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혈 가수 한국 1세대 샌디 김씨 '검은 피부 벗기려 모래로 박박 밀어'
상태바
혼혈 가수 한국 1세대 샌디 김씨 '검은 피부 벗기려 모래로 박박 밀어'
  • 미주중앙일보
  • 승인 2006.02.12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1958년 겨울 강원도 양구. 살을 에는 매서운 날씨속에 10살 소년 복천은 집 근처 개울가에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국화빵 노점상을 마치고 집으로 오던 어머니 송씨는 아들의 뒷모습을 보고 다가갔다. 복천은 잔 자갈이 섞여있는 모래를 움켜쥐고 자신의 얼굴과 살갗을 문지르고 있었다. '깜둥이'라고 놀리는 소리가 듣기 싫어 피부를 벗겨내려 한 것이다. 어머니는 아들을 부여안고 엉엉 울었다. 칼바람이 검은 소년의 쓸린 살갗을 헤집었다. 붉은 핏물이 올라왔다. 하인스 워드가 수퍼보울 MVP를 거머쥐면서 영웅으로 떠올랐다. 한국민은 뒤늦게나마 혼혈에 대해 야멸찬 인종차별을 해왔던 역사를 반성하고 있다. 선택할 수 없었던 출생 그로인한 온 가족의 고통. 한국에 뿌리를 둔 혼혈 한국인은 비상구 없는 검은 밀실에서 신음했다. 한국이름 김복천(58) 예명 샌디 김으로 70년대 한국에서 혼혈 1세대 가수로 이름을 날렸다. 그의 삶을 통해 '모든 사람들의 피.땀.눈물은 같은 색'이라는 평범한 진리를 되새겨 본다. [특별 인터뷰-깊고 넓은 슬프고 착한 '샌디 눈빛'] '임마, 피 색깔은 똑같잖아''깜둥이' 소리싫어 싸움...우여곡절 끝네 연예인 '짧은 행복' ▲ 연예계 데뷔직후인 69년 한 신문에 실린 샌디 김의 모습
10살 때 살을 벗겨내기 위해 움켜쥔 모래를 기억해서인가. 복천의 이름은 샌디(sandy)다. 연예인이 되면서 예명으로 썼다. 나이 지긋한 한인들은 샌디 김(58)을 기억한다. 69년 TBC(동양방송) 9기 탤런트로 연예계에 발을 디뎠다. 중견배우 한진희씨가 동기다. 검은 미소.수사반장.추적.113수사본부 등 TV드라마와 영화에도 다수 출연했다. 또 히트곡 '잃어버린 고향'을 발표하며 가수로도 데뷔했다. 흑인혼혈 연예인중 최고참인 셈이다.

복천은 아버지를 모른다. 해방되고 2년뒤인 47년 어머니는 미군에 성폭행당했다.

"22살 어머니는 나를 임신하고 3번이나 자살을 시도했습니다. 하지만 대구 수성못에 몸을 던질 때 마다 사람들이 구했어요. 어머니는 그렇게 생명은 건졌지만 삶을 건진 건 아니었습니다. 그 당시 미혼모가 검은 아이를 낳고 살 수는 없었어요."

어머니는 보호막이 필요했다. 외진 산골에 사는 22살이나 나이많은 홀아비와 결혼했다. 그가 복천이 기억하고 사랑하는 아버지다.

아버지는 세상에 버려진 모자를 진심으로 아끼고 사랑했다. 또한 아버지 친척들도 모자를 완전한 가족으로 받아들였다. 복천 자신이 남들과 다르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 정도였다.

83년 초 그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미국에서 영주권 신청을 하고있던 복천은 한국에 갈 수 없었다.

"LA공항 뒤편 벌판에 친구랑 앉아 위스키를 들이부으며 하루종일 꺼억꺼억 울었어요. 그 아버지가 어떤 아버지입니까. 한국행 비행기가 뜰 때는 통곡했어요. 내가 타고가야 할 비행기인데…아버지!"

7살 복천은 대구의 집성촌 마을을 떠나 강원도 양구로 이사했다. 세상 밖으로 나온 순간이다. '잔인한 시절'이 시작됐다.

"학교에 들어갔더니 아이들이 '깜둥이'라고 놀렸어요. 동네 아줌마들은 원숭이 보듯 쑤군거렸고요. 멀리 사람들이 보이면 피하기 바빴습니다."

