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유경의 아시아 여행기 6-카슈미르-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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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경의 아시아 여행기 6-카슈미르-2
  • 이유경
  • 승인 2006.10.18 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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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경과 ‘사선’

▲ 인도령 카슈미르의 한 마을에서 국경수비대(BSF), 국민군(RR) 등이 ‘무장세력 소탕작전’을 마치고 철수하고 있다. 이 분쟁의 최대피해자인 민간인들은 ‘사선’을 넘어 아자드 카슈미르의 난민으로 정착해 왔다.
“학교 어디까지 나왔냐?”는 인도 이민성 직원의 마지막 질문을 뒤로 하고 그날의 일 번 타자로 국경을 넘었다.

들어선 파키스탄 영토에서는 붙들고 말 거는 직원도 없고 모든 도장도 빨랐다. 응시 당하는 게 여전히 괴롭지만 한편으론 익숙해진 내게 잘 정돈된 녹색 도시 이슬라마바드는 편안했다. “여자는 금보다 귀한 존재이기 때문에(무슬림 남성들은 여성을) 쳐다보아서도 안 된다” 이슬람 근본주의자 아시야의 말만 빌자면 이곳 무슬림들은 ‘진짜’가 분명했다.

파키스탄령 카슈미르 주도 무자파라바드로 오르던 날, 거리의 병사들이 질문을 해대면 뭐라고 대꾸할지 잔뜩 생각해 놓았건만 아무도 건드리지 않았고 사실 ‘유니폼’ 자체가 거의 없었다. (대신 사복이 깔렸다!)

인도령 카슈미르에서 파키스탄령 카슈미르에 이르기까지, ‘스리나가르-자무-델리-암리차르-바가-라호르-이슬라마바드-무자파라바드’ 내가 밟은 이 코스는 밤낮 이동만 해도 최소 일주일짜리다. 나와 달리 ‘사선을 넘어’ 쯤 되는 ‘영화’를 찍으며 넘어온 이들, 그들은 평균 4-5일이 걸렸단다. 통제선(LoC : Line of Control)을 넘어 온 이들의 얘기다.

대부분이 쿠파라, 바라물라 등 통제선과 가까운 지구(district)에서 넘어왔고 이건 반나절에서 하루 코스지만 낮에는 숲에서 숨어 지내다 밤에만 이동하느라 오랜 시간을 채웠다. 스리나가르에서 무자파라바드까지 110km. ‘평화버스’를 타면 네 다섯 시간이 족한 이 땅을 많은 이들이 이렇게 돌고 돌아 이동한다. ‘인도 보다 더 나쁠 순 없다’는 약한 기운에서부터 ‘해방구’라는 환상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생각을 품고 그들은 ‘일단’ 넘었다.

2002년 9월 14일 남편과 함께 통제선을 넘은 파타마(가명, 35)는 인도 군에 강간당하고 풀려난 열흘 후 바로 넘어버렸다. 통제선에서 불과 4km밖에 떨어지지 않은 쿠파라 지구 카르나 마을출신인 그녀는 남편이 끌려간 그날 오후 아타리(Attari) 소령에 의해 군부대로 끌려가 군 캠프에서 경찰서로 다시 군 캠프로 15일 동안 감금되어 있었다.

경찰은 먹거리를 주었지만, 군은 아무것도 주지 않았고 대신 구타와 강간으로 한 인간을 말살시켰다. 남편과 여섯 아이 그리고 그녀의 몫까지 월 8천 루피를 받아 살아가는 파타마는 그 악몽의 공간을 벗어난 것만으로도 ‘그럭저럭’ 살만하다며 쓴 웃음을 지었다.

지뢰밭인 통제선 구역을 지나다 기어이 지뢰를 만나 한쪽 다리를 잃은 압둘 아지즈(Abdul Aziz, 37)는 92년 고향 쿠파라를 떠났다. 그날 새벽 4시, 인도 방향 통제선 2km 지점에서 지뢰가 터져 다리가 잘렸다. 그러나 인도 군이 달려올 까 약 9시간을 앞 만보고 ‘달렸다’. 동행자 4명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산송장이 되었을 거라는 아지즈는 “의식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했고 잃지 않았다”며 당시 고통의 정도를 ‘잔인하게’ 묻는 내게 담담하게 말한다.

석 달간 무자파라바드에서 무료 치료를 받은 후 난민촌에 정착해 살고 있다. 목숨을 걸었고, 다리를 잃었지만, 아지즈는 이곳에서 아내와 네 자녀를 얻었다. 지금은 구멍가게도 운영하고 있다. 그는 ‘인도로부터의 독립이 우선’이라고 주장한다. 인도 혹은 파키스탄 편입 두 가지 선택만 주어진다면 ‘무슬림으로서’ 파키스탄에 조인하고 싶단다.

이렇게 사선을 넘어온 통제선 난민들은 아자드 카슈미르 영토에 최소한 3만 명 이상으로 추정된다 (89년에서 91년 사이 넘어온 난민만 공식통계 29,932명이다) 이들이 통제선을 넘자마자 처음 만나는 건 파키스탄 군의 ‘웰컴!’. 일정한 절차를 거쳐 난민캠프로 보내진 이들은 정부로부터 매월 일인당 1000루피(한화 약 16000원)의 보조금을 받는다. (300루피에서 최근 오른 액수다)

자녀가 많은 이들은 그 수만큼 천 루피씩 더 받는다. “난 비록 독립을 원하지만 파키스탄이 주는 그 천 루피가 눈물 나게 고맙다”는 리아캇 알리(Liaquat Ali, 35)의 말은 두 나라를 경험한 이들의 정서 한 켠이다.

인도군의 폭력에 대비되는 파키스탄의 ‘초기 환대’가 이들을 ‘사로잡았음’은 부인키 어렵다. 그러나 파키스탄이 이 난민 물결을 정치적으로 이용해 왔다.

바그(Bagh)지구 주민 굴람(가명, 35)은 91년 9월 통제선을 넘어온 일용직 노동자다. 그는 ISI 코틀리(Kotli) 사무실로부터 “함께 일하자”는 제안을 받아왔고 “나중에”라고 조건을 붙이며 피해왔다. 가족들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지라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지난 달 10일 오전 10시, ISI 직원이자 은퇴군인 사카왓 샤(Sakhawat Shah) 등 3명이 급기야 집으로 찾아 들어 굴람을 캇커르(Katker)타운 사무실 눌 소령에게 데리고 갔다. “당신 우리 손아귀에서 못 벗어나. 우린 권력이고, 말 안 들으면 ‘인도 스파이’로 찍어 종신형에 쳐 넣겠다”고 눌 소령은 협박했다.

그로부터 14일까지 독방에 갇혀 있던 굴람은 28일 다시 오겠다는 종이에 사인 한 후 풀려났다. 28일 오전 다시 눌 소령을 찾아갔고 독방에서 하루 감금된 다음 날 29일 오전, 그를 태운 차는 어딘가로 이동했다. 오후 3시경 바그(Bagh) 중심가에서 교통체증에 걸린 틈을 타 그는 극적으로 도망쳤다. 그리고 계속 도망 중이다. 스파이 제안에서 살해협박으로 이어지는 굴람의 사례는 드물지 않은 한 유형이다.

카슈미르. 점령세력의 힘을 빌어 또 다른 점령세력을 대항해 벌여온 카슈미르 투쟁이 언젠가 터질지 모를 지뢰노선을 밟아왔다면 너무 가혹한 판단일까. 도망자 굴람처럼, 그들은 지금 또 다른 ‘사선’을 두리번거리고 있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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