멕시코 이민 100돌 특집 시리즈- 멕시코 한인을 찾아서
상태바
멕시코 이민 100돌 특집 시리즈- 멕시코 한인을 찾아서
  • 미주중앙일보 장연화 기자
  • 승인 2006.01.16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제3회 재외동포기자상 수상작 - 멕시코 한인 사회

1. 꿈은 사라지고

<2005년 3월29일 A-18면>

착취와 학대… 무너진 금의환향

" 돈을 벌어 금의환향하겠다는 꿈에 부풀에 배에 탔다고 합니다. 그러나 결국 그리던 한국 땅을 밟아보지 못한 채 돌아가셨습니다."

1905년 4월4일. 4년 동안 계약노동을 맺고 멕시코로 떠난 한국인 이민자 1033명에 섞여 있던 돌로레스 가르시아(여,45,메리다)씨의 할아버지(김수원씨,1984년 90세로 작고)는 돌아가실 때도 고국을 그리워했다며 조용히 말했다.

가르시아씨에 따르면 할아버지 김씨는 첸체농장(Hacienda Chenche de las Torres)에 넘겨진 후 에네켄 잎을 낫으로 자르는 일을 하다 쿠바로 재이주했으나 10년 만에 다시 메리다로 돌아왔다. 계약기간이 끝난 뒤 지긋지긋한 농장생활이 싫어 떠났지만 그곳 역시 사는 게 녹록치 않았기 때문이다.

첸체농장에서 다시 일하던 김씨는 정원사로 직업을 바꾼 뒤에야 비로서 농장생활에서 탈출했다고 한다. 가르시아씨의 아버지(펠리페 가르시아,72)는 마야 원주민과 결혼한 할아버지가 낳은 5남1녀 중 막내다.

그녀의 소망은 아버지와 함께 한국을 방문하는 것이다. 고향에 돌아가고 싶다던 할아버지의 소원을 늦게나마 자신이 들어드리고 싶기 때문이다.

가르시아씨의 할아버지처럼 제물포에서 영국선박에 오른 멕시코 한인 이민자들 대부분은 제물포 항에서 손을 흔들며 기약했던 것처럼 고국에 귀향하지 못하고 타국에서 쓸쓸한 생을 마쳐야 했다.

이들이 평생 듣도 보지도 못했던 멕시코에 이민오게 된 것은 영국 국적을 가진 국제 이민 브로커 존 마이어스라는 인물 때문이다. 중국과 일본에서 멕시코행 노동자 모집에 실패한 그는 한국에서 당시 하와이 이민을 알선하던 일본인의 소개로 사무실을 내고 황성신문에 대대적으로 광고하면서 한국인을 끌어모았다.

멕시코에 가면 집세나 토지경작 비용이 면제되고 임금은 하루에 한국돈으로 2원60전~3원까지 받을 수 있으며 계약기간이 끝나 귀국할 때는 보너스까지 지급한다는 광고에 끌린 한인들은 에네켄 농장에서 4년 동안 일하겠다는 계약서에 주저없이 서명했다.

하지만 한달 여 긴 항해 끝에 도착한 에네켄 농장에서의 삶은 계약노동이란 미명아래 착취와 학대만 존재하는 노예의 삶이었다.

새벽부터 밤 늦게까지 가시가 달려 있는 에네켄 줄기를 잘라 잎을 다듬어 단을 만들고 밭일까지 해도 부채는 쌓여만 같다. 특유의 부지런함과 성실함으로 겨우 빚을 갚고 자유신분을 가졌지만 멕시코 혁명과 한일합방 소식은 한인들의 희망을 빼앗아갔다.

낯선 땅에서 방황하던 한인들은 결국 현지 원주민과 결혼하며 조금씩 멕시코 땅에 동화되기 시작했다. 한국인 후손들의 이름과 얼굴이 바뀌어질수록 이들의 존재도 점차 고국에서 잊혀져갔다.

맘대로 바뀐 성

"나의 성씨는 '코로나'입니다. 할아버지 이름은 '고'씨였지만 멕시코에 와서 멕시코 말을 몰라 '코로나'로 변했습니다."

티후아나에서 대한민국 명예총영사로 활동하는 페드로 디아스 코로나(73)씨. 그의 성은 원래 '고'씨다.

멕시코에 도착한 한인 이민자들의 또 다른 설움은 대대로 내려오는 성씨가 바뀐 것이다. 농장 관리인들은 한국식 발음이 어렵다며 김씨는 킹(King), 이씨는 가르시아(Garcia), 고씨는 코로나(Corona), 최씨는 산체스(Shancez), 허씨는 히메네스(Jimenez)로 성을 바꿔불렀다.

지난해 말 멕시코시티 한국대사관 강당에서 공연됐던 모노드라마 '굿나잇 코리아'의 주인공 오크만의 원래 이름도 '억만'이다.

낯선 언어 앞에서 의사소통을 제대로 못해 고유의 성씨를 버려야 했던 한인들의 설움은 가족들에게 자신의 한국 이름을 교육시키는 것으로 풀어야 했다.

그 결과는 100년이 지난 지금 한인 후손들이 자신들의 증조 할아버지와 할머니 이름까지 또렷하고 기억하고 부르는 것으로 나타난다.

일부 한인 후손들은 한인이라는 정체성을 찾기 위해 고유의 이름을 살리기 위해 뛰기도 한다. 김인명(안드레스 김 히메네스)씨의 경우 관청에 돈을 내고 '킹'으로 바뀌었던 자신의 성을 원래대로 되찾아 다른 한인 후손들에게 좋은 본이 됐다.

말과 문화는 잊어도 음식은 한국식

한인 4세인 알폰소 마 김(Alfonso May Kim,39)씨. 어디를 봐도 한인의 후예라고 믿기 어려운 얼굴은 LA한인타운에서 흔히 마주칠 수 있는 멕시칸 얼굴이다. 그러나 그의 식탁을 보면 한인 후손이라는 것을 바로 알 수 있다.

