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앞에서 수갑차던 기억 생생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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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앞에서 수갑차던 기억 생생해요"
  • 시민의신문=조은성 기자
  • 승인 2006.09.25 1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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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9] 김이경 겨레하나 사무총장

신념보다 양심으로 시작한 운동 27년

3년도 안돼 거인이 된 겨레하나. 사단법인 우리겨레하나되기운동본부(겨레하나)의 탄생과 성장에는 김이경 사무총장이 있었다.

통일연대 사무처장에서 대중적 통일운동을 위해 겨레하나로 자리를 옮긴 김 총장은 사실 본디 ‘출신’이 통일운동은 아니었다. 노동운동에 발을 담아 온 김 총장이 통일운동에 뛰어들게 된 계기는 무엇일까.

▲ 김이경 겨레하나 사무총장. 사진=시민의신문 양계탁 기자

기자가 김 총장을 처음 본 것은 대학 때 본 ‘동창회’라는 비디오에서였다. 일명 ‘동창회’ 사건으로 불리는 ‘영남위원회’ 사건은 김대중정부 때 일어난 최대의 공안사건이다. 현직 구청장이 구속되면서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이른바 ‘영남위원회’ 사건은 당시 서른여덟이던 김 총장의 삶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았다. 그리고 이후 통일운동의 길을 걸어가게 하는 전환적 계기가 된다.

영남위원회 사건이란?

1998년 7월, 울산과 부산의 운동가 15명이 국가보안법 제3조 ‘반국가단체’의 구성원이라는 이유로 긴급 체포된 사건이다. 검경은 이들이 ‘반제청년동맹 영남위원회’의 일원이며 위장명칭으로 ‘동창회’를 사용했다고 밝혔다.

경찰은 당시 영남위원회가 북의 대남혁명전위기구인 한민전(한국민족민주전선)의 지도를 받는 조직으로서 부산·울산의 노동운동에 침투해 이후 이 지역을 장악할 계획을 세워왔다고 주장했다. 경찰은 특히 이들이 벌인 북한동포돕기 모금운동을 ‘김정일 보위투쟁’이라고 규정했다.

그러나 이들은 항소심에서 ‘반국가단체’ 구성원, 즉 간첩이 아니라 국가보안법 제7조에 따른 ‘이적행위’ 혐의로 유죄판결을 받았다. 15명 중 12명은 석방됐고 총책으로 지목된 박경순씨 외 2명은 실형을 선고받았다. 박씨를 제외한 두 명은 만기 출소했고 박씨는 최종 선고받은 7년 중 5년 개월을 복역한 뒤 2003년 4월 참여정부의 특별사면조치로 석방됐다.

서울이 고향인 김 총장이 울산에 터를 잡게 된 것은 1987년에서 88년경. 노동운동을 하다 수배가 된 김 총장은 역시 수배가 된 남편 박경순씨와 함께 울산으로 내려갔다.

“서울은 너무 무섭더라고요. 멀리 가면 나을 듯 해 울산으로 가게 된 거죠.”

‘결혼은 언제 한 거냐’는 질문에 김 총장은 “85년 아니면 86년, 또는 87년일 것”이라는 알쏭달쏭한 대답을 내놨다. 정확히 언제 결혼했는지 기억을 못한단다. 김 총장은 “초로기치매인지 기억이 잘 안 난다”며 웃어보였다. 그만큼 바쁘게, 열심히 살았다는 반증이 아닐까. 결혼년도를 기억하지 못한다는 김 총장의 말이 한순간 엄숙하게 느껴졌다.

분위기를 바꿔서 이번에는 남편과 어떻게 만나 연애하게 됐는지를 물었다. 김 총장은 박경순 전국연합 교육위원장과 대학을 다닐 때부터 사귀었다고 한다. 숙명여대 중문과 79학번인 김 총장은 남편에 대해 “비인간적이라고 생각되던 운동권 속에서 그나마 인간적인 사람이었다”고 밝혔다.

“내가 운동권에 있으면서도 전 운동권에 대한 두려움이 늘 마음속에 있었어요. 인간적이지 않다는 생각도 있었고요. 제가 학교 때 운동을 한 것은 최소한의 양심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에요. 그때는 어느 정도 운동을 해서 빚은 갚아야 한다는 생각이었죠.”

