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란 기억은 주소만 남아"
상태바
"아버지란 기억은 주소만 남아"
  • 오재범 기자
  • 승인 2006.09.25 15:4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인터뷰] 브라질 동포 고광순씨

▲ 고광순씨(왼쪽)와 그의 아내 곽영애씨(오른쪽).다정한 모습을 보여달라는 부탁에도 어려워하지 않고 아내의 어깨에 팔을 올려놓은 고광순씨. <사진=정재수기자>
높고 푸른 가을하늘 아래 잠실보조경기장에서 2006 한민족 생활체육대회가 열렸다. 참가한 500여명의 동포들이 4개 팀으로 나눠 게임을 진행하며 응원전을 펼치는 가운데 함께 박수치고 즐거워하던 브라질 동포 고광순씨(사진왼쪽, 87)와 아내 곽영애씨를 만났다.

독립운동가 고창희 선생의 장남으로 60년대 브라질로 이민해 브라질 한인역사의 산증인으로 불리는 그는 한인회에서 활동하면서 최근 불거진 한인회장 공석에도 회장으로 활동하면서 공석을 메우는 등 브라질한인사회에서 큰 어른으로 불려왔다.

아버지에 관한 기억을 묻자 그는 당시를 회고하며 “아버지는 독립활동을 하면서도 우리한테 그런 것을 세세히 이야기 하지 않았다”며“아버지가 10년간 서대문 형무소에 투옥한 이후에도 각종 독립운동 때문에 도피생활을 했었다”고 밝혔다.

독립운동가 고창희 선생은 1921년 임시정부를 위해 국내 모금활동과 친일파 처단을 실행하기 위해 모험청년단을 조직해 활동하다 체포돼 10년 동안 서대문형무로세 수감됐다 풀려났다.

그의 기억에 남은 아버지는 다름 아닌 편지였다. 어느날 <경상북도 봉화분 척곡리>에서 <전상일>이라는 이름으로 편지가 집으로 왔다. 그것이 바로 아버지에게 처음 받았던 편지였다. 어머니에게 편지를 읽어드리자 “편지를 봉투채 아궁이에 넣고 태워라 그리고 주소와 내용만 머리에 기억해라”라고 했던 게 기억에 남는다고.

그는 일본에서 유학한 뒤 원산에서 수산물 관련회사를 다녔고 1.4 후퇴 당시 남으로 건너와 제주도에서 수산물 관련 사업을 하다가 60년대 초반 브라질로 이민하여 브라질에서 정착했다.

그는 팔순이 넘은 나이에도 자동차운전을 직접하며 아들내외가 운영하는 식당에 필요한 재료를 사다준다며 이 나이에도 애들에게 폐는 안 끼치고 산다며 웃음을 지어보였다.

지난 2003년 유공자초청방문때 한국을 방문했던 그는 아버지를 찾아야 겠다는 생각에 독립기념관에서 자신을 안내하던 사람에게 부탁한 끝에 아버지가 95년도에 독립운동가로 추서된 사실을 처음 알았다고.

2년 뒤 그도 독립운동가 자손으로 인정을 받았지만 그 절차가 복잡해 애를 먹었다는 그는 “후손들에게 대우해줄려면 절차를 간소화시켜 자존심을 지켜주는 선에서 해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