알폰소씨가 제일 좋아하는 음식은 듬성듬성 썰은 중국 무에 멕시칸 고춧가루와 한인 선교사가 나눠준 한국 고춧가루를 섞어 만든 총각무 김치. 양파와 간장을 잔뜩 넣어 불고기 양념을 한 고기를 얹어놓은 한국식 쌀밥과 함께 먹는 저녁식사 시간은 그에게 가장 행복한 순간이다.

알폰소씨의 부인은 마야 원주민이지만 시어머니 마리아 구아달루페 김 유(61)씨에게 김치담그는 법을 전수받아 배추김치도 만들어 먹고 1년에 한 차례씩은 고추장도 담근다고 한다.

알폰소씨처럼 현지화된 외모에 한국어도 구사하지도 못해 영락없는 멕시칸으로 오해받는 한인 후손들을 한국과 이어주는 문화가 바로 음식이다.

'김치'와 '고추장'은 아장아장 걸어가는 아이들도 말할 줄 아는 단어일 만큼 친근하다. 지금도 많은 후손들이 고추장, 된장, 콩나물, 만두, 미역국 등을 만들어 먹는다.

한국 음식점이나 마켓이 없어 고춧가루는 물론이고 한국배추와 무 등 야채도 구하기 어렵지만 이들은 멕시칸 고추를 빻아 만든 고춧가루와 양배추 등을 대용하며 한국의 음식 문화를 이어가고 있다.

메리다와 칸쿤 지역의 한인 후손들을 대상으로 선교하고 있는 민주식 선교사(여,50)는 "대부분의 한인 후손들이 김치나 고추장, 한국식 밥을 즐겨먹고 한국 음식에 대한 관심이 무척 높다."며 "잊혀진 이민자들로 대우받았던 이들이 한국 음식문화를 소중하고 간직하고 있다는 사실이 놀랍기만 하다."고 전했다.

기자와 함께 저녁밥을 먹은 알폰소씨는 말한다.

"김치를 먹을 때마다 내가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문득 깨닫곤 합니다. 외모나 이름이 비록 한국인처럼 생기지 않고 다르지만 내 자식에게 한국의 문화를 남겨줄 분명한 한인 후손입니다."


2. 농장에 뿌린 눈물 

<2005년 4월26일 A-26면>

눈물 삼키며 모은 돈 임시정부 보내

멕시코 초기 한인 이민자들의 비참한 삶은 하와이 농장이민을 왔던 미국 이민자들에게는 좀처럼 실감나지 않는다. 그러나 노예처럼 살았던 멕시코 한인 이민자들의 모습은 미국의 중국계 신문에도 실렸을 만큼 처참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발행하던 중국계 신문 '문흥일보'는 당시 멕시코 유카탄주 메리다에 거주하는 중국인으로부터 받은 편지를 게재했는데 한인들이 농장주의 학대와 계약위반으로 차마 눈을 뜨고 볼 수 없을 만큼 비참하게 살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농장주들은 한인들의 상투를 모두 자르고 서로 팔고 샀는데 한인 몸값은 30전으로 돼지고기 값 80전에 비교해도 그 가치가 너무 싸다. 모두 조각조각 떨어진 옷을 걸치고 다 떨어진 짚신을 신어 멕시코인의 조소의 대상이 됐다. 부인네들은 등에 아이를 업은 채 일을 했다. 눈물없이 이들을 차마 볼 수가 없었다…."

편지에 따르면 한인들은 5~6등급으로 매겨지는 원주민 노예보다 아래인 7등급으로 분류돼 함부로 다뤄졌으며 작업 할당량을 달성치 못하면 무릎을 꿇린 채 구타당해 살가죽이 벗겨지고 피가 낭자했다고 적혀있다.

실제로 이같은 혹독한 삶을 견디지 못해 자살한 한인도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메리다에 거주하는 텔마 이(84,한국명 덕순)씨는 "내가 아는 사람만 해도 자살한 사람이 2명"이라며 "어려서 부모님에게 들었기 때문에 자세한 내용은 모르지만 농장에서 함께 일했던 한인들이 돈을 모아 장례를 치러주고 많이 울었던 것이 기억난다."고 지난 세월을 더듬었다.

가혹한 농장의 삶을 피하기 위해 도망치다 체포되는 한인들도 종종 있었다고 한인 후손들은 전했다. 농장주들은 노동자들이 도망치지 못하게 경비원을 세워두었다고 덧붙였다. 물론 잡혀온 도망자들에 대한 벌은 더 가혹했다.

계약이 끝나도 한일합방으로 고국에 돌아갈 수 없었던 이들은 다시 농장으로 돌아왔지만 힘든 삶은 계속됐다.

하지만 이같은 악조건속에서도 한인들은 조국의 독립을 위해 돈을 모아 상하이 임시정부에 군자금을 보내는 애국심을 발휘했다. 야자수 나무 잎으로 엮은 움막같은 초가집 '빠하'(Paja)에 거주하고 옥수수 가루로 만든 '또르티야'(Tortilla)를 밥 대신, 양배추를 소금에 절여 김치 대신 먹으며 악착같이 모은 돈이었지만 아까워하지 않았다. 당시 이들이 임시정부에 보낸 모금액은 당시 해외에서 보낸 전체 모금액의 상당부분을 차지했다고 지금 남은 사람들은 전했다.

이들은 또 당시 도산 안창호가 해외 한인들을 위해 설립한 북미실업주식회사의 투자금 목적으로 발행한 주식도 사들였는데 이 역시 전체 주식발행금액의 3분의1에 달했다.

