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인 헤어 디자이너 내가 가르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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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인 헤어 디자이너 내가 가르친다
  • 이언주
  • 승인 2006.01.18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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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ul Mitchell 프로그램 Senior Educator - 헤어디자이너 전경숙

최근의 젊은 한국인 이민 세대들에게 70년 대 미국이민 세대들은 미화 몇 백달러 정도 손에 쥐고 너덧 명의 자식들과 미국 땅을 밟았다 하면 믿기 힘들다 하겠으나 그 당시 이민 온 나이든 세대들은 금새 고개 끄떡이며 그 말에 모두가 동감할 것이다. 1972년, 전경숙씨 가족도 그렇게 온 가족이 맨손으로 미국에 도착했다. 메릴랜드였다. 처음 미용실에 다녀온 여동생이....미국을 오기 전 딸들 모두는 아주 짧은 단발머리로 자르고 왔다. 돈도 아끼고 머리 자르는 것이 복잡하다는(?) 이유에서였다. 그 덕분에 2년 간 미용실을 가지 않아도 됐다. 그러다가8학년 때였다. “둘째 여동생이 처음으로 가본 미용실에서 머리를 자르고 집에 오더니 그만 막 울더라구요. 머리를 보니 이건 진짜 아니었어요. 서양인 미용사가 동양인의 머리를 처음 잘라본 거에요. 동생이 하도 울어 울음을 그치게 해 보려고 가위를 들고 머리를 고쳐주니까 동생이 너무 좋아했어요.” 그 이후로 재미가 솔솔 생기기 시작하여 아예 아버지를 제외한 동생들의 머리담당이 되었다. 아버지는 다른 것 하지 말고 대학 갈 준비나 하라고 성화였다. 그러나 타고난 끼를 어찌하랴. 더구나 넷이나 되는 동생들 덕에 일주일에 한번씩 돌아가면서 머리를 자르게 되니 연습하기에 충분한(?) 여건이 된 셈이다. 드디어 고등학교에 들어가 직업반(Vocational Program)에 들어가 배우기 시작했고 파트타임으로 미용실에서 일하기로 했다. 그 당시 메릴랜드엔 동양인 미용실은 찾기도 어려웠다. 서양인 밑에서 머리 감겨주는 ‘Shampoo Assistant’로서 일이 시작되었다. 몸에 전율이 느껴졌던 날그러던 어느 날, 미용실에서 뉴욕에 전세계 헤어 디자이너들이 기술을 겨루고 새로운 스타일을 발표하는 큰 헤어쇼가 있다는 말이 귀에 들어왔다. 무엇을 망설이겠는가? New York International Hair Show에 구경가기로 결심했다. 날짜가 오기 만을 기다리다가 뉴욕 행 기차에 몸을 싣고 미래의 나를 생각하며 차창 밖을 내다보면서 말없이 주먹을 쥐고 뉴욕에 도착했다. 그 때가 16살이었다. 헤어 쇼가 시작되고 Paul Mitchell(헤어디자이너, 89년 작고)이 Stage에 올라왔다. 그 당시 Paul Mitchell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헤어디자이너로서 자신의 이름을 딴 헤어용품회사를 시작한 때였다. “그를 보자 한 순간 몸에 전율이 느껴졌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그 감정 이해하겠는지 모르겠어요.” 그리고 그녀는 다짐한다. “저 자리에 꼭 내가 서리라.” 저절로 콧등이 시려오고 목구멍이 잠기는 듯했다. 그녀의 눈에 전 세계의 헤어 디자이너들이 보였고 세상이 크다는 것을 보았고 그녀의 미래가 거기 있었다. 그녀는 그 이후 여태껏 한 번도 빠진 적 없이 매년 봄 뉴욕을 다녀왔다고 한다. 부모님의 권유로 대학은 Business Administration(경영학)을 전공했다. 그러나 아직도 그녀의 전공(?)은 ‘헤어 디자이너’였다.
86년부터 한 장소를 유지
그녀가 알렉산드리아에 가게를 가지게 된 것은 우연이었다. “친정엄마가 비지니스하려고 가게를 알아보다가 여긴 맞지 않는다고 돌아서려는데 제가 보기에는 미용실이 주위에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 내가 들어가기로 결정한 겁니다. 둘째를 임신한 채로 그 동안 남 밑에서 일 배운지 10년 만에 내 가게를 운영하게 된겁니다.” 헤어샵이 없는 동네에 가게가 새로 생겼다고 현지 로컬신문에서 친절하게 인터뷰기사까지 실어주었다.

그 덕에 동네 손님들이 하나 둘 오기시작하고 서비스와 스타일이 좋다고 소문이 나기 시작했다. 86년 이래로 여태껏 같은 장소에서 같은 손님들과 이제는 친구처럼 지내며 일을 하고 있다. “지금은 단골 중에 상원의원 와이프도 있고 장성 와이프도 있고 백악관에 근무하는 여자손님도 있어요. 또한 이제는 손님들의 자녀들이 자라서 다시 새로운 고객이 되어 찾아오곤 해요.” 한국말로 손님들도 대물림(?)하게 된 것이다.

