쌀보따리, 반찬통 건네주시던 ‘어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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쌀보따리, 반찬통 건네주시던 ‘어무이’
  • 윤경덕 시인
  • 승인 2006.10.02 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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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살던 고향은]- 1. 전남 화순군

▲ 동복천 상류인 창랑천에 약 7km에 걸쳐 발달한 크고 작은 절벽의 경관을 자랑하는 적벽. 적벽은 예로부터 화순의 상징처럼 여겨져 왔다. 사진=화순군청
내 고향은 삼년 전에 살해 당했다! 아니 그때부터 새로 부활하고 있었다. 선친은 황토빛 투박한 전라도 땅에서 검은 보석을 캐내시다 삼년 전, 눈발 날리던 이른 봄날에 고향을 버리셨다. 그때는 어머님이 돌아가신 지 10년째 되던 해였다. 내가 고향을 떠난지 23년 되던 해이기도 했다. 나는 고향 선산에 선친을 안장한 뒤 내 고향의 일부가 사라져 가는 것을 지켜 보았고 새로운 고향이 내게 다가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내 고향는 전남 화순 능주(綾州)다. 서울에서 능주까지는 천리 길이다. 내 고향으로 가는 길은 29번 국도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 광주에서 이 길을 따라 가다보면 너릿재가 먼저 다가온다. 고향을 찾을 때마다 나는 이 고개를 지나갔다. 그럴 때마다 무심결에 산허리를 더듬는 버릇이 나에게 남아있다. 너릿재의 산허리를 타고 기세등등하게 버티고 서있는 포플러나무들이 숲속에서 점점이 보인다.

마치 수술을 한 흉터처럼 푸른 숲속에 어렴풋이 길이 보인다. 이 길은 너릿재에 터널이 뚫리기 전까지 산을 에돌아가는 신작로였다. 흙먼지 잔뜩 내뿜으며 온갖 힘을 다 쏟아내며 버스가 달릴 때에는 승객들도 벌벌 떨고 가야만 했던 길이었다. 나는 바로 그 길을 따라 맨 처음 도시라는 곳에 갈 수 있었다.

아주 좁고 느리고 털털 거리던 신작로는 옛추억 속에 동화처럼 내 마음 속에만 남아있고 지금은 잘 닦인 4차선의 포장도로에 거창하게 산을 관통한 터널 두 개 덕분에 순식간에 지나치는 무미건조한 고갯길이 되어버렸다.

화순을 지난 길은 더욱 거침 없이 화통하게 뚫려 고향집으로 달려간다. 메타세쿼어 가로수들이 길 양 옆에서 영접을 하고 있던 옛길은 손님을 잃은 식당처럼 썰렁하기만 하다. 고향 마을로 접어들어가는 도로를 지나간다. 작은 다리라고 불렀던 곳에 눈길이 다시 한 번 머문다.

내가 이곳에서 차를 타고 고향을 떠났고, 고향으로 가는 버스에서 내려서 고향 마을로 걸어갔던 곳이다. 이곳까지 어머님은 항상 나를 마중을 나오시고, 배웅을 하였던 곳이다. 이곳은 저 편 읍내에서 내가 타고 갈 버스가 다가오는 것을 바라보곤 하시던 어머니께서 머리에 이고 있던 쌀 보따리나 반찬통을 내게 넘겨주시곤 하였던 곳이다.

어머님은 선친과 나하고 사이가 좋지 않았던 시절에는 그 중간에서 꼭 타일러 주시고 아낌없는 격려의 말을 하여주시곤 하였던 곳이기 하다. 그때는 한 시간에 한 대 정도 다니던 시절이었지만 그 기다리는 시간은 짧기만 하였다.

고향집으로 들어선다. 고향집 본채는 초가삼간에 울타리 담이 있었다. 그런 집은 70년대 새마을운동을 거치면서 스래트 지붕으로 바뀌고 주변의 울타리는 시멘트 블럭으로 바뀌었다. 그 뒤 시멘트 블록 담에는 세월을 이기지 못하고 마른 이끼와 구멍이 커다랗게 뚫렸다. 집 옆에 항상 우러러 보아야 했던 감나무는 옆집을 넘나들던 가지들을 뚝뚝 잘라진 채 자신의 임무는 다 마쳤다는 듯 볼품없는 뼛대만 남아 하릴없는 사람처럼 서있었다.