멕시코 한인이민 100주년 기념사업회 서동수 회장은 "당시 한인들은 가난했어도 집에서 쌀 한 주먹씩 모아 판매하며 돈을 모아 임시정부에 지원했다."며 "독립 후에는 가난한 고국을 위해 난민구제금까지 모아 보냈다."고 설명했다.

지금도 메리다 한인회에 가면 시청 앞에서 일본 규탄시위를 벌인 사진이 남아있다. 승무학교와 한국어 학교를 세워 후손들에게 민족정신을 가르친 모습도 찾을 수 있다.

100년의 세월이 지났지만 한인 후손들에게는 아직도 3?1절의 정신이 남아있어 매년 3월1일을 전후해 지역주민들이 모여 잔치를 연다. 지난 2월 말 메리다에서 열렸던 행사도 3.1절을 중심으로 행사가 진행됐다. 당시 한인들의 조국에 대한 사랑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메리다 한인회의 모습이다.

노예계약은 끝났지만…

1910년, 계약이 끝나 귀국을 마음먹었던 멕시코 에네켄 농장 한인들은 그대로 주저 앉으면서 멕시코 전역과 중남미까지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에네켄 사업이 사양세로 접어들면서 유카탄 메리다 지역의 경제도 하락하기 시작했다.

계약만료로 노예생활에서 풀려나긴 했지만 농장일 밖에 모르던 한인들의 생활은 한층 빈곤해졌고 이로 인해 타지역과 타국가로 이주하는 한인들도 늘어났다. 그와 함께 원주민과 결혼 등으로 정착하는 한인들도 늘어났다.

'한국인 멕시코 이민사'의 저자 이자경씨는 "경제가 나빠지면서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으로 이주하려던 한인들의 시도가 좌절되면서 각 지역으로 많이 떠나갔다."고 말했다.

메리다시 문화부장 러셀 몬타네스씨는 "경제사정이 나빠지면서 대부분의 농장들이 문을 닫거나 폐허가 됐다."며 "젊은이들은 티후아나, 멕시코시티 등 대도시로 일자리를 찾아 떠났으며 농장일을 하던 이들은 장사로 업종을 바꾸며 살길을 찾아갔다."고 설명했다.

파나마 운하가 완공되던 1914년경 신봉건씨라는 한인이 파나마에 터전을 잡은 기록이 있으며 코스타리카에도 한인이 거주하기 시작했다.

10년 뒤인 1920년쯤에는 쿠바에도 한인들이 대거 이주해갔다.

멕시코 한인이민100주년 기념사업회의 서동수 회장은 "당시 쿠바 농장에서 일하면 돈을 쉽게 벌 수 있다는 소문이 나돌아 너도나도 가려 했다."며 "어렵게 이주해 갔지만 그곳에서도 에네켄 농장에서 고생만 하다 결국 빈손으로 돌아오는 한인들이 많았다."고 전했다.

친킬라 농장의 한인 노동자 급료 명세서

유카탄주를 대표하는 메리다 칸톤 인류학 박물관 2층 전시실.

 유독 눈길을 끄는 커다란 유리관이 복도 중앙에 놓여 있다. 그 속에 보관돼 있는 것은 1908년도 '친킬라 농장'(Hacienda Chinkila)의 회계장부다. 당시 고용한 수 백명의 노동자들에게 지불하던 급여를 한눈에 파악할 수 있는 보기 드문 자료로 꼽힌다.

 장부를 자세히 보니 '꼬레아노'(Coreano)로 분류된 한인 노동자들의 이름을 발견할 수 있는데 대충 눈으로만 훑어봐도 50명이 넘는다. 물론 이 명단에 제대로 적혀 있는 한인 이름은 없다. 성씨를 모두 발음이 나는데로 적어놓아 손가락을 짚어가며 발음해야 하지만 모두 한국인이다.

 친킬라 농장은 초창기 한인 이민자들이 일했던 농장 중 한 곳이다. 이 장부를 보면 한인 노동자들이 당시 원주민 노동자나 다른 인종 노동자들보다 형편없는 대우를 받았음을 알 수 있다.

 하루 12시간씩 같은 시간을 일하고도 원주민 노동자는 한인 노동자보다 급료가 훨씬 많다. 이 표에 따르면 원주민은 하루 평균 120페소였지만 한인들은 80~90페소를 받았을 뿐이다.

 이에 대해 블란카 곤잘레스 박물관장은 "말이 안통한다는 점을 노려 외국인 노동자의 급료를 착취한 증거"라며 "낮은 급료에 낯선 환경으로 한인들의 생활이 당시 다른 외국인 노동자보다 훨씬 열악했다"고 설명했다.


3.  유카탄의 후예들

<2005년 4월12일 A-25>

"교육이 희망"… 농장 삶 고리 끊었다

메리다에 거주하는 이르마 송(77)씨. 눈길을 끄는 세련된 옷차림과 화장, 그리고 무엇보다 한국적인 외모가 한인 3세로 믿어지지 않는다. 송씨는 기자를 만나자 마자 외할머니 이야기부터 꺼냈다.

"우리 할머니가 누군지 아세요? 바로 장갑을 처음 만들어 한인들에게 나눠준 사람이랍니다."

송씨의 외할머니는 마리아 조씨. 양반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여종인 자신과 결혼한 뒤 멕시코로 도망쳐 깜페체 농장에서 고생하는 남편(마누엘 양)이 매일 밤 에네켄 가시에 찔려 양 손이 피범벅이 되자 아끼던 치마 저고리를 오려 밤새 장갑을 만들었다.

인근 한인 부인들도 너도 나도 장갑을 만들었고 일부는 원주민들에게 돈을 받고 팔기도 했다. 날카로운 에네켄의 가시로부터 손이 보호할 수 있게 되자 일의 능률도 높아졌다. 에네켄 잎을 따는 일을 원주민들이 하루에 3000~4000장 정도 할 때 한인들은 1만 장까지도 너끈히 해냈다.