▲ 사진=시민의신문 양계탁 기자
당시는 5분만 데모를 해도 잡혀가는 엄혹한 때였다. 김 총장은 학내에서 일본의 교과서왜곡을 규탄하는 시위를 하다 처음으로 구속됐다. 학내시위였지만 집시법 위반으로 1년 6개월의 형을 받았고 1년 3개월을 복역한 뒤에야 김 총장은 특사로 나올 수 있었다.

“교도소에 있었던 때를 생각하면 국가보안법으로 들어온 양심수를 무서워했던 기억이 나요. 국가보안법으로 들어오면 옷에 딱지가 있는데 그때는 그 딱지를 단 사람들은 우리랑 다른 사람인 것 같더라고요. 내 스스로 거리감을 갖고 대했던 기억이 납니다.”

김 총장은 자신이 정한 최소한의 양심에 따라 그 마지막 절차로 노동야학을 택했다. 야학에서 활동하던 중 김 총장은 ‘광주사태’ 비디오를 보게 되는데, 이것이 이후 김 총장의 생각에 큰 변화를 가져오게 된다.

“야학에서 선배들과 함께 광주 관련 비디오를 보게 됐어요. 젖가슴이 잘려나가는 도륙의 장면들을 보면서도 전 운동권은 늘 이런 걸 본다고 생각했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피도 눈물도 없이’ 단단해 보였던 선배들이 펑펑 우는 거예요. 그걸 보면서 오히려 내가 반인간적이지 않나 돌아보게 됐어요. 그동안 내가 잘못 살아온 것 같다는 참회랄까 그런 기분도 들었어요. 그리고 처음으로 운동을 내 문제화하기 시작했죠. 적절하게 운동하고 졸업하려던 생각을 그때 접었어요.”

하지만 김 총장은 이때도 “이념과 신념보다는 양심에서” 운동을 해야겠다는 생각이었다고 한다. 그렇게 시작된 운동의 길은 마흔여섯이 된 지금까지 쭉 이어지고 있다.

김 총장은 울산에 내려가 민중의당 노선을 지지하며 노동운동을 계속했다. 그런데 민중의당이 생각보다 너무 적게 표를 얻었고, 김 총장은 정세를 조급하게 판단했다는 평가를 하게 된다. 김 총장은 그때 ‘우리 사회에 대한 공부를 다시 해야겠다’는 마음을 먹게 됐다고 한다. 분단에 대한 고민은 그렇게 시작됐다. 김 총장은 그전까지만 해도 통일문제에 대해 깊이 고민해보지 않은 터였다. 분단을 생각하게 되자 고민은 자연히 민족과 통일문제로 확장됐다. 울산에서 서점을 경영하게 된 것도 ‘공부’라는 이유가 한몫을 했다.

“울산에 와서 아이를 낳았어요. 그래서 생계수단이 필요하기도 했고 다시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에 서점을 하게 됐죠.”

김 총장이 남편 박경순 위원장과 함께 운영했던 서점은 이른바 ‘영남위원회’의 회합장소로 지목되는 곳이다.

“서점을 하면 완전히 그에 들러붙어야 운영이 가능해요. 손이 많이 가거든요. 그래서 활동가들이 우리 집으로 자주 왔어요. 우리 부부가 운동을 하다가 내려온 사람들이라서 재야운동가들과 알고 지낸 것은 당연한 일이지요. 게다가 서점 위층은 울산에서 열심히 활동하던 여성회 사무실이었어요. 활동가들끼리 모여서 이런 저런 얘기도 하고 그랬죠. 하지만 이게 무슨 조직 이렇게 ‘외화’되는 것엔 동의할 수 없어요.”

김 총장은 검경이 만들어낸 ‘영남위원회’ 사건에 의해 ‘부부간첩단’으로 구속이 됐다. 총을 든 군인이 김 총장의 집을 포위한 가운데 갑자기 들이닥친 경찰은 초등학교 2학년이던 아이가 보는 눈앞에서 김 총장 부부의 손목에 수갑을 채웠다. 아직도 그 광경이 “생생하다”는 김 총장은 어렵게 그날의 일을 털어놨다.

