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률칼럼>'무호적자'와'무국적자'차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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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률칼럼>'무호적자'와'무국적자'차이는?
  • 재외동포신문
  • 승인 2014.04.15 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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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재 신채호 선생의 국적회복 사례<1>

본지는 본지와 함께 자매지인 '한인경제'에 국가마다 다른 법적 제도적 차이로 인해 어려움을 겪고 있는 재외동포들에게 도움을 주기위해 관련분야 전문가인 차규근 변호사의 '법률상담과 칼럼'을 연재한다.

칼럼을 연재하는 차규근 변호사는 법무법인 '공존'의 대표변호사로 지난 2006년부터 5년동안 법무부 국적난민과장으로 재직하면서 외국인의 귀화허가를 주 업무로 7만여명에 달하는 외국인에게 귀하허가를 한 바 있다.<편집자 주>

▲ 차규근 변호사(법무법인 '공존'대표변호사)
▲차규근 변호사의 주요 이력 및 경력

△서울대학교 법학과 졸업(1991.2)
△제24기 사법연수원 수료(1995.2)
△법무부 국적,난민과장(2006.6~2011.5)
△복수국적허용 개정국적법 실무책임자
△법무법인 공존 대표변호사(2012.2~현재)

필자는 2006년 6월부터 2010년 5월까지 5년 동안 법무부에서 국적,난민과장으로 근무를 하였다. 중앙부처 과장직을 5년이라는 시간 동안 계속하여 맡은 사례는 거의 찾아볼 수 없었는데 덕분에 필자는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었다.
 
필자는 장관을 대신하여 외국인의 귀화허가를 전결 처리하였는데  재직기간 동안 필자가 귀화허가를 한 외국인의 수는 70,000명 정도가 된다. 또 업무와 관련하여 보도자료를 배포한 횟수가 30여차례, 언론인터뷰 횟수는 20여차례가 된다. 이렇게 필자가 경험한 다양한 사건들 중에 아직도 기억에 오래 남는 사건으로 단재 신채호 선생의 국적에 관한 것이 있어 지면을 통하여 소개를 한다.

필자가 국적난민과장으로 업무를 시작하고 몇 달되지 않은 2006년10월, 수십 통의 편지가 첨부된 한 통의 민원이 대통령비서실에서 이첩되어 왔다. 일반인들이 대통령비서실 등에 민원을 제기하더라도 대통령비서실 등에서는 담당 소관과로 이첩을 하여 민원을 처리토록 하고 있었기 때문에  필자의 근무처로 이첩되었던 것이다.

그 내용은 '단재 신채호 선생님에게 국적회복을 시켜달라'는 것이었다. 청주시 상당구에 있는 원봉중학교 1~3학년 학생 32명이 써서 보낸 편지는 대략 다음과 같은 내용이었다.

안녕하세요, 대통령님!  저는 청주 원봉중학교에 다니는 학생입니다. 제가 이렇게 편지를 드리는 이유는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 헌신하신 단재 신채호 선생님을 비롯한 많은 독립유공자와 그 후손들이 우리나라의 국적을 찾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여러 독립운동가분들의 피나는 노력이 의해서 우리나라의 독립을 이뤄낼 수 있었다는 것은 대통령님께서도 잘 아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분들이 우리나라의 국민인 것은 당연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국적을 찾지 못한다는 것은 매우 안타까운 일일 것입니다. 독립운동에 힘쓴 그들을 위해 우리나라 국적을 꼭 찾아주시기 바랍니다. 2006.10.20. 원봉중학교 3학년 학생 일동.

당시 언론에 단재 신채호 선생은 '무국적자'이며  이 때문에 국회에서는 단재 신채호선생에게 국적을 회복시켜주는 법률안이 계류 중이었는데 원봉중학교 학생들은 학교 축제 때 이러한 사실을 알고서는 비분강개하여 단재 선생의 국적회복을 청원하는 민원을 집단으로 제기한 것이었다.

필자는 원봉중학교 학생들의 민원을 접하고서 가슴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필자 역시 예전에 언론에서 단재 선생이 무국적자라는 기사를 보고서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생각을 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필자가 국적난민과에 근무를 하면서 당시 현안으로 대두되고 있던 쟁점들을 파악하는 과정에서 단재 선생의 국적에 관하여 필자도 미처 몰랐던 내용들을 접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일반인의 상식과는 좀 다른 것이었다. 간단히 말하면 '국적'과 '호적'의 개념상 차이에서 비롯된 오해였다는 것이다.

즉, 일제는 독립투사를 색출하기 위해 출생이나 사망, 이사, 혼인 등의 신분 변동이 있을 때 신고를 하는 호적법을 공포하였는데 단재선생은 이러한 호적신고를 거부하고 중국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에 투신하시느라 호적에 등재되지 않았다. 그 후 제정된 우리의 호적법령에 의하면 이미 호적 편제 전에 사망한 자에 대하여는 취적할 수가 없어 단재 선생과 같이 호적 없이 사망한 독립운동가를 호적에 등재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국적에 관한 임시조례, 대법원판결에 의하면 호적은 국적의 취득과 상실을 절차적으로 정리하는 행위에 불과하며, 일제시대 조선인을 부(부)로 하여 출생하였다면 일제시대 호적에의 등재 여부와 무관하게 출생과 동시에 조선국적을 취득하였으며 그 후 무호적 상태에서 사망하였다고 하더라도 이미 우리 국민으로서 대한민국 국적자라는 것이다.

즉, 단재 선생의 경우 ‘무호적자’라고는 볼수 있으나 ‘무국적자’라고는 볼 수 없다는 것이 관련법령 및 대법원판례의 취지였다. 물론, 사실상 국적이 없는 상황이었다는 점에서 ‘사실상의(de facto) 무국적자’라고 표현할 수는 있겠으나 ‘법적으로(de jure) 무국적자'라고는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 후  2009년 2월 '구 호적없이 사망한 독립유공자에 대하여는 다른 법률의 규정에도 불구하고 대법원 규칙이 정하는 바에 따라 가족관계등록을 할 수 있다'는 내용으로 개정된 ‘독립유공자의 예우에 관한 법률’이 시행되면서 결국 단재선생의 호적등재는 2009년 3월 이뤄지게 된다.

원봉중학교 학생들의 민원을 접했을 당시  필자는 어린 학생들의 투철한 역사의식과 정의감에 깊이 감동하였다. 필자는 민원회신에서 먼저 국적과 호적의 관계, 단재선생에게 국적을 부여하는 것의 법리상 어려움 등에 대하여 설명한 후 마지막을 이러한 문장으로 끝맺었다.

친애하는 원봉중학교 학생 여러분! 앞으로도 우리나라의 역사와 정치 그리고 미래에 대해 학생 여러분들이 깊은 관심을 가져주실 것을 부탁하며, 여러분의 앞날에 행운이 함께 하기를 바랍니다. 학생 여러분들이 곧 우리나라의 미래이고 희망입니다. Boys, be ambitio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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