그렇게 자리를 잡아간 한인 이민자들은 2세와 3세들에게 한국어 뿐만 아니라 정규교육을 시키기 시작했다. 농장에서의 삶을 벗어나는 것이 그들의 남은 희망이자 목표였다.

송씨도 당시엔 파격적이었을 만큼 고학력이었는데 '콘세르바티보 데 베야 산테스'(Conservativo de Bella Santes)라는 여자고등학교를 졸업했으며 피아노도 배웠다. 4대째로 내려온 지금 송씨의 4남2녀는 모두 메리다에 정착해 안정적으로 살고있다.

티후아나에서 재력가로 통하는 페드로 디아스 코로나(74)씨는 대한민국 명예 총영사다. 그는 메리다에서 유명한 고흥룡(100)씨의 외조카이기도 하다. 운영하던 비즈니스를 아들에게 넘기고 은퇴한 그는 티후아나를 찾는 한국인들의 법적문제를 도와주느라 바쁜 하루를 보낸다.

1940년대 초반 아버지(페드로 리 디아스)를 따라 티후아나로 재이주한 코로나씨는 아버지가 운영하는 식품점을 도와주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본격적으로 장사에 뛰어들었다.

코로나씨는 "새벽부터 밤 늦게까지 가게에서 일하는 아버지를 보면서 성공하자는 생각을 끊임없이 했었다."며 "지금 나와 내 자녀들이 성공할 수 있었던 건 근면하고 성실한 한국인의 핏줄과 그같은 부모의 희생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100년 전 선조들이 뿌린 눈물의 열매를 이제야 한인 후손들이 수확하고 있다. 후손 중에는 멕시코와 쿠바에서 하원의원, 주 대법원장, 병원장, 화가, 연주가 등으로 활약하고 있다.

에네켄 후손 4세인 노라 유씨는 한인으로 첫 하원의원으로 선출됐다. 역시 한인 4세인 리스벳 로이 송은 멕시코 낀따나로주의 대법원장이다. 쿠바에는 식품청장을 지낸 한인3세가 있다.

주멕시코대사관 자료에 따르면 멕시코 한인 후손들은 약 3만 명 정도로 추산된다. 이중 메리다에 2500명 정도가 거주하고 있으며 나머지는 멕시코시티, 티후아나, 베라크루스, 오아하카 등에 흩어져 살고 있다. 이제 그들 중 누구도 에네켄 노동은 하지 않는다. 에네켄 잎도 이젠 박물관 사진 속이나 식물원에서 만날 수 있을 뿐이다.

100년 전 선조들이 뿌린 눈물의 열매를 이제야 한인 후예들이 수확하고 있었다.

부모의 땅을 찾은 6자매

"이렇게 쓸쓸한 느낌이 들 줄 몰랐습니다. 돌아가신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참 많이 보고싶어요."

멕시코 한인 노동자들이 처음 도착했던 유카탄주의 프로그레소(Progreso) 항구를 찾은 여섯 자매는 "부산항을 얘기하시던 할아버지와 알 수 없는 노래를 흥얼거리던 할머니의 모습이 떠오른다."며 눈시울을 닦았다.

 제물포항(인천)을 떠난 멕시코 이민자들은 당시 태평양 연안의 살리나 크루즈(Salina Cruz) 항에서 기차를 타고 코알사꼬알코스(Coalzacoalocos) 항구로 이동해 다시 배를 타고 유카탄의 프로그레소(Progreso)항에 도착해 메리다의 각 농장으로 흩어졌다.

이들 자매의 결혼 전 성은 멕시코 법에 따라 아버지 성과 어머니 성을 함께 쓴 김 함(Kim Ham).

현재 첫째 다이레(67)씨와 넷째 펠리아(58), 다섯 째 미리암(53)씨는 티후아나에 살고 있어 가끔씩 만나지만 둘째 헤미 이레네(62,샌디에이고)씨와 셋째 마르가리타(60,출라비스타)씨, 막내 미네르바(50,바하캘리포니아)씨는 얼굴보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이들은 멕시코 한인 이민100주년 기념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만사를 제쳐놓고 모였다.

10대 때 단신으로 건너 온 외할아버지(왕 함,작고)가 농장에서 만난 마야 원주민과 결혼하면서 혼혈이 시작됐지만 이들은 아직도 부모가 불러주던 자신들의 한국이름을 기억하고 있다.

다이레씨는 "친할아버지가 항상 '인순아'라고 부르던 기억이 또렷하다."며 "일이 없는 날이면 손을 잡고 메리다 한인회에 데리고 가 한국어를 공부시키기도 했다."고 말했다.

마르가리타(60)씨는 "결혼해서 가족과 떨어져 살아보니 고향에서 멀리 떠난 우리 선조들의 마음고생이 느껴졌다."며 "우리가 이렇게 가족을 이루고 편안하게 살도록 터전을 일궈준 부모세대에게 감사할 뿐"이라고 말했다. 

한인의 얼 심는 선교사들

메리다 레빤 농장에 허름하게 세워진 창고같은 건물 벽 한쪽에 한국어로 크게 '유카탄 무지개 학교'라고 써있다. 이곳에서 8년째 다니엘 김 선교사(67)는 한인 후손들과 원주민 자녀들에게 한국어와 무용, 노래, 성경을 가르친다. 김 선교사의 꿈은 이곳에 중.고등학교를 설립해 한인 후손들이 대학까지 마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이다. 이미 학교를 설립할 부지도 메리다 외곽지역에 마련했다.

2년 전부터 메리다에서 선교활동을 하다 2시간 정도 떨어진 칸쿤으로 이사해 '칸쿤 어린이집을 운영하고 있는 홍정현 선교사(60?세광국제선교회 소속)와 민주식 선교사(50?성광침례교회)의 꿈도 비슷하다.

