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추리소설이 인기를 끄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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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추리소설이 인기를 끄는 이유
  • 이종태
  • 승인 2008.12.19 1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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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종태(본지 칼럼니스트, 금융경제연구소 연구원)
요즘 일본 추리소설이 인기를 끌고 있다. 일본과 추리소설이라는 이상한(?) 결합이 한국에서 나름대로 주목 받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지금 필자가 쓰고 있는 글은 이 같은 질문에 대한 하나의 가설적 답변이 될 것이다. 우선 추리소설이 인기를 끄는 이유는?

트로츠키주의 경제학자인 에르네스트 만델은 범죄소설의 역사를 유물사관의 입장에서 분석한 재미있는 저서를 가지고 있다. 『즐거운 살인(Delightful Murder) 』이 그것이다. 이 책에서 만델은 범죄소설의 기원을 사유재산권이 확립되어가던 자본주의 초기에서 찾는다. 범죄는 자본주의적 사유재산권을 부정하는 행위이자, 이와 관련된 사회적 모순의 발현이라는 것이다.

원인이 있어야 결과가 있는 법! 그에게 범죄는 자본주의의 고유한 산물이므로, 범죄의 역사와 자본의 역사는 그대로 일치하게 된다. 사실 이런 논지엔 동의하기 힘들다.

자본주의 이전엔 물론이거니와 사회주의 사회에서도 범죄는 존재했으니까. 소련 시절에도, 잘 알려지지 않은 처참한 연쇄살인 사건이 다수 발생했었다고 한다. 그러나 사람들이 범죄소설에 빠져드는 이유에 대한 그의 설명엔 동의할 수밖에 없다. 그것은 범죄소설이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에 찬 현실을 반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흥미로울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 다음은 하필 ‘일본’의 추리소설인 이유.

필자의 소견으로는 무엇보다 일본 추리소설의 품질 때문이 아닌가 한다. 동양에서 최초로 서구 문화의 세계를 받은 나라인 만큼 일본 추리문학의 역사는 본고장인 영국과 크게 시차가 없다. 20세기 초반에 이미 추리소설 전문지가 발간되었고, 이를 통해 에도가와 란포, 요코미조 세이시 등이 문명을 날렸다. 이 두 사람은 알게 모르게 한국과도 관계가 깊다.

예컨대 지금 60대에겐 친숙할 김래성의 대표작 『마인』은 에도가와 란포의 『음수』에서 기본 줄거리를 따고, 프랑스 소설가 가스통 르루의 『노란방』에서 일부 트릭을 차용한 작품이다. 한국의 10~20대로부터 엄청난 인기를 끌었던 애니메이션 『소년 탐정 김전일』은 요코미조 세이시와 관계 깊다. 이 애니메이션에서 김전일(일본 식으로 발음하면 긴다이치 하지메)은 세이시 소설의 대표적 탐정인 긴다이치 고스케의 손자로 설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패전 이전에 주로 활동했던 란포와 세이시의 작품은 현실과 일정한 거리를 두는 순수 미스테리물(이른바 본격물)에 가깝지만(란포의 유명한 발언, “밤의 꿈이야 말로 진정한 현실”), 고도 성장기의 대표적 작가인 마쓰모토 세이초나 모리무라 세이치는 미스테리와 사회적 병폐에 대한 고발을 교묘하게 결합시킨 ‘사회파 추리소설’로 독자층을 대폭 확대했다.

1990년대 이후의 일본 추리문단은 신본격파와 신사회파로 양분되는 양상인데, 전자로는 아야츠지 유키토 등이 주로 밀폐된 공간을 무대로 하는(사회와 단절된) 피비린내 나는 살인 퍼즐을 펼치고, 후자로는 미야베 미유키 등이 활약하고 있다.

특히 미야베 미유키는 대중문학과 본격문학의 차이를 뛰어 넘는, 명실 공히 일본의 대표 작가로 성장하고 있는데, 그녀의 대표작인 『화차』는 사채 문제, 『이유』는 부동산 거품, 『모방범』은 세대 격차 등 사회문제를 훌륭한 솜씨로 다루고 있어 한국에서도 인기가 높다.

또한 일본 추리소설의 인기는, 요즘 한국 소설이 지나치게 재미없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1980년대의 작가들이 현실을 지나치게(?) 의식하면서 생경한 정치이념을 그대로 이야기로 만들어버렸다면, 요즘 작가들은 몽롱한 현실도피성 소설만을 양산하고 있다고나 할까. 재미없는 것이 당연하다.

희극과 비극이 현란하게 교차되고, 사회세력 간의 대회전(大會戰)이 다시 한번 몰아칠 한국사회는, 본격문학이든 추리소설 등의 장르문학이든, 현실을 반영해서 사회적 성찰을 심화시킬 좋은 작가들을 절실하게 요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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