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붕어다, 메뚜기 잡어" 천방지축 그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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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붕어다, 메뚜기 잡어" 천방지축 그 시절
  • 박상기 작가
  • 승인 2006.10.17 15:0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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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살던 고향은-2] 전북 군산시 옥구

▲ 옥구군 대야(大野)면은 '큰 들판'이다. 만경강을 끼고 도는 대부분의 마을은 사방을 둘러보아도 논뿐이고 아득히 지평선이 가물거리는 곳이다. 전북 군산=정광민 프리랜서 사진작가

'큰 들판'서 뛰놀던 어린 시절 그리워

내가 다닌 초등학교는 일본인 농장 건물이었다. 광복 직후 일본인들이 허겁지겁 쫓겨가자 농장의 사무실과 창고 등이 초등교육시설로 바뀌었다. 쌀창고는 교실이 되었고, 쌀가마니를 야적하던 마당은 운동장으로 쓰였다. 일본인 농장주가 살던 집은 교장과 교감의 사택으로 바뀌었으며, 농장 사무실은 교무실이 됐다.

학교 한 켠에는 교도소처럼 높은 망루 하나가 솟아 있고, 그 망루 꼭대기에 고성능 사이렌이 설치되어 있었다. 농장 관리인이 망루에 올라가 너른 논에서 일하는 소작인들을 감시했으며, 사이렌을 울려 작업시간과 휴식시간을 알렸다고 한다. 철모르는 우리들은 이 망루에 올라가 탁 트인 평야를 내려다보는 걸 재미있어 했을 뿐이었다. 그 평야는 우리들의 부모들이 일본인의 감시를 받으며 팥죽땀을 흘리면서 모를 내고 김을 매던 논이었다.

일본인 농장의 규모는 무척 컸다. 농장이 가진 논은 100만평이 보통이고 1000만평이 넘는 곳도 있었다. 현재 군산시 개정동에 있던 구마모토 농장이 대표적인 기업형 농장이다. 이곳은 회계업무를 보는 경리부, 농사지도를 담당하는 사업부, 소작인의 무료진료를 담당하는 진료부로 나뉘어 넓은 농토를 관리했는데, 전담 관리직원이 49명이나 되었다.

▲ 옥구는 한반도를 호랑이 형상으로 표현한다면 호랑이의 기름진 뱃살에 해당하는 곳이다. 고개숙인 벼의 모습에 배가 부르다. 전북 군산=정광민 프리랜서 사진작가
일본인 농장들이 하는 일은 호남의 쌀을 수탈하여 일본 본토로 보내는 것이었다. 그들은 군산항으로 가는 넓은 신작로를 내놓았고, 개펄을 막아 만든 너른 농지를 바둑판처럼 구획 정리하고 수로를 확장했다. 그야말로 최고의 수리안전답을 만들었다. 질 좋은 쌀을 한 톨이라도 더 생산해 일본으로 가는 배에 싣는 것이 그들의 식민지 농업정책이었기 때문이다. 그러한 식량수탈 과정은 이곳 출신의 소설가 채만식의 대표작 <탁류>에 잘 그려져 있다. 전국에서 가장 일본인들의 농토점유율이 높았고 대규모 일본인 농장이 가장 많았던 곳이 이 지방이었다.

호남쌀 수탈하던 일본인 대 농장주

일제가 패망해 하루 아침에 아까운 옥토를 고스란히 빼앗기고 떠나야 했던 일본인 농장주들은 “반드시 돌아와 되찾겠다”고 이를 사려 물었다. 현재 발산초등학교 자리에 있던 시마다니 농장의 농장주는 농토에 미련을 버리지 못해 한국인으로 귀화를 시도할 정도였다. 그러나 그 역시 농민들의 저항에 부딪혀 가방 두 개만 들고 쫓겨가고 말았다.

지금은 군산시에 통합되어 이름이 사라졌지만, 내 고향 옥구군은 쌀농사를 빼면 별로 내세울 것이 없는 고장이다. 한반도를 호랑이 형상으로 표현한다면, 옥구는 호랑이의 기름진 뱃살에 해당하는 곳이다.

▲ 왕조시대에는 전라도, 충청도의 세곡선이 강을 따라 서해로 나왔다. 내륙에서 세금으로 거둔 쌀을 가득 실은 세곡선이 한양으로 오르는 출발점이 군산이었다. 전북 군산=정광민 프리랜서 사진작가
위로는 금강으로 충남 서천군과 경계하고 아래로는 만경강을 사이에 두고 김제군과 나뉜다. 두 강과 서해로 둘러쌓인 옥구 땅은 예로부터 수운이 발달하였고 곡식과 수산물이 풍부했다. 너른 퇴적평야는 쌀농사를 짓기에 적합했으며, 금강과 만경강을 거슬러 내륙 깊숙한 곳까지 배가 드나들었다.

내가 자란 옥구군 대야면(大野面)은 이름 그대로 ‘큰 들판’이다. 만경강 바로 북쪽에 있는 우리 마을은 사방을 둘러보아도 논뿐이고 아득히 지평선이 가물거리는 곳이다. 어릴 때 나는 산골에서 자라는 아이들이 무척 부러웠다. 산에 올라가 알밤도 줍고 계곡에서 가재도 잡는다는데, 우리 마을 근처에는 산은커녕 조그만 구릉조차 없었다. 오로지 논과 개천, 강줄기가 있을 뿐이다.