이들은 한인 후손 가정을 방문해 김치를 담가주기도 하고 사진과 비디오 등을 함께 보며 한국에 대해 설명해주면서 한국을 알린다.

한인 후손들을 대상으로 한국어를 가르치는 ??메리다 한국학교??(대표 양국직 선교사)도 시작한 지 얼마되지 않았지만 벌써 학생이 20여명에 이를 정도로 인근에서 인기가 높아졌다.

메리다 지역의 한인 선교사들은 외부에 드러나지 않고 보이지 않지만 유카탄 지역에 남아있는 한인 후손들에게 한국어와 한국문화, 정체성을 가르치는데 앞장서고 있는 소중한 존재다.

다니엘 김 선교사는 ??버려두었던 세월의 빚을 갚기 위해서도 이들 한인 후손들을 지원하는 일에 동참하고 싶었다??는 의무감으로 이들에게 시선이 향하는 이유를 설명했다.

이같은 뜻에 힘입어 주멕시코 한국대사관도 한인 선교사들을 지원하는 일에 적극적이다. 오운영 영사는 ??한인 후손들이 활발히 모이게 된 것도 한인 선교사들의 활동이 있었기 때문??이라며 ??한인 후손들에 대한 한글 및 정체성 교육과 직업교육을 활성화하기 위해 선교사 지원을 강화하고 있다??고 밝혔다.
 


 4. 아픔딛고 주류 사회로

<2005년 4월19일 A-25>

100년 땀과 눈물... 성공으로 꽃피다

멕시코 한인 이민 선조들이 지난 100년 동안 보낸 세월은 헛되지 않았다. 1970년대에 첫 여성 파일럿 탄생을 시작으로 정치계와 법조계로 뻗어나간 한인 후손들도 속속 나왔다.

마리아 에우헤니아 올슨 이(Maria Eugenia Olson Lee)씨는 멕시코에서 여성으론 처음 파일럿이 돼 지역사회의 눈길을 한몸에 받았다. 항공사에서 스튜어디스로 근무하다 비행학교를 다니며 파일럿 라이선스를 취득한 그녀는 뛰어난 미모로 인기를 끌었으나 안타깝게도 20대 젊은 나이에 비행기 사고로 사망했다.

그녀의 어머니 빅토리아 리씨는 메리다 지역에서 유명한 여걸이었다. 프로그레소 항구 근처에 별장을 구입한 그녀는 지나가는 한인들까지 대접했던 통 크고 손이 컸던 여걸이었다.

마리아씨의 동생 루이스 올라브 올슨 이(Luis Olav Olsen Lee)씨는 "누나는 어머니를 꼭 닮아 이쁘고 성격도 좋았다."며 "누나는 처음 비행기를 운전한 날 온 가족이 파티를 열었었다."고 회고했다.

한인4세인 노라 엘레나 유 연방하원의원(Nora Elena Yu,50)은 멕시코 한인 후손 중 정치계로 진출해 성공한 첫 사례로 꼽힌다. 역시 한인4세인 리스벳 로이 송(Lizbeth Loy Song,51)도 킨타나 루(Quintana Roo)주 대법원장으로 재직하며 법조계를 움직인다.

주요 공직에 재직하다 은퇴한 한인 후손들도 상당수 있다. 에스페란사 곤잘레스 송(Esperanza Gonzales Song,60)씨는 멕시코 국립개발은행 부총재를 지냈으며 루벤 리 사우시(Ruben Rhi Sausi,63)씨도 국립보건소 소장직을 역임하기도 했다. 이들 외에도 각 지역에서 경제적으로 부를 일구고 지역 유지로 살고 있는 한인 후손들은 손가락으로 꼽을 수 없을 정도다.

미주 한인 이민사와 비교한다면 걸음마를 뗀 단계로 보이지만 한인 후손들은 후손들에게 자랑스러운 핏줄을 물려주기 위해 오늘도 열심히 뛰고 있다.

정계 진출 노라 유 연방하원의원 인터뷰

멕시코 한인 이민 선조들이 지난 100년 동안 보낸 세월은 헛되지 않았다. 경제적으로 성공한 한인 후손들들은 손가락으로 꼽을 수 없을 정도다. 정치계로 뻗어나간 한인 후손들도 있다.

노라 엘레나 유 연방하원의원(50?후아레스)은 멕시코 한인 후손 중 정치계로 진출해 성공한 첫 사례로 꼽힌다.

2년 전 치와와주 후아레스시 소속으로 연방하원의원직에 출마해 당선된 유 의원은 이 지역구의 첫 여성 하원의원이라는 기록도 갖고 있다.

유 의원이 정치계에 발을 들여논 건 81년부터. 제도혁명당(PRI) 선거 캠페인 코디네이터를 시작으로 후아레스시 차량등록국 부국장(1985), 멕시코상공회의소 회장(1995~96) 등을 거쳤다.

"나의 성공은 남들보다 배로 공부하고 뛰었기 때문이지만 초창기 한인 이민자들의 땀과 눈물이 없었다면 불가능했다."며 자신의 성공을 이민 선조들에게로 돌리는 유 의원은 에네켄 레빤 농장 후손이다.

'서유견문'을 쓴 유길준씨와 사촌관계였던 증조 할아버지 유진태(멕시코명 호세,작고)씨, 한국에서 2살 때 멕시코에 도착해 유카탄 원주민과 결혼한 할아버지 호세, 그리고 레빤 농장에서 태어난 한인 3세 아버지 엔리케 유(80,후아레스)씨가 그녀의 뿌리다.

아버지 엔리케씨는 유 의원 못지 않은 억척 한인이었다. 14살 때 홀로 베라크루즈로 떠난 그는 후아레스시로 재이주해 한인 후손으로는 처음 식품점을 차리고 새벽5시부터 자정까지 일했다. 그는 돈을 모아 농장에서 고생하는 가족들을 차례로 후아레스시로 불러 모았고 7남매를 모두 대학까지 공부시켰다.

