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동대지진 발생과 조작된 유언비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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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동대지진 발생과 조작된 유언비어
  • 강동완
  • 승인 2003.08.05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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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년 9월 1일 오전 11시 58분, 일본 관동지역에 진도 7.9의 대 재앙이 발생했습니다. 이 천재지변 속에 힘없는 조선인들은 경찰과 관(官)의 조직적인 유언비어로 인해 무참히 살해당해야 했습니다. 왜 죽어야 하는지, 무슨 이유로 죽임을 당해야 하는지도 모른 채 그들은 그렇게 이승에서의 한 많은 생을 마쳐야 했습니다.

올 해로 학살 80주년을 맞이합니다만, 아직도 대한민국 정부는 물론 일본 정부에서도 아무런 관심을 갖지 않고 있고, 세월에 묻혀 진상규명조차 제대로 되지 못한 현실을 참으로 부끄럽게 생각하며, 몇차례에 걸쳐 그 진실의 일단이나마 여러분들께 소개해 드리고자 합니다.

소중한 자료를 제공해 주신 일본에서 발행되는 잡지 '월간 아리랑'(대표 김종영)에 감사의 말씀을 올립니다.....강동완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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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가와(荒川)는 평화로이 7월의 벌판을 흐르고 있다. 평화의 깃발처럼 강 가운데 푸른 파스텔톤의 전망대 하나, 강변의 잔디 위엔 운동 기구들이 한가로이 나뒹굴며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까지 70년 전 동포의 피로 물들었던 자취는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인간사 기쁨도 슬픔도 희미하게 발색시키는 마력을 지닌 세월, 70년이란 시간은 자연마저도 망각시켜버릴 만큼 긴 것인지 오늘의 아라가와에서는 그때의 핏빛 상처를 한 끄트머리도 찾아볼 수 없다. 가끔, 다리를 건너가는 한국인들만이 자연의 침묵에 묘한 배반감과 가슴을 치받치는 작은 격정에 코끝이 시큰해질 뿐…….

한국인에 대한 학살은 일본 관동지방을 뒤흔든 사상 초유의 대지진 후에 마치 여진처럼 닥쳐왔다. 대지진보다 더 가공할 여진이었다.

1923년 9월 초하루, 가을로 가는 길목으로 하늘은 높고 푸르기만 했다. 어느 날처럼 사람들은 바쁜 일상으로 오가고, 주택가의 주부들은 한가로이 빨래를 털어 널었다. 좀 이르게 점심을 서두른 사람들은 식탁 앞에 마주 앉기도 했던 시간 오전 11시 58분.

갑자기 거리가 술렁대기 시작했다. 상모만(相模彎) 해저를 진원지로 한 진도 7.9의 강진이 동경·橫近·삼포반도 등 관동 일대를 해일처럼 덮쳐 온 것이다. 땅이 갈라지고 집이 무너지며 도시는 삽시간에 불바다가 되었다. 지진의 여파로 해안에서는 해일이 일었으며 거센 비바람까지 몰아쳤다. 수만의 건물이 파괴되고 수십만의 인명피해를 초래했다.

특히 橫近과 동경은 순식간에 폐허의 쑥밭으로 변했다. 전신, 철도, 가스, 전기, 수도 등 기관시설을 비롯해 학교, 관청, 병원을 비롯해 주택 한 동도 멀쩡한 건물이 없었다.

특히 그때 막 점심을 준비하기 위해 켜놓은 화덕의 불이 지진으로 흔들리는 바람에 곳곳에서 화재가 번졌다. 도시는 불바다가 되어 연기로 하늘을 뒤덮었으며 이 불은 18시간 이상 꺼지지 않고 목조 일색의 동양 제일을 자랑하던 동경의 ⅔를 잿더미 속에 매몰시켰다.

동경 대학 부속병원에 입원해 있던 환자 200여 명이 생화장 당했는가 하면 특히 지진을 피해 육군피복창고로 대피해 있던 3만 2천여 명이 불에 타죽는 아비규환이 연출되었다. 당국에서는 그나마 남아 있던 건물마저도 화재방지를 위해 폭파해야 했다.

진재 시 방재 조사회(震災市防災調査會)에 의하면 이 지진으로 22만여 명의 사상자, 46만 호의 가옥 파손, 손해 액이 당시 200억 원에 이르렀다고 기록되어 있다. 실로 일찍이 없었던 대진재였다.이 불행한 재앙 속에서 한국인에게 더 큰 불행이 잉태되고 있었다. 곧이어 조선인에 대한 악의에 찬 조작된 유언비어와 이에 따른 조선인 학살이다. 대지진의 불바다에 이어 관동일대는 조선인의 시체로 시산(屍山)을 이루고 동경을 가로지른 아라가와(荒川), 스미다가와(隅田川) 두 강은 혈하(血河)로 붉게 물들었다."4,5백 평에 가까운 공지에 반나체의 시체가 3백여 구 뒹굴고 있었다. 목이 잘려 기관지와 식도 두 경동맥이 꺼멓게 드러났고 뒤에 서 목덜미가 베어져 벌겋게 살점이 드러난 것, 억지로 찢어 끊은 흔적이 역력한 잘린 머리는 눈을 돌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중에서도 더한 광경은 젊은 여자가 배가 잘린 채 죽어 넘어진 가운데 6,7개월 된 태아가 죽어 뒹굴고 있는 것이었다. 여자의 음부에는 쇠사슬과 죽창이 꽂혀 있었다. 내가 일본인이란 사실이 부끄러워 견딜 수 없었다"이는 대지진 당시에 조선인 학살을 목격한 일본인 田邊貞之助(후에 불문학자)의 목격담이다.

