땅이 된다.
  연해주는 북한 출신 고려인에게도 더없이 중요한 땅이다. 해방 이후 북한 사람들이 마음놓고 돈벌이를 하여 경제적으로 보탬이 되어 준 곳이 이곳 연해주이다. 중국도 북한 사람들에게 관대하여 예컨대 1960년대의 문화혁명 당시 중국에서 살기 힘들 때 많은 중국 교포가 북한으로 이주하었다. 그러나 중국에서 북한 사람들이 일을 하고 돈벌이를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중국에 비하면 연해주는 북한 사람들에게 특혜를 주는 곳이므로 최혜국 대우를 받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연해주는 북한 사람들에게 희망과 약속의 땅이 될 것이다.
  이곳에 한국의 기업이 진출한 것은 재러동포들에게 희망인 것이다. 중앙아시아의 한인들이 연해주를 미래의 땅으로 생각하는 것도 한국 기업이 이곳에 진출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연해주는 중앙아시아의 고려인, 사할린의 고려인, 북한 사람, 그리고 한국 사람들이 공통으로 가는 미래의 땅이고 희망의 땅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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