▲ 논 속으로 비치는 우렁들의 모습이 정겨워 보인다. 전북 군산=정광민 프리랜서 사진작가
자연히 강에서 목욕하기, 물고기 잡기, 논에서 우렁캐기, 메뚜기잡기 등이 어린 우리들의 놀이였다. 그때는 왜 그렇게 개천과 강에 민물고기들이 많았는지 모른다. 개천에서는 신기하게도 참게 , 붕어, 메기, 뱀장어가 잘 잡혔다. 내게는 어린 날 천렵의 추억이 가장 강렬하다.

강과 개천에도 그렇지만 옥구의 바닷가에도 해산물이 넉넉했다. 썰물이면 너른 개펄이 드러났으며, 바닷가의 작은 포구마을에는 조개껍질 무덤이 산처럼 높았다. 개펄에는 조개가 많이 살았다. 해변에서 먼 바다에는 신시도, 선유도, 무녀도, 장좌도 등 작은 섬들이 아름다운 풍광을 자랑하며 고군산열도를 이루고 있다. 십리 길이의 해수욕장 모래로 유명한 선유도의 명사십리, 바다를 붉게 물들이는 낙조의 장관, 귀양온 선비가 울었다는 망주폭포 등 볼거리가 많다.

바다와 맞닿은 강에서의 소중한 추억들

옥구지방은 금강과 만경강의 수운을 이용하여 물산의 교류를 활발히 할 수 있어 장삿속으로도 유리했다. 예를 들면, 서해의 소금, 생선이 금강을 따라 강경포구까지 들어갔고 내륙 산간지방의 피륙과 과일이 배에 실려 바다로 나왔다. 만경강도 마찬가지였다. 전북의 깊숙한 내륙의 토산물들이 배에 실려왔다. 왕조시대에는 전라도, 충청도의 세곡선이 강을 따라 서해로 나왔다. 내륙에서 세금으로 거둔 쌀을 가득 실은 세곡선이 한양으로 오르는 출발점이 군산이었다.

▲ 전북의 깊숙한 내륙의 토산물들을 배에 실어 나르던 만경강. 망둥어 낚시가 한창이다. 전북 군산=정광민 프리랜서 사진작가
만경강과 금강 유역이 한반도에서 가장 쌀이 많이 나는 곳이다 보니, 이 쌀을 노리는 왜구들이 자주 출몰했다. 고려말 최무선이 직접 제조한 화약과 화기로 500여척에 달하는 왜구의 대선단을 침몰시킨 진포해전이 바로 금강하구에서 벌어졌다. 왜구는 단순한 도적떼가 아니었다. 2만명이 넘는 대규모 침략군이었다.

왜구들은 큰 밧줄로 배들을 서로 연결하여 묶어놓고 군사를 나누어 이를 지키게 한 다음에 대부대를 상륙시켜 각 고을을 돌며 무자비한 약탈을 감행했다. 이들은 세곡창을 털고 농가를 급습해 쌀을 약탈했다. 빼앗은 쌀을 급히 배로 실어 나르느라 서둘다보니 길에 흘렸는데 그 두께가 한 자가 넘었다고 전해온다.

최무선의 화기 공격으로 왜구의 선단은 모두 불에 타 사라졌다. 배를 잃어 퇴로를 차단당한 왜구들은 내륙 깊숙이 달아나면서 닥치는 대로 잔악한 살상행위를 벌였다. 이들은 충청도의 옥천, 영동, 금산을 휩쓸고 경상도로 빠져 상주, 경산, 함양에 이르렀다. 전라도 남원, 운봉에도 나타났다. 왜구떼는 충청, 전라, 경상 3도를 혼란에 빠뜨리며 고려의 국운을 시들게 했다. 이 왜구를 섬멸한 장수가 이성계였고, 그는 왜구 토벌전투를 통해 신흥군부의 실력자로 급부상했다.

▲ 만경강변의 갈대들이 "어서오라" 손짓하는 듯 하다. 전북 군산=정광민 프리랜서 사진작가
쌀은 이곳의 생활이고 목숨줄이었다. 모든 경제활동이 쌀을 매개로 이뤄졌고 논을 얼마 가지고 있느냐가 부의 척도였다. 삼시 세끼를 배곯지 않고 먹는 것, 그것도 흰쌀밥을 먹는 것이 백성의 소원이자 태평성대의 꿈이었다. 천년전에도 그랬고 몇 십년 전만해도 그랬다. 국가적으로 쌀이 남아돌아 재고미가 쌓이고 게다가 값싼 수입쌀마저 밀려와 우리의 쌀농사가 위기를 맞은 지금으로서는 실감이 나지 않을 뿐이다. 이제 와서는 쌀이 천대받고 젊은 농사꾼은 장가 들기도 힘든다. 고향마을에 가봐야 노인들만 수두룩하고 젊은이들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다. 달라져도 많이 달라졌다. 

아름답던 옛 고향의 모습 사라질까 두려워

▲ 박상기(소설가)
그 뿐만이 아니다. 내 고향 땅에는 천지개벽의 변화가 다가오고 있다. 군산~옥구군만이 아니라 김제군, 부안군까지 통털어 지도가 달라져버린다. 만경강과 동진강 앞바다를 막은 새만금방조제 때문이다. 세계 최장인 33km 방조제는 이미 물막이 공사가 끝났다. 환경단체와 시민들이 치열한 저항을 벌였지만 이제는 되돌릴 수 없는 단계에 진입했다. 망망바다에 일개 군의 면적에 해당하는 새 땅덩이가 솟게 된다.

새만금이 어떤 바람을 몰고올지 모른다. 내가 숨쉬고 느끼며 자란 고향은 사라지고 전혀 낯선 땅에 낯선 삶이 전개될 것 같다. 십년후쯤 찾아가면 고향의 냄새, 고향의 흔적을 찾을 수 있을까. 고향은 흐린 기억속에만 남아 있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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