엔리케씨의 1남6녀 중 장녀인 유 의원도 아버지를 닮아 오전8시부터 자정까지 이어지는 업무를 소화한다. 그녀의 관심은 외국기업 투자지원과 국내 업계의 수입 및 수출장려 정책이다.

유 의원은 "멕시코 경제가 살아나려면 직업창출과 고용률을 높이는 업종을 활성화시켜야 한다."며 "미국 등 외국기업이 멕시코에 과감히 투자할 수 있도록 정책적인 뒷받침을 만드는 것도 내 업무"라고 설명했다.

의원업무 뿐만 아니라 주말에는 후아레스와 치와와, 엘파소시에 있는 직원 80명 규모의 통관대행회사를 운영하다 보니 "데이트할 시간이 없을 만큼 바쁘다."는 유 의원은 아직 미혼이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결혼보다도 오는 2006년 치룰 재선거가 더 중요하다.

앞으로 연방상원직에 도전할 계획이라고 밝힌 유 의원의 꿈은 한국과 멕시코, 또 미주 한인사회와 멕시코 한인사회를 연결하는 다리역할을 맡는 일이다. 또 미주 한인 커뮤니티와도 교류를 맺어 서로간의 경험을 나누고 싶다는 유 의원은 "한인이라는 정체성이 하루하루 열심히 살도록 만들었다."며 "내 뒤를 걸어오는 한인 후손들을 위해서라도 새 길을 개척하는 마음으로 열심히 살겠다."고 다짐했다.

"멕시코 한인 이민사는 100년이 지났지만 아직은 걸음마를 뗀 단계입니다. 정치,사회적인 성장도 미미할 뿐입니다. 그러나 미주 한인 커뮤니티 못지 않은 결과를 후손들에게 물려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킨타나 루주 대법원장 리스벳 로이 송 인터뷰

멕시코 킨타나 루(Quintana Roo)주의 주대법원장인 한인4세 리스벳 로이 송(Lizbeth Loy Song.53) 판사도 역시 에네켄 농장 이민 후예다.

체투말(Chetumal)에서 태어난 그녀는 유카탄 메리다에서 법대를 졸업한 후 1982년 킨타나루 주법원 가정판사로 임용됐다. 그후 민사부 판사(1985~87년)와 임시 대법관(1987~93년)을 거쳐 93년 정규 대법관이 됐다.

강직한 인상의 로이 송 대법원장은 2000년부터 멕시코 법사위원회 회장직을 역임할 만큼 리더십도 뛰어나다.

로이 송 대법원장은 자신의 성공이 결코 한 순간에 이뤄지지 않았다고 강조했다.

로이 송 대법원장은 "내 부모와 이민 선조들이 가르치고 물려준 건 성실함과 강직함"이라며 "열심히 노력한 만큼 꿈을 이룰 수 있었다."고 말했다.

로이 송 대법원장은 "여자이기 때문에 혹은 내 속에 한국 핏줄이 흐르기 때문에 받은 차별은 없었다."며 "오히려 나로 인해 주변 사람들에게 한국과 한국인에 대한 좋은 인상을 심어줄 수 있게 돼 기쁘다."고 덧붙였다.

"한인이라는 정체성이 없다면 지금의 나도 없었을 것입니다. 비록 외모나 사용하는 모국어가 다르더라도 한국인임을 잊지 않을 겁니다."

 

5. 멕시코 시티 한인사회

<2005년 4월26일 A-15>

봉제공장 100여곳…도매상권 5% 차지

1905년 단 한차례 이민으로 중단됐던 멕시코 이민은 1964년 멕시코 정부와 한국이 정식으로 수교관계를 맺으면서 다시 시작됐다. 대사관 등 정부 관계자들과 민간상사 직원, 유학생들이 조금씩 멕시코로 들어오다 1980년에 본격적인 이민행렬이 생겨났다.

새 이민자들은 의류 도소매업을 비롯해 원단수입 및 판매, 봉제공장, 잡화점, 식당업 등에 종사하면서 자리를 잡아갔다.

멕시코 시티에서도 한인들은 시장경제를 유도하는 한 줄기로 꼽힌다. 멕시코 시티의 자바시장으로 불리는 도매상권 중심지 '센트로 메르까도'(Centro Mercado)에 가면 한인 업소가 나열해 있다. 한인 업소는 전체 시장규모의 5% 정도를 차지하고 있다고 센트로 한인상인들은 전한다.

센트로에서 여성의류 도매점을 5년째 운영하고 있는 방철수(60,비야 둑도)씨는 "센트로 내에 한인이 운영하는 봉제공장만 해도 100곳이 넘는다."며 "한인들은 기술도 좋고 손도 빨라 일감이 끊어지지 않는 편"이라고 전했다.

외교통상부가 발행한 2003년도 '재외동포 현황'에 따르면 멕시코에 거주하는 한인들은 총 1만9500명(시민권자 480명, 영주권자 2950명, 일반 체류자 8950명, 기타 7129명)이다. 그러나 멕시코에는 브라질, 아르헨티나, 볼리비아 등 중남미에서 재이주해 오는 한인이 많아 실제로 이곳에 거주하는 한인수는 이보다 훨씬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멕시코 시티에도 한인타운이 조그많게 형성돼 있다. '조나 로사'(Zona Rosa)로 불리는 다운타운 멕시코시티 중심가 '레포르마 아베니다'(Reforman Avenida)에서 3~4블록 떨어진 곳이다. 멕시코시티 한인회(회장 이광식) 건물 앞을 중심으로 우래옥, 한국정 등 20여곳의 음식점과 오뚜기 식품점 등 소형마켓, 비디오 대여점, 미용실, 학원, 여행사, 노래방이 몰려있다.