일본 사회 불안의 희생양

관동지방을 휩쓸어 사람을 생매장, 생화장하는 아비규환의 천재(天災) 속에서 또다시 조선인에게 덮친 인재(人災)의 원인은 어디에 있었는가.
지진으로 잿더미가 된 도시에서 일본 정부는 무엇보다도 식량난에 의한 민중폭동을 우려하고 있었다. 1차대전 종결 후 1918년 일본에서 있었던 끔찍한 식량난을 기억하고 있던 일본 정부였다. ?米價는 폭등하고 주가(株價)는 폭락'하는 나날이었다. 게다가 신내각마저 아직 들어서지 않은 정권 무중력 상태에서 대지진이란 감당하기 힘든 재난이었다.

이 난관을 뚫고 나가기 위해선 재일 조선인들을 속죄양으로 삼는 길밖에 없어 보였다. 민족적 증오감정을 자극해 정부를 향한 민중의 공격성을 조선인에게 돌리는 비열한 방법이었다. 그래서 이들은 혼란을 틈타 한국인이 무슨 ?주의자?들과 결탁해 혁명 운동이라도 획책하지 않았을까 하는 의구심을 현실화해 대 참살극의 대본을 만들었다.

이런 끔찍한 계략이 먹혀 든 데는 그럴 만한 배경이 있었다. 20년대부터 일본 경제계는 불황에 접어들어 실업자가 늘어갔다. 정부는 실업자들로 인한 사회 불안의 원인을 일본에 체류해 있는 조선인 탓으로 돌려 왔었다. 일자리를 잃은 일본 노동자들은'우리의 밥줄을 빼앗는 놈'들로 조선인 노동자들을 생각해 왔다. 여기에 일본 공산당이 창당되는 등 농민들의 권익투쟁이 고조되었고, 2.8독립선언, 3.1독립운동 등 조선인들과 일본의 대립 감정이 고조된 터였다. 조선인들을 속죄양으로 만들기에 적합하기까지 한 환경이었다.

유언비어 조작의 주범은?

그렇다면 이때 유언비어를 퍼뜨린 주범은 과연 누구였을까.
학살 당시 '일본한국기독교 청년회'의 총무로 있던 최승만 씨는 회고록에 이렇게 기록하였다.

"그때 내무대신은 水野鍊太郞, 경찰청 총감은 赤池濃이었다. 이중 水野는 조선총독부 정무총감 출신이었고 赤池는 총독부 경무국장 출신으로 조선인들의 배일(排日) 감정에 두려움을 느끼고 있던 터였다. 이를 충분히 이용할 수 있었던 사람들로 이 두 사람을 짐작할 수 있다."

당시 퍼뜨린 유언비어가 지진 발생 두세 시간 만에, 또 시시각각으로 재빠르게 퍼져나간 데는 관리들의 유포 내지는 방조가 있었음을 충분히 짐작케 한다. 유언비어는 지진 발생 세 시간 만인 오후 세 시경부터 나돌기 시작했다. 일본경시청에서 만든 『대정대진화誌』에 의하면 한 시부터였다고 한다.

맨 처음 유포된 유언의 내용은'9월 1일의 화재는 선인(鮮人)들의 방화 때문이다'였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유언은 '9월 1일 화재는 사회주의자와 결탁한 선인들이 방화 또는 폭탄 투척으로 일어난 것이다?, ?선인들의 습격이 있을 것이다' 등으로 살이 붙으며 리얼해져 갔다. 9월 1일 오후부터 3일 사이 한국인을 적대시하는 각종 유언비어가 시간이 경과하면서 에스컬레이트해 가는 과정을 살펴본다.(자료:일본경시청의 『大正大震火災語』)

- 9월 1일
사회주의자와 선인의 방화가 많다.(오후 3시경)

-9월 2일
불령선인(不逞鮮人)들의 내습이 있을 것이다. 9월 1일 화재는 다수의 불령선인들이 방화 또는 폭탄을 던져서 일어난 것이다(오전 10시). 그들은 단결하여 도처에서 약탈을 감행하며 부녀를 능욕하고 잔존 건물에 불을 질러 파괴하는 등 폭악이 심하여 전시(全市)의 청년단, 재향군인단 등은 현(縣) 경찰부와 협력하여 이를 방지코자 노력하고 있다(오후 2시 5분). 요코하마 방면에서 내습하는 선인의 수는 약 2천 명으로, 총포 도검 등을 휴대하고 이미 大鄕의 철교를 건넜다.