“아이 앞에서 수갑을 채우던 게 아직도 생생해요. 애가 얼마나 놀랐겠어요. 난 먼저 끌려나왔고 애 아버지가 아이에게 학교를 가서 공부하라고 했대요. 그 상황에서…. 그래서 애가 학교를 갔다고 하더군요. 조사를 받으러 가서 애를 어떻게 할 거냐고 울부짖고 싸웠어요. 애가 학교를 갔다 왔을 땐 집에 아무도 없었죠. 옆집에 가있었다고 나중에 들었어요. 옆집사람들도 얼마나 놀랐겠어요? 자기 옆집에서 살던 사람이 간첩이었다는데. 아이도 부모가 경찰에 끌려가는 것을 보면서 ‘내 부모가 범죄자’라는 충격을 받았을 거예요.”

▲ 사진=시민의신문 양계탁 기자
김 총장은 아이 얘기를 하면서 잠시 감정이 복받치는 듯 목소리가 가느다랗게 떨렸다.

“친정어머니가 오셔서 아이를 데려갔는데 애가 엇나가게 됐다고 들었어요. 반항적이 되고 거칠어지고…. 그러다 울산에 있던 사람들이 애를 데리고 와서 석방투쟁에 데리고 다녔대요. 그러면서 애가 조금씩 괜찮아졌다더군요. 엄마아빠는 죄인이 아니다, 정당하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정신적으로 안정을 되찾은 듯해요.”

김 총장은 감옥에서 매일 아이에게 편지를 썼다고 한다. 그럼에도 나와서 보니 “애가 많이 황폐화돼있었다”고 김 총장은 말했다.

“학교도 잘 안가고 게임방에 빠져있었어요. 엄마아빠가 어디 갔다는 게 소문이 다서 친구들이 다 아는데 아이는 그에 대해 설명하지 못하고…. 그래서 서울로 올라왔어요. 아이가 전학한 뒤에는 친구들이 자기를 몰라보니까 잘 적응하고 지내게 됐어요. 하지만 그 일이 애한테 끼친 영향이나 충격을 무엇으로 보상하겠어요.”

김 총장은 “그래도 같이 감옥에 갔던 사람들이 아이를 투쟁의 현장에 데리고 다녔다는 게 고맙다”고 말했다. 김 총장은 1심에서 징역 8년, 자격정지 8년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검경의 무리한 ‘반국가단체’ 주장은 재판 과정에서 실체가 드러났다. 검사는 1심 때는 반국가단체라고 주장했지만 2심에서 증거조작이 드러나면서 이적단체로 공소변경을 요청했다. 공소장에서만 이들 조직의 이름이 3번이나 바뀌었다. 김 총장은 “사람들이 만난 것에 뭔가 딱지를 붙이고 조직사건으로 엮으려다 보니 그렇게 된 게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영남위원회 사건은 노동계, 여성회 등 울산에서 투쟁을 열심히 한다는 재야는 싹쓸이해 만들어진 조직사건이다. 특히 이들이 수해로 막심한 피해를 입은 북한동포돕기 모금운동을 열심히 전개한 것을 두고 ‘김정일 보위투쟁’이라며 무리하게 북과 엮어 넣었다. 김 총장은 대법원에 가서 결국 무죄를 받았다.

김 총장은 당시 검경이 조직사건을 터뜨린 이유에 대해 “민주노총 출신노동자들의 정치권진출에 위기의식을 느끼고 당시 고조되던 IMF정리해고반대투쟁을 가라앉히기 위해서”라고 답했다.

“울산에서는 현대자동차 노동자들의 정리해고반대투쟁 열기가 높았어요. 그때 우리는 선거구호로 IMF전면재협상과 정리해고반대를 들고 나왔는데 주민들이 지지했고 동구청장에 당선됐죠. 시장도 근소한 차이로 졌어요. 그 힘으로 이후 민주노동당도 건설될 수 있었다고 봐요. 이른바 영남위원회 사건으로 구속된 이들은 그런 일을 함께 창조하던 관계였죠.”

김 총장은 이에 위기의식을 느낀 이들이 무슨 위원회라고 활동가들을 엮어 빨갱이로 덧칠을 한 것이라고 말했다.