주인이 떠난 집은 쉽게 거미줄 쳐지고 허물어져가고 있었다. 황토빛 마당에 들어서면서 ‘엄니, 어무니!’ 부르면 금방이라도 방문이 열릴 듯한데 깊은 고독에 빠진 적막 만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항상 어머니 품속 같은 고향집이 애처로운 모습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는 현장에 내가 서게 될 줄은 미쳐 예견할 수 없었던 현실이었다.

강바람이 산넘어 집으로 밀고 들어올 때 대나무 숲이 그걸 막아 주었다. 때론 서늘하기도 하고 때론 포근하게 들리는 댓잎 나부끼는 소리는 일년 내내 고향집을 떠나지 않았다. 나의 초등학교 시절은 겨울방학이 되면서 난 할아버지와 친구가 되게 만들었다. 다섯 마지기 남짓 되는 대밭 주위에 울타리를 새로 설치하는데 겨울방학의 절반 이상은 소비해야만 했었다.

한 겨울 눈이 많이 내리는 날이면 대밭은 굵은 왕대 터지는 소리로 밤잠을 제대로 잘 수가 없었다. 그것도 밤이 새기도 전 이른 새벽부터 할아버지 등살에 삿갓모자을 뒤집어쓰고 눈을 잔득이고 있는 대나무를 흔들어야했던 것은 추억은 덤이었다. 이 대나무들은 할아버지의 유일한 소득원이었기에 나는 임금 없는 노동을 제공하였던 것이다.

할아버지가 산에서 땔감을 할 때에도 호출 대상은 나였다. 지게를 메고 작대기를 짚고 산중에서 나무 짐을 지고 마당에 내려 놓아야만 해방되고 하였다. 그래도 주막집에 늘 계시던 할아버지 눈에 손자가 눈에 띄면 꼭 과자나 사탕은 아낌없이 사주시곤 하였다.

상 산 넘어 불어오던 강바람이 어느 때부턴가 멈추고 말았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던 해에 대나무는 제 주인을 알아보는 듯 평생에 한 번 핀다는 꽃을 피웠다. 그 이후 대나무는 플라스틱에 밀려 볼품 없는 상품이 될 시절이었다. 아버님은 할아버님이 돌아가신 지 몇 년을 참지 못하시고 대나무 밭을 갈아 엎고 말았다. 대나무 밭은 붉은 황토를 드러낸 채 얼마쯤은 고추밭으로 바뀌었고, 복숭아 나무도 몇 그루 들어섰다. 고향집은 몇 번을 뒤척이다가 세월 따라 노쇠 현상을 보이고 있었다. 대들보는 기울고 지붕은 비가 새기 시작 하였다.

아버님은 대대적인 보수공사를 하자고 권유를 하여도 이곳에 얼마나 살겠느냐고 급한 불만 끄고 살고 계셨다. 그 시절도 잠시 고향집을 혼자 지키시던 아버님은 외로움을 이겨내지 못하시고 영원히 고향 땅이 되고 말았다.

오백년 전에 내 고향 능주에 유배 당한 뒤 사사 당했던 정암 조광조 선생은 그 심정을 능성적중시(綾城謫中詩) 이렇게 읊었다.

“누가 활 맞은 새와 같다고 가련히 여기는가 (誰憐身似傷弓鳥)
내 마음은 말 잃은 마부 같다고 쓴웃음짓네.” (自笑心同失馬翁)

정말 누가 활 맞은 새와 같을 것이며 말 잃는 마부 같은 것인가. 내 고향은 누구에게는 유배의 땅이지만 나에게 유배를 당하게 한 땅이다. 얼마쯤은 활 맞은 새처럼, 얼마쯤은 말 잃은 마부처럼 이 세상에 유배 당한 채 고향을 떠났던 것이다.

부모님은 어쩌면 나의 고향이었다. 그 고향이 내게서 멀어져만 가고 있다. 부모님이 없는 고향은 벌써 볼품없는 대상물이 되었다.

내게 있어 고향은 능주라는 지명이 아닌 듯하다. 선친의 고향은 조상과 고향집과 함께 어울리는 고향이었다면 나는 부모님과 함께한 시절을 떠올리고 있었다. 능주라는 형상물을 나는 고향이라는 실체로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나는 새로운 고향을 만들고 있었고, 또 누구의 고향이 되고 있다는 것을 요즘은 알았다. 나도 이제는 많이 철이 들고 있나 보다.

윤경덕 (시인·국민은행 여신관리센터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