군대는 기관총을 비치하고, 선인의 입경을 차단시키고자 하며, 재향군인 청년단원 등도 출동하여 군대를 응원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들은 군대를 失口 방면으로 향하고 있다(오후 2시 5분). 原田町을 습격한 2백 명은 다시 相原·片倉의 두 마을에 침입, 농가에 들어가서 물건을 빼앗고 부녀를 살해했다(오후 4시). 선인들이 鶴見 방면에서 부녀자를 살해했다(오후 4시 40분). 선인 1백10명이 寺島에서 관내 四木橋 부근에 모여 흉기를 휘두르며 폭행을 하고 방화도 한다(오후 5시).

선인들이 기회만 있으면 폭동을 일으키려고 계획하였는데, 진재가 돌발함에 따라 예정 계획을 변경하여 미리 준비했던 폭탄과 독약을 유용하여 제도(帝都) 전멸을 꾀하고 있으므로 우물물을 마시거나 과자를 먹는 것은 위험하다.

-9월 3일
선인 약 2백 명이 本鄕·向島 방면으로부터 대일본방적주식회사와 隅田역을 습격했다(오전 1시). 선인 수백 명이 本鄕·湯島 방면으로부터 上野 공원에 내습한 모양이니 속히 谷中 방면으로 피난하라. 짐 들고 가지고 갈 필요는 없다(오전 4시). 군대 약 30명이 선인의 폭동을 진압하기 위하여 月島에 갔다(오전 10시). 선인들이 경찰서에서 석방되었으니 속히 이들을 잡아 죽여버려라(오후 3시 40분). 선인이 시내 우물에 독약을 투입했다(오후 6시 30분). 上野공원과 불타버린 곳에는 경찰관으로 변장한 선인이 있으니 주의하라(오후 9시).

언론과 관헌들 유언비어 부추겨
유언비어는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만 흐른 것은 아니었다. 공공연히 게시판에 나붙기도 하고 관헌들의 입으로 알려지기도 했다. 9월 3일 내무성의 경보국장은 각 지방 장관에게 이러한 질문을 보냈다.

'동경 부근 조선인들이 진재를 이용, 불을 지르고 폭탄을 투척하여 좋지 못한 목적을 수행하려 하는 바 조선인 행동에 대하여 엄중한 취초가 있기 바람.'

또한 군부의 한 고위층인 제 14단 참모장 井染大佐는 9월 7일자 「不野新聞」에 '이번 불령선인들의 행동의 이면에서 사회주의자와 소련의 과격파가 관련이 있다… 요컨대 이 3자의 3각 관계를 기초로 하여 되었다는데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포고했다. 유언의 허위성과 진실성을 정확히 파악하여 보도해야 할 신문들이 뜬소문을 그대로 보도해 사실인 것처럼 믿게 한 것이었다.

예를 들면 ?…각처 우물에 독약을 넣고 이재민의 자녀에게 주는 빵 속에 독약을 뿌려서 준다고 하니 기가 막히는 일이다'(9/7 하부신문) '…어떤 村에는 조선인 일단의 습격으로 1촌이 거의 전멸되었다. 그들은 계획을 세워놓고 미리 시기를 엿보고 있었던 것 같다. 시내의 중요한 건물은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이전부터 화살표 위에 두 줄기 불빛 같은 표를 찍어둔 듯하다'(이바라끼 신문 9/7)는 식이었다.

이외에도' 2천 명이 팔을 끼고 다니며 부녀자 20∼30명씩을 붙들어 놓고 강간한다'?총살된 선인들은 폭탄 휴대자들이다'? 붉은 천을 팔에 감은 자는 폭탄 가진 자요, 노란빛은 독약 탄 자이다' 등의 신문 기사들은 비록 유언비어를 그대로 실어 조선인들에 대한 적대감정을 악화시켜 나갔다.

당시 일본에 살던 한국인들은 대부분이 노동자였고 그밖에는 공부하러 온 학생들이었다. 일제의 식민지 토지 수탈 정책에 의해 농토에서 유리되어 살기 어려워진 사람들이 일본에 건너와 헐값에 노동력을 팔고 있었고 학생들도 어려운 고학생이 대부분이었다. 이처럼 하루 벌어 하루 살기에 바쁜 조선인들이 수천 명씩 무장하여 군대와 대결할 만큼 조직적으로 움직인다는 것은 상식 밖의 일이다.

진재의 혼란 속에 개별적인 범법행위가 있을 법했는데도 그 때 조선인 범법자는 강매모(姜梅模)란 사람이 폭발물을 소지한 것뿐이다. 그것도 사건과는 관계가 없었다. 범죄는 고사하고 유순하게 살아가던 그런 조선인들이었다. 경찰과 자경단에 잡혀가는 태도도 ?대부분 노동자 같은데도 매우 의젓했고 흉하거나 범죄자 같은 이는 없었으며 늠름하여 천하를 내려다 보는 태도로 씩씩하게 걸었다?고 일인들의 눈에 비칠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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