놀리는 아이들과 싸움을 해야했다. 멸시하는 아이들을 힘으로 제압하는 수밖에 없었다. 새벽같이 일어나 집에서 25리나 떨어진 곳에 가서 당수를 배웠다.

한번은 놀리는 친구와 싸움을 하다 병을 깨고 그 조각으로 손등을 긁었다. 친구의 손을 잡아끌어 그 손등도 긁었다. 붉은 피가 흘렀다.

"야 임마 너랑나랑 살색은 달라도 피 색깔은 똑같잖아"라고 울부짖었다. 그 상처는 아직도 뚜렷하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떠돌았다. 주먹건달 생활도 했다. 동네 콩쿠르를 휩쓸며 노래를 잘해 유명작곡가들에게 픽업되곤 했지만 막판에 돈이 없어 꿈을 접어야 했다.

그러다 한 연예잡지에서 유명 탤런트인 이낙훈씨의 기사를 읽게됐다.

"그 분이 미국에서 공부를 했다는 문구가 눈에 들어왔어요. 선생님이 잘가는 곳에 무작정 찾아가 '난 이곳에서 도저히 살 수 없습니다. 미국가는 방법 좀 알려주세요'라고 했습니다."

이씨는 탤런트 시험을 보는게 어떻겠냐고 권유했고 복천은 TBC에 합격했다.

얼굴이 알려지고 여기저기서 쑥덕댔다. 하지만 그때는 기분이 좋았다. '저기 저사람 샌디 김이야.' 그렇게 TV에 나가면서 이름이 알려졌지만 막상 생활은 힘들었다. 하숙을 하며 극장쇼.약장수쇼에도 출연했다.

"가난했지만 그 때가 행복했던 것 같아요. 남들의 '괜찮은 시선'을 처음으로 느낄 때였죠. 바쁘게 일하던 어느날 황달이 걸려 병원에 누워있는데 라디오에서 어머니 인터뷰가 나왔어요. 그때야 제가 어떻게 태어났는지 알게 됐습니다. 20여년이 넘게 물어보지 않았는데…. 어머니 마음을 아프게 할께 뻔하잖아요."

81년 아는 형의 도움으로 미국에 왔다. '색깔이 같은 사람들이 많은 곳에 가는구나'. 행복했다. 주유소에서 펌프맨으로 12시간씩 일했다.

업주들은 샌디가 흑인지역에 잘 어울린다며 흑인밀집 지역인 캄튼에 보내기도 했다. 생활이 안정되면서 새벽어시장에서 조개껍질을 까며 고생하는 어머니를 모셔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83년말 미군에 입대했다. 시민권을 따 전 가족을 초청하기 위해서였다.

87년 꿈에 그리던 어머니가 오셨다. 그해 샌디는 어머니를 미국구경 시키기 위해 깡통밴을 샀다. 내부를 예쁘게 꾸미고 침대도 만들고 냉장고도 들여놨다. 동상으로 손가락이 굽은 어머니는 따뜻한 나라에서 행복했다. (그 깡통밴은 작년에 팔았다. 가슴이 미어졌다고 했다.)

"내 고생이야 어머니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죠. 그 시절 혼혈인 나를 낳은 어머니가 얼마나 힘든 삶을 사셨겠어요. 어머니는 지금도 차가운 기운이 감도는 분이예요. 강직하지 않으면 그 지옥의 계절을 보내실 수 없었을 거예요. 위대한 분입니다."

50여년을 괴롭힌 색깔 타령은 이곳에도 있다. "한인마켓에 가서 내가 말만 꺼내면 여기저기서 쳐다봐요. 어떤 사람은 얼굴을 빠짝 들이밀고 '깜둥이가 한국말 잘하네'라고 합니다. 이게 말이 됩니까. 미국에 살면서…." 오랜 세월이 흘러 익숙하련만도 한데 아직도 힐긋쳐다보는 그 눈빛들은 샌디에게 비수로 꽂힌다.

샌디는 제대후 87년부터 시큐리티 가드와 물리치료사 등을 거쳐 5년전부터 한인 아내와 함께 페인트업을 하고 있다.

이제 그에게는 검은색과 흰색만 있는 것이 아니다. 빨간색도 있고 파란색도 있고 연두색 파스텔색도 있다. 샌디는 비로소 색깔에 갇혀지내지 않고 마음대로 색깔을 골라 칠한다.

글 김석하 기자 / 사진 신현식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