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연변, 한민족의 ‘디아스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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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연변, 한민족의 ‘디아스포라’
  • 차한필
  • 승인 2006.03.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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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한필
한겨레기자 중국동포전문가
‘디아스포라’(Diaspora)는 ‘이산 유대인’ ‘이산의 땅’을 의미하는 말로 “팔레스타인 바깥지역에 살면서 유대적 규범과 관습을 유지하던 유대인 또는 그들의 거주지”를 가리킨다.

기원전 8세기 팔레스타인 북부를 차지하고 있던 이스라엘 왕국이 앗시리아와 바빌로니아의 잇단 침입으로 나라가 망하면서 수많은 유대인들이 이집트 등지로 흩어지게 되었다.

이후 상업과 교역의 발달로 유대인의 이산은 확대돼, 기원전 1세기 말엽에는 이집트와 시리아, 그리스, 메소포타미아, 이탈리아 등지로 흩어진 유대인의 공동체 즉 ‘디아스포라’가 나타나게 된다.

디아스포라의 중심지는 로마제국의 3대 도시인 로마, 안티오키아, 알렉산드리아였다. 알렉산드리아에만도 100만명 가량이나 된 것으로 추정된다. 디아스포라는 본토 팔레스타인의 유대인보다 그리스 문화에 훨씬 개방적이어서 그리스어를 상용하며 헬레니즘 문화권에서 주로 수공업과 무역에 종사해 본토 유대인보다 높은 수입을 올렸다.

알렉산드리아 같은 곳에서는 무역의 중요성 때문에 원주민보다 높은 지위를 얻을 수 있었고, 로마에서는 시민권을 얻은 사람도 많았다.

디아스포라는 그리스 문화에 둘러싸여 있었기 때문에 그리스 학문의 중심지였던 알렉산드리아가 자연히 ‘유대적 헬레니즘 학문’의 중심이 되었고, ‘필로’와 같은 학자와 저술가가 많이 나왔다.

이들은 그리스 문화에 물들었음에도 팔레스타인을 정신적 고향으로 생각해 예루살렘과 밀접한 연관을 가졌고, 그들 나름의 유대적 규범과 관습을 지켜왔다. 이들의 규범과 관습이 오히려 본토에 역수입될 정도였다.

한편, 디아스포라를 통해 반유대적 풍조가 처음으로 생겨나기도 했다. 유대인의 배타적 민족성, 경제적 번영, 특권 때문에 많은 도시에서 유대인에 대한 혐오가 퍼졌다.

알렉산드리아에서는 결국 칼리굴라의 박해로 이어졌으며, 이 박해는 칼리굴라의 암살로 끝이 난다. 이런 반유대인 감정은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히틀러의 유대인 학살로까지 이어진다.

중국에 살고 있는 동포와 그 거주지 역시 우리 민족의 ‘디아스포라’라고 할 수 있다.그 가운데 연변자치주는 마치 유대인 디아스포라의 중심지가 알렉산드리아였던 것처럼 중국 한겨레 사회의 정신적 고향 같은 곳이다.

그래서 동양 문화의 중심인 중국에 속한 연변은 ‘민족적 동양 문화’ 즉 ‘자신만의 민족 문화’를 꽃피워내야 한다. 그리고 한국이나 조선에까지 영향을 끼칠 수 있는 민족적 규범이나 관습을 유지 발전시켜야 한다.

상업과 무역에 능한 유대인 못지 않게 중국 연안과 대도시에 진출해 성공한 동포 기업가들이 많다.

중국인사회로부터 “조선족의 노신”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민족문학가 김학철 선생을 두고 있는 점도 특기할만 하다. 지난해 8월 김선생의 위업을 기리는 문학비가 중국 하북성에 세워지기도 했다. 김선생은 항일 전선의 최전방에서 싸웠으며 동시에 커다란 문학적 성과를 남겨 총과 펜을 함께 들었던 인물이다.

각종 언론매체도 활발하게 발행되고 있다. ‘흑룡강신문’ ‘길림신문’ ‘연변일보’ ‘조선문보’같은 민족언론과 ‘연변문학’ ‘장백산’ ‘도라지’같은 민족문학 잡지와 ‘연우포럼’ ‘연우미디어’ ‘모이자’ ‘연변영화동호회’같은 인터넷 매체가 그것이다.

‘민족의 디아스포라’인 연변은 더이상 한 나라의 변방이 아니라 이제는 민족의 중심이자 세계의 중심에 설 수 있다. 최근 한류 열풍이 몇몇 국가를 넘어 전세계에서 통용되는 것을 보면 더욱 그렇다. 다만 경계할 것은 부러움을 넘어 반감을 살 정도로 배타성을 띠어서는 안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