그러나 멕시코시티에 거주하는 한인들 대부분은 이곳에 영구 거주하기 보다는 이곳을 미국이나 캐나다 등으로 가는 중간 기착지로 여겨 교민 경제가 제대로 정착돼 있지 않은 형편이다.

멕시코시티 한인회 이광식 회장은 "많은 한인들이 이곳을 떠날 생각을 하고 살아가기 때문에 한인회조차도 제대로 된 시스템이 설치돼 있지 않은 편"이라고 설명했다.

에콰도르에서 멕시코로 재이민왔다는 김영태(49)씨는 "남미 경제가 안정적이지 않다보니 철새처럼 이 나라 저 나라로 이동하며 소위 보따리 장사를 하는 중남미 한인 이민자들이 많다"며 "그러다보니 한탕주의도 많아져 멕시코 시민들 사이에서 한인에 대한 인상이 좋지 않다."고 전했다.

실제로 지난 2004년 11월 멕시코 한 유력 일간지에는 한국에서 중국산을 몰래 수입해 판매하다 적발되는 한인 케이스를 보도, 논란을 빚기도 했다.

 멕시코, 조기교육 중간 기착지

멕시코시티에서 만난 최영희(48,대전)씨는 '기러기 엄마'다. 그녀는 영국계 국제학교 켄트고등학교 1학년에 다니고 있는 아들 이대호(18)군을 만나기 위해 작년 초 멕시코시티를 방문했다.

멕시코 물가가 낮기 때문에 한국에서 보내오는 돈으로 충분히 생활할 수 있지만 조금이라도 돈을 아끼기 위해서 최씨는 최근 하우스를 월세로 얻어 하숙을 시작했다. 최씨의 생활비는 월 2700달러 정도. 대부분 이군의 학비와 집값으로 지출된다.

최씨는 "유학생은 공립학교를 입학할 수 없어 사립을 다니는데 학원비까지 합쳐서 학비지출이 꽤 큰 편"이라며 "그렇다고 해도 한국에 비하면 교육비가 엄청 싼 편이라 불만은 없다."고 말했다.

이군이 멕시코에 유학온 것은 2년 전. 최씨는 중남미에 살고 있던 여동생 부부로부터 스패니시 발전 가능성을 듣고 아들을 이곳에 유학보내기로 결심했다.

이군의 학교 스케줄은 빡빡하다. 오후1시30분에 학교 정규 수업이 끝나면 집에 돌아와 점심먹고 숙제를 마친 뒤 오후6시부터 영어학원에 다닌다. 이군이 영어를 배우는 이유는 단 한가지. 언젠가 도착할 미국에서의 생활을 준비해야 하기 때문이다.

최씨는 "물론 스패니시를 배우는 것이 중요하지만 기회가 된다면 교육이나 생활면이 훨씬 나은 미국이나 캐나다로 보내고 싶다."며  "그렇기 때문에 영어공부를 소홀히 시킬수 없다."고 솔직히 털어놨다.

멕시코가 새로운 유학지로 떠오르고 있다. 미국.캐나다보다 비용이 덜 들고 나중에 북미지역 대학으로 입학할 수 있는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멕시코 한인들에 따르면 대부분의 한인 유학생들이 2~3년 과정을 마치면 미국이나 캐나다 대학에 입학원서를 넣거나 전학을 시도한다. 따라서 대부분의 유학생들은 스패니시와 함께 영어를 배우는 형편이다.

이로 인한 문제점도 생기는 것으로 나타났다.

멕시코시티 한인회 관계자는 "스패니시도 힘든데 영어공부까지 해야한다는 스트레스로 힘들어하는 한인 학생들이 꽤 있다."며 "학교수업을 제대로 따라잡지 못하면 여기서도 대학 입학이 어려워 한국으로 되돌아가기도 한다."고 전했다.

멕시코 시티 이광식 한인회장 인터뷰

"탄탄한 한인 이민사회로 성장하고 멕시코 주류사회에 한인에 대한 이민지를 새롭게 심어주는 것이 목표입니다."

지난 해 7월 멕시코시티 한인회장으로 취임한 이광식 회장(48)은 "멕시코 한인 이민사회를 새로 정립하는 일이 가장 힘들다."는 말로 인터뷰를 시작했다.

곧 떠난다는 생각으로 영주권이나 시민권 없이 불법체류하고 있는 한인들이 많다보니 멕시코 한인들 사이에서 정체성 찾기가 어려운데다 한인회 운영도 힘들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오는 5월6일부터 멕시코 시티에서 열리는 '멕시코 한인 100주년 행사'도 한인 커뮤니티 위주보다는 멕시코 주류사회를 대상으로 준비하고 있을 정도라고 밝혔다.

"미국이 테러사건 이후 국경감시를 강화하면서 멕시코 경기가 많이 침체됐다."고 전한 이 회장은 "이번 행사가 이민자 자녀들이 제도권 사회에 진입하는 기회가 되고 한인에 대한 주류사회의 이미지도 개선돼 한인 커뮤니티의 경제활성으로 이어졌으면 하는 바람"이라고 말했다.

한인1세으로는 드물게 스패니시가 유창한 이 회장은 본국에서 대학을 마치고 멕시코로 유학, '인스티뚜또 데 떼끄'(ITAM)에서 경영학 석사과정을 마쳤으며후 멕시코주립대학에서 4년동안 국제무역 및 마케팅 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현재 멕시코시티에서 잡화점과 보험회사를 운영하고 있다.



