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을 듣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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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을 듣다'
  • 조현용 교수
  • 승인 2014.02.27 1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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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현용(경희대 교수, 한국어교육 전공)
듣는 것은 귀가 하는 행동이기도 하지만 몸이나 마음이 하는 행동이기도 하다. ‘내 말 좀 들어라’라고 할 때 단순히 듣기만 해서는 안 된다. ‘말을 잘 듣는 아이’라는 말에는 행동이 포함되어 있다. 아이가 말을 듣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의사소통에 실패한 것이다. 말을 듣지 않는 아이도 청각적으로 말하자면 다 들은 것이지만 실제로 들은 것은 없는 게 된다. 말을 잘 듣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말을 잘 듣는 아이나 학생을 만나는 것은 행운이 아닐 수 없다.

우리말의 듣는다는 말은 참 재미있다. 우리말에서 듣는 것은 귀로만 하는 행위가 아니다. 우리는 ‘몸이 말을 안 듣는다.’는 표현도 하고, ‘손이 말을 안 듣는다.’는 표현을 하기도 한다. 우리식으로 하자면 몸에도 귀가 있고, 손에도 귀가 있는 것이다. 내 마음이 하는 소리를 몸도 들어야 하고, 반대로 이야기하자면 내 몸이 하는 소리를 마음도 들어야 한다. 내가 하고자 하는 대로 몸과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다면 모두 잘못 듣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마음의 귀, 몸의 귀를 열어놓고 잘 들어야 한다.

나이가 들수록 몸은 마음의 소리를 잘 못 듣는 듯하다. 내 뜻대로 몸이 안 움직이는 것이다. 전에 잘 되었으니까 지금도 내 몸이 잘 움직이겠지 하는 생각을 하지만 몸은 천근만근의 무게로 잘 안 따라 온다. 속도도 떨어지고 세밀함도 떨어진다. 몸의 반응이 예전만 못 한 것이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몸은 내 상태에 따라 잘 움직이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이미 무리하게 움직이면 탈이 나는 나이가 되었음을 들려주고 있는 것이다. 몸이 말을 잘 안 들으면 쉬어가야 한다. 그러면 몸이 말을 듣는다.

오히려 나이를 먹으면 마음이 몸의 소리를 잘 듣는다. 몸은 끊임없이 마음에 신호를 보내고 있다. 사람들은 나이가 먹어서 그런지 쉽게 피곤하다는 말을 한다. 술도 잘 안 깬다고 하고, 조금만 걸어도 피곤하다는 말을 한다. 눈이 침침해졌다고도 하고, 별일 아닌데도 눈물이 난다는 말도 한다. 모두 몸이 나에게 들려주는 이야기이다. 나이를 먹으면 무리해서 돌아다니는 일보다는 주변을 돌아보는 일을 더 정성껏 해야 한다. 몸에 안 좋은 일은 피해야 한다. 어쩌면 글을 읽는 것보다는 생각하는 시간을 늘려야 하고, 주변 사람들의 모습을 내 일처럼 살펴야 한다. 모두 몸이 내게 들려주는 이야기이다. 감기나 가벼운 우울증이 내게 들려주는 신호도 잘 알아채야 한다. 건강에 자만하지 말라는 말이고, 내 속의 나를 들여다보는 일만큼 내 밖에 있는 사람들의 소중함을 알아야 한다고 끊임없이 말을 건네고 있는 것이다.

공자는 ‘아침에 도(道)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는 말씀을 하셨다. 듣는 것의 엄중함을 보여 주는 말이 아닌가 한다. 듣기만 하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다. 들은 것이 내 심장을 울리고, 나를 새로 태어나게 하어야 진정한 ‘들음’이 된다. 믿는다는 말과 깨달았다는 말은 같은 말이다. 믿는다는 말, 깨달았다는 말은 변했다는 말이다. 함부로 깨달았다는 말을 할 수 없는 것처럼 함부로 믿는다는 말을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스스로 변하지 못하였음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종교를 믿는 사람들에게 묻고 싶다. 믿는 만큼 변했는가? 저녁에 죽어도 좋은가? 세상의 진리를 듣는 것은 진실로 귀한 일이다. 진리를 찾아 길을 나서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듣는 것도 믿는다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아침에 진리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괜찮은 것이다. 단순히 죽어도 좋다는 의미라기보다는 더 이상 죽음이 두려워지지 않는다는 의미로 보인다. 어떻게 사는 것이 좋은 것인지를 아는 사람은 더 이상 죽음이 두렵지 않은 것이다. 내 몸이 들려주는 소리를 들으라. 내 마음이 들려주는 소리를 들으라. 진리가 들려주는 소리를 들으라. 인생은 내 안팎의 소리를 잘 듣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