“보안수사대에서 조사를 받는데 동구 주민들이 가장 많이 생각났어요. 우리를 지지해준 주민들에게 우리가 ‘빨갱이’로 알려지는 것에 절망과 분노를 느꼈죠. 그때 용공조작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 알려주기 위해 더욱 의연히 싸워야겠다고 생각했어요.”

▲ 사진=시민의신문 양계탁 기자
경찰은 김 총장 집을 3년간 감시했다. 3년간이나 도청을 하고 사진을 찍으면서 부부간 대화까지 엿듣고 있었던 것이다. 김 총장은 “얼마나 충격적이냐”며 “결국 그들이 불법 도청한 것들은 모두 증거로 인정되지 않았다”고 밝혔다.

“용공조작은 정말 무서워요. 사건이 터지고 처음엔 사람들이 다 숨었어요. 어디까지 엮으려 들지 모르니까요. 하지만 아이들을 지키기 위해서 사람들이 뭉쳤고 울산 시내를 매일 유인물로 도배했어요. 상경투쟁도 해서 지하철에서 선전전을 하다 잡혀가기도 했고요. 그때도 모두 진술을 거부하고 저항하다 모두 풀려나왔어요.”

김 총장은 조직사건이 “역으로 사람들을 더 단결시켰다”고 평가했다. “동창회 비디오를 봐도 느껴지지만 구속된 이들과 가족과 대중의 일체감은 결국 국가보안법인데도 무죄를 얻어 나오게 한 돌파력이 아니었나 생각해요.”

김 총장은 10개월을 복역하고 나와 간경화환자인 남편을 비롯해 나머지 사람들을 석방시키기 위한 활동에 전념했다. 그때 처음으로 단체 활동이란 것을 시작한 김 총장은 석방운동 과정에서 전국연합 사람들을 알게 된다. 그들과 함께 일하며 김 총장은 서울로 올라와서 일했으면 좋겠다는 요청을 받는다. 김 총장은 그렇게 서울전국연합의 민권위원장 겸 통일연대 사무처장으로 서울에 올라왔다.

“그런데 나는 전선단체가 사회단체와 뭐가 다른지도 모르는 상태였거든요. 범민족대회에는 가본적도 없고 통선대는 본적이 없는, 말하자면 통일운동의 초보였어요. 통일운동이 뭔지도 모르는 사람이 앉아있으니 얼마나 웃겨요.”

상근자도 아무도 없이 범민련 친구들에게 어깨너머로 사업을 배웠다는 김 총장은 그렇게 2년을 보낸 뒤 사무처장 겸 자주교류위원장으로 1년, 총 3년을 통일연대에서 활동했다. 당시 통일연대는 갓 만들어진 상태였다. 김 총장은 “그때는 희망이 참 많았다”면서 “열심히 한다고 했지만 경험부족으로 시행착오도 많이 겪었다”고 회고했다. 김 총장은 통일연대가 해야 할 역할이 지금도 막중하다고 밝혔다.

“민간통일운동은 6.15공동위를 중심으로 구심을 확고하게 세워내야 합니다. 6.15공동위는 정치적 역할도 수행해내야 해요. 통일연대가 그것을 견인해내기 위한 정치적 투쟁을 잘하는 것이 근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김 총장은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말을 이었다. 6.15공동선언이후 열린 합법적 공간에서 대중화된 통일운동을 개발해야 될 과제도 있다는 것이다. 김 총장은 그때 지원운동을 생각해냈다. 김 총장은 “역할이 다른 것”이라며 “제도적 측면을 활용하기 위해서는 사단법인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고 밝혔다. 그게 겨레하나다. 김 총장은 “돈을 내 참여할 수 있게 하는 지원운동은 자본주의적 방식에도 맞는 것이었다”고 부연했다.

“미선이 효순이 투쟁을 보면서 10만 명이 반미투쟁에는 모여지는데 통일운동에는 왜 그만한 사람을 모으기가 힘들까를 고민했죠. 결국 통일교육은 정치적 투쟁이 아니라 문화적 영역에서 접근해보는 게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김 총장은 겨레하나가 이렇게 짧은 시간 안에 급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그만큼 일반이 참여할 수 있는 통일사업에 목이 말랐던 게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겨레하나가 진보단체들이 표현할 수 있는 방식으로 남북을 잇는 창구역할을 하면서 급속도로 발전할 수 있었다는 얘기다.

