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 소년이고픈 내고향 울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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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소년이고픈 내고향 울주
  • 방현석 님
  • 승인 2006.12.29 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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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살던 고향은...7.울산시 울주군
어린시절 자전거를 타고 친구들과 가로질러 다니던 동천강도 많이 변했다.
30년 동안 300년을 살아버린 사람들. 바로 한국인이다. 서구사회가 300년에 걸쳐 통과했던 시간을 단 30년 만에 우리는 통과해버렸다.

긴 식민지 시대와 전쟁의 참화 위에 펼쳐졌던 가난과 궁핍, 억압과 독재... 30년 전에 지금의 한국 사회를 상상할 수 있었던 사람이 몇이나 있었을까. 한국에 있는 우리는, 누구나, 30년 전에 아무도 상상할 수 없었던 세상에 살고 있다.

30년 전의 고향을 떠올리는 일은 누구에게나 까마득한 일일 것이다. 나에게도 고향을 생각하는 일은 참으로 아득한 일이다.

울산.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변한 한국사회에서도 울산만큼 많이 변한 곳은 찾기 쉽지 않을 것이다. 나는 울산에서 중학교까지 다녔다. 내가 살았던 곳은 울산시가 아니라 울주군 농소면이었다. 그것도 면 소재지가 아닌 이화라는 작은 마을이었다.

5리길 초등학교를 매일 걸어서 6년을 다녔고 시오리길 중학교도 1학년 때까지 걸어 다녔다. 2학년 때부터는 자전거를 타고 다닐 수 있었다. 오래된 미루나무가 양쪽으로 늘어선 신작로를 따라 페달을 밟으며 달리던 6번국도를 기억한다. 그 길옆으로 펼쳐진 들판, 들판 너머로 흐르던 동천강의 물줄기도 기억한다.

여름이면 우리는 신작로를 버리고 들판을 가로질러 동천강으로 달려갔다. 넓은 백사장과 깨끗했던 물줄기. 지금은 아무도 그 동천강을 거슬러 오르던 은어떼를 상상하지 못할 것이다. 그 은어떼를 쫓아 벌거숭이로 첨벙거리던 소년들은 이제 마흔을 넘어 쉰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었다.

내 머릿속에 남아 있는 풍경들이 실재였음을 확인할 수 있는 기회는 옛 친구들을 만났을 때뿐이다. 초등학교 친구들로 이루어진 계. 약수초등학교를 같이 다닌 친구들의 계모임에는 직계존비속의 사망에 준하는 사고가 아니면 불참이 허용되지 않는다.

울산에 살고 있는 녀석들도 몇 있지만 대부분은 나처럼 멀리 나와서 산다. 그럼에도 빠짐없이 모인다. 우리가 나누어가진 기억의 조각들을 이어붙이기 위해서다. 친구들과의 이야기 속에서 우리의 고향 울산은 온전한 옛 풍모를 드러낸다.

▲ 울기등대의 소나무길은 일상에 지친 사람들을치료해준다.
최대의 공업도시로만 알려진 울산은 아름다운 항구도시였고, 오랜 역사도시다. 울기등대의 소나무 숲은 지금도 기품을 잃지 않고 있다. 울산항에 이웃한 장생포는 포경선의 이름난 근거지였고, 고래 고기는 울산에서 가장 흔하고 싼 고기였다. 지게를 진 사람들이 마을을 돌며 고래 고기를 팔러다녔다.

묵은 김치와 함께 넣어 끓이던 고래 고기의 맛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친구들의 목젖은 차례로 움직인다. 명절과 잔칫날이 아닌 날, 기름기를 맛 볼 수 있게 해준 거의 유일한 음식이 고래 고기였다. 포경이 금지되면서 그렇게 싸고 푸짐했던 고래고기는 가장 비싼 음식이 되었다.

울산에서 나고 자란 우리는 울산에서 계를 하지만 고래고기를 더 이상 먹지 않는다. 고래 보호주의자가 되어서가 아니다. 가장 만만하던 서민의 영양보충원이던 고래를 특상급 요리로 바꾸어 놓은 현실을 인정하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계모임에서 빠지지 않는 이야기는 개발이다. 물동이를 들고 물을 길어다 먹었던 우물 자리가 묻히고 아파트가 들어섰다. 아파트 한 동이 들어서면서 옛 마을 하나보다 많은 인구가 늘었다. 그러나 우후죽순으로 들어서던 공장과 아파트들이 드문드문 피해가며 옛 모습으로 남아 있는 마을들이 간간히 있다.

포크레인을 들이댔다가 삽날에 걸려나온 토기 조각들로 공사가 중단된 곳도 한 두 곳이 아니란다. 신라문화권과 인접한 울산은 곳곳에 유적지가 산적해있다. 동천강과 함께 태화강의 지류를 이루고 있는 대곡천의 반구대 암각화(국보285호)에 그려진 191점의 선명한 그림은 울산이 얼마나 오래된 인간의 역사를 간직한 땅인지를 너무나 잘 보여주는 유적이다.

내가 자란 마을은 울산에서 6번 국도를 따라 경주로 가는 울산의 마지막 마을이다. 6번국도를 따라 20분을 달려가면 불국사가 있다. 호계 역에서 기차를 타고 소풍을 다녔던 곳이 불국사였다. 이번 겨울 계는 불국사 아래에 있는 팬션에서 열렸다. 12월 세 째주 주말에 열린 곗날, 분주한 서울의 연말 일정이 밤 8시에 끝이 났다. 벌써 친구들로부터 날아든 문자와 음성메시지가 겹겹이었다. 차를 몰고 길을 나섰다. 부지런히 밟으면 자정무렵에 도착할 것 같았다.

그러나 폭설이 중부지방을 뒤덮었다. 고속도로 휴게소에 차를 세우고 예상강설량과 교통정보를 확인한 나는 차를 돌려야 했다. 눈 덮인 6번국도, 들판, 그리고 초등학교 운동장이 떠올랐다. 친구들도 어쩌면 우리들이 뒹굴었던 운동장을 떠올리고 있었을까.

한 학년이 한 반 뿐이었던 우리는 6년을 같은 교실에서 공부했다. 여자 33명, 남자 22명, 합 55명. 중간에 한 두 명의 전학생들이 있었지만 우리는 그렇게 졸업을 했다. 우리가 졸업을 한 다음 학생 수가 점점 줄어들어 한 때 학교가 폐교 위기에 몰렸다는 통문이 돌았다. 울산에 남아 있는 친구들이 학교 지키기 운동을 펼친다는 소문이 가시기도 전에 교실 증축공사가 벌어지고 있다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울산이 광역시로 변하면서 울주군이던 우리의 고향도 시의 일원이 되고, 도시가 팽창하면서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기 시작한 것이다. 몇 년 사이에 한 학년이 4학급으로 늘어나고, 단층이던 교사는 4층으로 높아졌다. 이제 책보자기를 등 뒤에 울러매고 다녔던 우리의 모교가 없어질지 모른다는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다행이다. 그러나 아이들이 늘어나고 교사가 높아진 것이 반가운 일은 아니다. 많은 학생과 높은 교실이 더 많은 추억을, 기억을 함께 나누는 친구를 남겨주는 것은 아닐 것이다. 분교 급 초등학교를 6년 동안 한 반으로 다녔 지만 우리에게 기억을 함께 나눌 친구들이 부족하진 않다.
 
“고래 고기는 안 먹어. 돼지고기보다 비싸다는 게 말이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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