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큐 해설자겸 증언자로 출연한 한국전 참전용사 존 비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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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 해설자겸 증언자로 출연한 한국전 참전용사 존 비숍
  • 밴쿠버코리아미디어
  • 승인 2003.11.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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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룡 기자/roh@coreamedia.com

TVontario서 9일 오후8시부터 4시간 방영
한국 현지 촬영 집접 참여 현장 증언
"아직 안 알려진 사실들 많이 공개 될 것"
유엔 정전위 연락장교로 판문점 근무도
지난 9월 KVA 태평양지부 회장에 선임돼
참전 회고록 펴내기도
가평전투때 청력 손상...평생 회복안돼
"눈부시게 발전된 서울 모습 보니 놀라워"

현충일 (Remembrance Day)을 이틀 앞둔 일요일 저녁 한국전쟁에 관한 다큐멘터리가 광고 하나없이 장장 4시간에 걸쳐 방영된다. 온타리오주의 공영 교육방송인 ‘TVOntario’가 2년간 심혈을 기울여 제작한 란 프로그램이다.
존 비숍 (72·John R. Bishop·사진) 한국전참전용사협회 (KVA) 태평양지부 회장은 이 대형 다큐멘터리 방영을 손꼽아 기다려왔다. 자신이 해설자의 한 사람으로 출연했기 때문이다. 그는 지난해 11월 제작진과 함께 한국에 가 9일간의 촬영기간 내내 현지를 안내하며 제작에 참여했다.
비숍 회장은 “부산에서부터 비무장지대까지 한국전쟁의 주요 전적지를 돌면서 전체 전황과 캐나다군의 전투상황을 생생하게 담았다”고 내용을 소개했다.
특히 방송내용 중 그동안 숨겨졌던 새로운 사실이 공개될 것이라고 그는 귀뜸했다. 인천상륙작전때 사용된 상륙정들이 일본 장비라는 것이다. 맥아더 장군이 어떤 경로로든 일본 자위대의 지원을 받아낸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상륙작전에 참전했던 미 해병과의 인터뷰를 통해 이런 사실을 알아냈다”며 “2차대전 패전국인 일본이 항복 5년만에 이런 군장비를 갖췄으며, 더구나 그것을 한국전쟁에 보냈다는 사실이 놀랍지 않으냐”고 반문했다.
다큐멘터리는 부산 유엔묘지에서 출발해 그가 속해 있던 프린세스 패트리샤 경보병 제2대대 (2PPCLI) 의 전황을 좇아 밀양과 가평전투를 집중 조명한다. 또 인천상륙작전의 발자취를 따라 서울로 들어서 지금도 총탄의 흔적이 남아있는 서울역을 보여준다.
그는 수백만 달러를 들인 이 역작에 무보수 해설자이자 증언자로 참여한 것을 노년의 큰 보람으로 여기고 있다. 작품에 얼마나 나오는지 묻자 “하루 8~9시간씩 강행군하며 많은 양을 찍었지만 실제 나오는 것이 30초가 될지 30분이 될지는 편집자들의 기분에 달린 것 아니겠냐”며 웃었다.
이 프로그램은 9일 오후 8시부터 자정까지 광고없이 방영되고, 10~13일 매일 오후 10~11시 (이상 동부시간) 1시간씩 4회로 나눠 재방송된다. BC에서는 스타 초이스 (Star Choice) 위성방송 채널353 ‘TVO’를 통해 9일 오후 5~9시, 10~13일 오후 7~8시에 볼 수 있다.

86년 중령으로 퇴역한 비숍은 한국전 당시 캐나다군의 최대 격전이었던 가평전투에 참가했고 82~84년 유엔 정전위원회 연락장교로 판문점에서 근무했다. 한국전 참전자로서 전후 한국에서 근무한 캐나다 군인이 몇 명 있었지만 지금은 그가 두가지 경험을 모두 가진 유일한 생존자라고 한다.
그는 가평전투 50주년인 지난 2001년 4월 자신의 참전경험을 기록한 이란 회고록을 펴냈다. 사진?지도 자료는 물론 꼼꼼한 주석과 참고문헌 목록, 약어표, 인덱스까지 춘 책으로 그의 노력과 사명감을 짐작케 한다.

지난 9월 KVA 태평양지부 회장이 된 비숍 중령을 빅토리아 북쪽 코블 힐 (Cobble Hill) 자택으로 찾아가 만났다. 자신이 직접 지었다는 1에이커 숲 속의 집에서 기자를 맞은 그는 현관에 놓인 신라금관 모형부터 자랑했다. 가깝게 지내던 한국인 군속이 선물한 것이라고 한다. 아닌 게 아니라 그의 집은 반닫이와 문갑 같은 가구부터 갓, 담뱃대 등의 실물 장식, 민화, 생활용품에 이르기까지 한국의 정취가 가득했다. 그의 회고록은 이곳에서 창 밖을 내다보며 태평양과 반세기의 시간을 건너뛰면서 시작된다.

한국전쟁에 나가게 된 개인적 동기가 무엇이었나.
믿을지 모르지만 당시 19살이던 그것은 나에게 큰 모험이자 도전이었다. 이상주의나 이념적인 (idealistic or ideological) 대의 같은 건 없었다. 프리세스 패트리셔 대대원 대부분이 그런 상태였다. 전쟁이 얼마나 본격적일지 얼마나 지속될지 아무도 몰랐다. 그러나 우리가 옳은 일을 하고 있다는 신념은 분명히 있었다. 당시 장교들은 대부분 2차대전 참전자였던 반면 사병들은 거의 모두 새로 지원한 신병들이었다.