재미있는 일도 있었다. 12년 전 도둑이 들어 밤에 이층인 이곳의 지붕을 뚫고 들어왔다. “Alarm System이 없었지만 고작 훔쳐간 것이 Register에 비상용으로 남겨둔 30불 정도였습니다. 경찰을 불렀더니 Alarm을 설치하라고 권했지만 돈 아끼려 설치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후도 몇 차례 도둑이 더 들어왔지만, 가져간 것이 고작 10불, 20불 정도였습니다. Alarm도 좋지만 따져 보면 도둑이 가져가는 돈이 더 적었거든요. 가위 하나가 500-600불 인데 그런 것은 놔두고 겨우 잔돈만 가져가니까 도둑에게 봉사한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그래서 저희는 지금도 알람이 없어요.”그녀는 그만 웃고만다.

‘Senior Associate Certificate’시상식에 내 이름이
5년 전 폴 미췔 프로그램을 통해 Educator(전국에 강사만 약 600명)가 되고 싶었다. 자존심과 함께 미 주류사회에서 내 위치를 확인하고 싶은 이유에서였다. 프로그램은 생각보다 힘들었다. Educator가 되기 위해선 처음부터 자존심을 죽이지 않고는 할 수 없었다. 내 가게를 갖고 활동한 지 15년이 넘었는데 이건 처음부터 다시 시작이었다.

“Certification을 받을 때까지 매 3개월마다 테스트를 받아야 했어요. 한 달에 한번씩 새로운 스타일의 머리를 완성하여 비디오로 촬영 후 보내야 하고, Certification을 받고 나서도 3-6개월 마다 회사에서 출시되는 헤어 스타일 컬렉션 DVD를 받아보고 먼저 연습하는 등강사들 먼저 트레이닝을 받고 나서 Re-Certification을 받게 돼있어요.” 그 후 다시 회사가 지정한 헤어살롱이나 미용학교, 헤어쇼에서 교육을 하도록 되어있었다. 현재 그녀는 폴미췔 회사와 연계된 헤어용품 총판 Davidson Supply Company를 통해 헤어칼라 강사활동을 하고있다.

전경숙씨는 2년 만에 Educator 자격증을 가진 이 후, 취득하기 어렵다는 폴미췔 프로그램 ‘Senior Educator’자격증을 5년 만에 손에 쥐었다. “2005년에 Senior Associate Certificate 시상식 중에 기대하지 않았던 제 이름이 나와 당황했었습니다(전국에 약 100명). 그러자 옆에 앉아있던 동료 강사 한 명이 자기는 10년이 되도 못 받았다고 눈물을 흘리며 울기도 했습니다.” 16세 때의 다짐이 이제 빛을 보기 시작하는 거다. “솔직히 활동하고 싶은 곳은 역시 뉴욕이지만 그래도 얻고 싶은 것은 거의 얻은 셈입니다.”

나는 헤어졌지만 시어머니는 아이들의 할머니
12세 나이에 장녀로서 부모님과 함께 이민 와서 가족을 위해 희생하는 부모를 보고 자라난덕에 자식 키우는 것은 일찍 깨달은 편이어서 하나님과 부모를 공경하는 것이 자식에게 전해주는 교육의 전부가 되어버렸다. 현재 미 서부에 사는 남편과 헤어진 지 10년이 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매주 일요일이면 혼자되신 시어머니를 차로 모시고 시아버지(2년 전 작고)가 20년 간 집회하던 성산 장로교회에 함께 참석하고 있다. 보통사람에겐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이다. “시 아버지는 아이들의 친 할아버지시고 시어머니는 할머니 아닙니까. 당연히 친어머니와 마찬가지로 대해드려야지요. 아이들도 저를 잘 이해해주고 할머니와 함께 교회 가는 날은 너무 좋아하거든요.” 이것보다 더 좋은 교육이 어디 있을까.

아픈 이들을 생각하며 기부금 마련 마라톤을 완주
3년 전 메릴랜드에 거주하던 8년 지기 친한 친구가 35세의 나이에 암으로 사망했다. 서로 의지하며 지내던 그 친구가 그렇게 쉽게 떠나가자 그 친구 생각에 매년마다 암환자를 위한 기부금이나 행사에 참여했고, 2004년과 2005년에는 백혈병환자인 Leukemia(고객의 자녀)를 위해 백혈병환자 돕기 마라톤에 참여했다. 대회 참가를 위해 5개월간 개인지도 받은 후 26마일 풀 코스를 완주했다. “3만 명 속에 끼어 달리면서 내가 살아서 달리고 있다는 사실에 정말 감사했습니다. 앞으로도 남은 생의 모두는 신앙생활로 채우며, 부모님 같이 나이 드신 분들을 공경하며 살려고 합니다.”

그녀는 또한 한국 미용인들을 교육하는데 이바지 하여, 미국 속의 한인미용사들을 한 차원 높이 끌어올리는데 작은 역할을 하고 싶다고 했다. 그녀는 현재 미 공군에 근무하는 큰아들 Daniel(21)과 두 딸 Lina(18), Amos(15)와 사랑의 보금자리를 만들어 살고 있으며 미주한인재단 이사, 제주도민회, 교회여성회장 등 활발한 활동으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인터뷰가 끝날 무렵 막내딸로부터 빨리 픽업해 달라는 재촉전화가 왔다. “알았어, 지금 가는 중이야.” 그녀는 엄마 역할도 확실히(?)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