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률칼럼] 마라토너의 귀화…②
상태바
[법률칼럼] 마라토너의 귀화…②
  • 차규근 변호사
  • 승인 2015.08.18 15:1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차규근 변호사(법무법인 공존)
  지난 호에서는, 케냐 마라토너의 귀화 논란에 대하여 소개한 바 있다.  오늘은 실제로 귀화한 아프리카 마라토너를 소개하고자 한다.  그는, 2010년도에 특별귀화가 아닌 일반귀화로 귀화를 하였다.  당시는 ‘대한민국에 특별한 공로가 있는 자’만 특별귀화가 가능했고, ‘과학·경제·문화·체육 등 특정분야에서 매우 우수한 능력을 보유한 자로서 대한민국의 국익에 기여할 것으로 인정되는 자’는 특별귀화 대상자가 아닌 때이기도 하였다.  그의 사연을 그의 관점에서 이야기하는 방식으로 소개해 본다.

  소년은 폐허가 된 황량한 마을 어귀에 서 있었다. 후투족과 투치족 간의 내전으로 마을은 황폐화되었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총소리가 들렸다. 소년의 부모님과 남동생, 여동생이 이웃 후투족 주민에 의해 목숨을 잃고 말았다.  1993년 10월 22일, 소년의 나이 15살 때였다. 소년은 투치족으로서 당시 수도인 부줌부라에 있는 고등학교를 다니고 있었는데 이 곳은 정부군을 장악하고 있던 투치족 군인들이 있어 간신히 화를 피할 수 있었다. 학교 내에서도 후투족 출신 학생들과 투치족 출신 학생들 간의 갈등이 심화되었고 후투족 출신 학생들로부터 생명의 위협을 느끼는 일도 많아졌다. 소년은 누가 전쟁에서 승리하고 권력을 잡든 관심이 없었다. 그저 이 수많은 사람을 고통 속에 몰아넣은 이 전쟁이 끝나고 사이좋고 평화롭게 지내기를 바랄 뿐이었다.

  부모님과 동생들이 세상을 떠난 후 소년의 공허하고 슬픈 마음을 달래준 것은 마라톤이었다. 달리는 동안은 모든 것을 잊을 수 있었고, 모든 고통과 괴로움, 공포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다. 어엿한 청년이 된 그는 대학생 국가대표가 되어 국제대회에 참가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2003년 당시 부룬디국립대학 정치경제학과에 다니던 그는 대학생 국가대표로 2003년 대구 국제유니버시아드 대회 참가를 위해 부룬디를 떠나 머나먼 이국 땅인 대한민국으로 향하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한국의 모습은 정말 인상적이었다. 빌딩 숲과 자동차들, 바삐 걷는 사람들의 모습, 평화롭고 활기찬 거리의 모습이 보기 좋았다. 무엇보다 밤거리를 사람들이 아무 거리낌 없이 다니는 것을 보고 한국에서 살아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유니버시아드 대회에 참가한 후 고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2003년 9월 난민 신청을 하였고 우여곡절 끝에 2005년 6월 난민 지위를 얻었다. 난민 지위를 얻었다 해도 머나먼 낯선 땅에서의 생활이 쉬운 것은 아니었다. 인쇄소 직공을 시작으로 시계공장과 카메라 렌즈회사를 다녔는데 불법체류 외국인으로 오인되어 따가운 시선을 받기도 하고 말이 통하지 않아 일을 할 때도 눈치로 해야 했다. 특히 모국어로 이야기를 나눌 사람도 없어 외로움을 달랠 길이 없었다.

  고독과 외로움이 다가올 때마다 청년이 찾은 해방구는 역시 마라톤이었다. 마라톤 동호회에도 가입하여 활동을 하였고, 마라톤 대회에도 참가하였다. 2005년 서울 경향 마라톤 대회를 시작으로 2006년부터 2008년까지 동아 마라톤 마스터스를 3연패하는 등 각종 마라톤 대회 우승을 휩쓸었다. 마라톤을 통해 한국 사람들과 어울리고 친해지면서 한국 생활도 한결 좋아졌다. 처음에는 거리감이 있었지만 친해지면서 그를 이해하고 도와주는 사람들이 많아졌고, 정 많은 한국 사람들이 친형제처럼 생각하며 따뜻하게 맞아 주었다. 행운도 잇따랐다. 마라톤 동호회 회원의 소개로 창원국가산업단지 내 자동차부품 업체에 입사해 기숙사 생활을 하면서 안정적 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생활도 안정되면서 부룬디를 떠나오면서 중단했던 공부도 하고 싶었다. 회사에 얘기했더니 흔쾌히 공부할 수 있도록 도와 주었다. 또한 마라톤 대회에도 계속 참가할 수 있도록 회사 차원에서 적극 편의를 제공하고 격려해 주었다. 낮에는 국제영업부에 근무하면서 저녁에는 경남대 경영학부에 다니는 생활을 하면서 몸은 바쁘고 피곤하지만 그 누구보다 마음이 행복한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마라톤 대회를 휩쓸면서 마라톤 동호회에서는 신적 존재가 되었고 창원에서도 유명인사가 되었다. 자신의 제2의 고향인 한국에 감사하며 대한민국 국민으로 행복하고 보람있게 사회에 도움이 되는 삶을 살고 싶었다. 그러나 한국인이 되는 과정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한국어뿐만 아니라 한국 역사, 문화, 사회 등 한국의 다방면에 걸친 지식과 교양을 습득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가 누구인가? 멀고 먼 아프리카에서 대한민국까지 줄기차게 달려오지 않았는가? 비록 귀화시험에 한 번 떨어졌지만 좌절하지 않고 더 열심히 공부하여 마침내 2010년 11월 25일 과천정부청사 법무부에서 영광스럽게도 20명의 귀화자를 대표해 선서를 하고 대한민국 국적 증서를 받게 되었다.

  공부하는 과정은 힘들었지만 그만큼 얻은 것도 많았다. 고조선부터 현대에 이르는 한국 역사와 한국 사회의 문화를 배우는 동안 한국 사람들의 모습에 대해 더 잘 알게 되었고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었다. 이름은 자신이 뿌리를 내리고 살고 있는 ‘창원’의 이름을 따 김창원이라고 지었다. 창원 김씨의 시조가 된 것이다.

  어느덧 결승점이 눈앞에 보인다. 오늘도 역시 그의 앞에는 아무도 없다. 그의 뒤에도 저만치 달리는 사람들이 보일 뿐 그의 곁에는 아무도 없다. 결승점을 향하는 김창원의 발걸음이 한층 빨라졌다. 결승 테이프를 맨 먼저 끊는 순간 김창원은 3년 만에 다시 서울국제마라톤 마스터스 남자부문의 최종 승자가 되었다. 한국 이름 ‘김창원’으로 ...

  꿈을 향해 달리는 그를 이제는 그의 조국인 대한민국이 지켜주어야 할 때이다. 한국을 사랑하는 한국인 김창원, 그는 오늘도 ‘인생’이라는 마라톤을 달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