군에 지원할 당시 무엇을 했나.
BC 곳곳의 벌목장에서 일했다. 그 때 하루 임금이 15~18 달러였다. 나는 힘세고 건장한 장정이었다.

참전과정을 말해 달라.
50년 8월 자원입대해 훈련받고 11월25일 시애틀에서 출발했다. 크리스마스를 앞둔 12월23일 부산항에 도착했다. 상륙 이후 밀양에서 게릴라 소탕전을 벌이다 51년 2월15일 북진을 시작했다. 대구 대전 장호원을 거쳐 38선 부근에서 주요 전투를 하게 됐다.

가평전투를 말하는 것인가.
그렇다. 정확히는 51년 4월22일부터 25일까지 벌어진 격전이다. 중공군의 이른바 춘계대공세에 맞서 싸운 것인데, 아군 보병은 우리 대대와 오스트레일리아 1개 대대, 미군 1개 중대 등 6백명 정도인 데 반해 중공군은 10배 이상 많았다. 한때 중공군에 포위당해 고립되기도 했으나 677고지 등 주요 포스트를 사수했다.

당시 역할이 무엇이었나.
상병으로서 10명 단위의 소총편대 (rifle section) 를 지휘했다. 포성과 총성이 얼마나 심했던지 그 때 입은 청력 손상이 평생 회복되지 않았다.
이 대목을 얘기하면서 그는 올해 처음 나온 한국전쟁 기념우표를 꺼내 보여주었다. 우표에 실린 작은 사진 세장 가운데 오른쪽 사진에 자신의 상반신이 잘린 모습으로 들어있다는 것이다. 그의 책에 실린 큰 사진과 비교해 보니 51년 3월 눈덮인 중서부전선 참호에서 부대원들과 함께 경계 근무하고 있는 모습이다.

이후 장교로 직업군인이 되었는데.
한국전쟁은 18개월로 한정된 특별부대 (Special Force) 로 나간 것이었다. 전쟁중에 캐나다 정규군 (Regular) 에 들어갔다. 51년 캐나다로 돌아와 보병학교 교관으로 있다가 장교훈련을 받고 53년 소위로 임관했다.

한국전쟁을 ‘잊혀진 전쟁 (Forgotten War)’이라 부르는 데 동의하나.
7만7천명의 인명이 죽거나 다쳤다. 우리는 그 한 가운데 있었다. 누가 뭐라고 부르든 그건 전쟁이었다. 캐나다 정부에선 애써 ‘Korean Conflict’라는 표현을 써왔다. 학교에서도 한국전쟁에 대해 가르치지 않았다. 이제 그들도 전쟁임을 인정하고 있다. 늦었지만 바른 길로 들어선 것으로 본다.

약력을 보면 베트남전과도 인연도 있는데.
73년 캐나다?폴랜드 등 서방과 공산권 4개국으로 구성된 ICCS의 일원으로 군부대 철수 등 종전협정 이행 감시업무를 맡았다. 한국군 철수를 감독하게 돼 묘한 감정이 들었다.

캐나다가 베트남전에 참전하지 않은 것은 잘 한 일이었다고 생각하나.
잘 된 일이라고 생각한다. 베트남에서 8만명 이상의 인명이 죽거나 다쳤다. 전후에 미국이 겪은 후유증을 생각해보라. 수많은 전상자들이 아직도 신음하고 있다. 베트남전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82~84년 다시 한국에서 근무할 때 얘기를 해달라.
판문점에서 유엔 정전위원회 연락장교로 일했다. 정전위반 사례가 보고될 때마다 나가 조사하는 임무였다. 때문에 군사분계선 155마일 중 안 가본 곳이 없다. 아내 주디 (Judy)는 간호사인데 세브란스병원 국제의료원에서 일했다. 그래서 한남동에 집을 두고 주말부부로 살았다.

이후 한국을 방문하면서 느낀 점은.
한국은 갈 때마다 다른 모습이었다. 전쟁중 4번이나 주인이 바뀌면서 폐허가 됐던 서울을 보면 참으로 경이롭다. “놀랍다 (mind-boggling)” 는 말 밖에 달리 표현을 찾을 수 없다. 2001년 가평전투 50주년 기념식에 동료 참전용사들과 같이 방문했는데, 한국의 발전된 모습과 한국인들의 호의에 모두들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2년전 펴낸 회고록을 4부작 (tetralogy)의 첫 편이라 했는데, 다음 편은 무슨 내용이며 언제 나오는가.
2편은 독일과 베트남 평화유지군 경험, 3편은 레바논 이라크 시리아 등 중동지역에서 무관으로 일했던 경험, 마지막 4편은 은퇴후 생활 (그는 은퇴 후에도 왕성한 활동을 해왔다. 특히 세일링은 프로급으로 부인 주디와 함께 4만해리의 항해기록을 갖고 있다) 과 군경력 전반에 대한 회고가 될 것이다. 언제 완성될지는 나도 모르겠다.

이렇게 말하는 그의 얼굴에 노병의 회한이 스치는 듯 했다. 그는 회고록의 부제를 ‘전사, 평화유지군, 외교관, 스파이 (Warrior, Peacekeeper, Diplomat, Spy)’ 라 붙였다. 36년 군경력을 몇 단어로 정리해 놓고 그는 자신의 삶을 뒤돌아 본다.

그는 회고록에서 상당한 문학적 재능을 보여줬다. 참전동료이자 문학박사이며 회고록의 서문을 쓴 스티븐 보로드스키는 “전쟁을 통한 자아의 성숙을 그린 일종의 성장소설 같이 읽힌다”고 했다. 한국전쟁은 그의 생애에 가장 깊은 상흔을 남긴 경험임에 틀림없다.

[입력: 2003년 11월 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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