▲ 사진=시민의신문 양계탁 기자
겨레하나는 진보단체들의 지원운동에 대한 일말의 거부감을 말끔히 씻어냈다. 옛날엔 지원운동이 ‘북이 못 산다’는데 초점을 맞추면서 진보단체들의 거부감을 유발하기도 했다. 겨레하나는 북을 존중하면서 남쪽의 입장도 조율해가며 공평하게 전달하는 중계적 역할을 맡았고, 이는 남에서도 북에서도 공감을 얻어 탄력을 받게 됐다.

현재 겨레하나는 6개 지역본부와 5개 사업본부로 조직이 팽창됐다. 김 총장은 “겨레하나는 채널을 독점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독자적으로 하고 싶어 하는 단체의 경우 가교 역할 또는 조정안을 만들어주는데 그쳐 더 신뢰하고 포괄할 수 있는 방식을 추구한다는 설명이다. 김 총장은 “지금으로선 지원운동이 남과 북이 만날 수 있는 좋은 ‘꺼리’이고 사람들의 적극성을 존중한 게 겨레하나의 성장비결”이라고 분석했다. 이어 “현재 겨레하나 회원이 1만7천 명 정도”라며 “이제 그물망이 조금씩 형성되고 있는 단계”라고 보았다.

김 총장은 지역본부의 창발적인 모범사례 자랑도 빼놓지 않았다. 겨레하나 부산본부는 ‘겨레사랑 우수리 나눔운동’을 진행하고 있다. 우수리란 물건 값을 제하고 거슬러 받는 잔돈을 말한다. 부산본부는 기업, 관공서 직원 등을 대상으로 급여에서 백 원 단위를 절사해 기금을 조성하고 있다. 기금의 일정액은 북녘동포를 위한 인도적 대북지원사업에 쓰인다. 예를 들면 기금의 절반은 남측의 소년소녀가장을 지원하는 데 쓰이고 절반은 북측의 평양항생제공장 원료보내기에 지원이 됨으로써 간접적으로 대북지원사업에도 동참할 수 있게 하는 방식이다.

김 총장에겐 언제가 될 진 모르지만 개인적으로 소박한 꿈이 하나 있다. 통일운동을 하면서 남과 북에서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책으로 내는 것이다. 어린시절 ‘문학소녀’였다는 김 총장은 현재 민주노동당 기관지 <진보정치>에 ‘평양사람들’이란 칼럼을 일주일에 한번씩 쓰고 있다. 김 총장은 “내가 아는 북과 남쪽사람들이 아는 북과 진짜 북이 모두 틀리다”며 “그래서 늘 고민하게 된다”고 밝혔다.

▲ 사진=시민의신문 양계탁 기자
“저는 아직도 북이 이해 안 되는 부분이 많아요. 이해하려고 노력하면 이해되지만 우리의 주체적 관점은 무엇일까 늘 고민하곤 해요. 서로 간의 합의지점을 찾아내는 것이 북에 갈 때마다 참 어려워요. 여전히 보안법이란 절대적 제약이 있는 속에서 북에 대해 표현하는 것이 얼마나 진실성을 가질지 모르겠어요. 또 내가 북을 왔다 갔다 하는 입장에서 북에 대해 안 좋은 얘기를 하기도 어렵고요. 아무래도 책은 구조적으로 자유로운 조건이 될 때 쓸 수 있을 듯해요.”

김 총장은 노동운동과 통일운동을 넘나들며 자신의 양심에 따라 사람들이 말하는 ‘운동’이란 길을 27년째 걷고 있다.

“어떻게 통일운동과 노동운동이 같이 가야 할 것인지는 잘 모르겠어요. NL-PD구분이 많이 없어지긴 했지만 아직은 대오 내에서 완전히 털어내진 못했죠. 보안법 때문에 전선운동을 편하게 얘기하진 못하지만 서로 간에 수평적으로 소통할 수 있는 구조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김 총장은 “지금은 너무 경직돼 있다”면서 “노동운동에선 특히 선거 때문에 더욱 첨예한 것 같다”고 덧붙였다. “더 많이 노력해서 이 관계를 회복하고 단결하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고 강조한 김 총장은 “6.15이후 큰 운동의 대세는 그렇게 정리돼 가고 있다”고 낙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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