6. 조국을 그리는 후손들

<2005년5월3일 A-15>

한인 후손회 이끄는 3세대 3인

멕시코로 떠난 한인 이민역사는 벌써 6세대까지 내려오고 있다. 식품점 등 상업에 주로 종사했던 1~2세의 이민생활에서 벗어난 한인 후손들은 높은 교육수준을 바탕으로 의사,회계사,교사 등 전문직종에 종사하며 멕시코 주류사회로 진입하고 있다. 이미 언어와 종교, 생활문화 등 모든 영역에서 현지화가 이뤄진 이들에게 한인에 대한 정체성을 찾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멕시코에서 만난 한인 후손들에게 한인이라는 정체성을 심어주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이 있다. 율리세스 박(64,메리다), 다빗 김(67,멕시코시티), 페르민 김(44.티후아나). 바로 멕시코 각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한인후손회 회장들이다. 이들은 모두 한인 3세들로, 100년이란 이민역사의 의미와 한인후손들이 겪는 정체성 갈등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었다.

 현재 가장 활발히 움직이고 있는 한인후손회는 한인 이민자들의 첫 정착지인 메리다 한인후손회(회장 율리세스 박). 지난 2월 멕시코에서 처음으로 '멕시코 한인 100주년 행사'를 개막하며 한인 이민자의 정체성을 알리는데 선두자로 나섰다.

 율리세스 박 회장은 '뿌리의식은 굉장히 중요하다. 삶의 이정표를 제시하기 때문'이라고 의미를 설명했다.

 박 회장은 "비록 외모는 멕시칸으로 변했지만 이곳에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한다는 방향을 알려주는 것이 바로 정체성이다. 나는 이곳에서 태어났지만 한인 이민자 후손이라는 점은 내 가족을 살아가게 만드는 힘이 된다"고 강조했다.

 80년대부터 멕시코내 본국기업 진출이 붐을 이룬 후 한국과 멕시코의 경제, 문화적 교류가 늘어나자 그동안 교류가 끊어졌던 멕시코시티 한인후손회(회장 데이비드 김)는 다시 재결성을 시도하고 있다.

 데이비드 김 회장은 "한국 기업이 멕시코 경제발전에 핵심적인 역할을 하면서 한인 후손들 사이에 고국에 대해 자긍심이 일어나기 시작했다"며 한인후손회가 재결성하게 된 계기를 설명했다.

 "궁극적인 목표는 한인 후손들의 중심체가 되는 것입니다. 개인이 각자 흩어져 사는 것보다 함께 모여 한 목소리를 낸다면 이 사회를 위해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멕시코 발전에 한국과 그의 후손들인 우리가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고 역사에 남았으면 하는 것이 내 바람입니다."

 멕시코시티 한인후손회는 현재 1세 한인회 사무실을 함께 사용하며 업무를 보고 있다. 김 회장의 주요 업무는 91년 마지막으로 발행됐던 한인후손회 주소록을 확인하는 작업이다.

 김 회장은 "10년이 넘게 시간이 흘러서 전화번호와 주소가 바뀐 이들이 많아 흩어져 있는 한인 후손들을 찾고 이들과 재연락하기가 무척 어렵다"는 어려움을 토로했다.

 한편 에네켄 농장을 떠나 한인1.2세들이 상업을 시작하며 경제적 부를 일구는 터가 됐던 멕시코 국경지역 티후아나 한인후손회(회장 페르민 김)의 경우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한국 배우기 움직임이 확산되고 있다.

 한인 4, 5세대에 해당하는 신세대들은 굳이 한인이냐 멕시코인이냐를 따지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이 두 그룹 모두에 속해 있다는 현실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곤 한다. 문제는 한국을 모른다는 것이다. 당연한 결과지만 한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갖는 것도 쉽지 않다.

 이 때문에 오는 6월 티후아나에서 열리는 멕시코 한인 이민 100주년 기념행사도 젊은 후손들이 중심이 돼 진행될 예정이다. 메리다 지역에서 열렸던 행사가 이민 선조들을 기념하는 행사였다면 티후아나는 차세대를 위한 잔치인 셈이다.

 "성장시기엔 한인보다는 멕시칸으로서 살아왔지만 이번 100주년 행사를 통해 내 자신과 가족사를 처음으로 돌아봤다"는 페르민 김 회장은 "한인이라는 뿌리의식이 멕시코에서 멕시코-한인으로 당당히 살아가도록 나를 변화시켰다"고 전했다.

 "내가 찾은 "한인이라는 뿌리의식"은 멕시코에서 멕시코 한인으로 당당히 살아가도록 만들었다"는 김 회장은 "나의 경험을 내 후손들에게 물려주는 것이 앞으로 다가올 100년을 준비하는 남은 후손들의 임무"라고 강조했다.

한인후손회 회장 3명 프로파일

율리세스 박(메리다 한인후손회)

 메리다 지역에서 동생과 함께 주방기구 공장을 운영하고 있는 지역 유지. 메리다 에네켄 농장에서 태어난 전형적인 이민자 가정 후손 3세. 현재 메리다 한인 후손들의 정신적 주춧돌 역할을 하고 있다. 그의 외할아버지는 메리다 한인회 초기시절 간부로 활동하던 이종호씨다.


 페르민 김(티후아나 한인후손회)

 한인3세 치과의사이자 개인 옷가게도 운영하는 재력가. 지난 메리다 지역에서 열린 멕시코 한인 이민100주년 행사에 무려 100명이 넘는 회원들을 끌고 오는 리더십을 발휘한 차세대 한인 후손이다. 현재 티후아나한인회는 매달 정기모임을 개최하며 한인 후손들의 단결을 꾀하고 있다.


 다빗 김(멕시코시티 한인후손회)

 멕시코에 오기 전 한때 독립운동가로 활동했던 김익주씨의 손주인 김씨는 회계사로 성공한 한인3세. 그가 관리하는 회사는 한국기업과 수출계약을 맺은 멕시코 대기업도 많다. 현재 멕시코 한인 후손들을 위한 인명록 작업으로 분주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7. 쿠바로의 이주

<2005년 5월10일 A-15>

"한국말은 못해도 고국을 사랑"

가난한 멕시코 에네켄 농장의 삶이 지겨웠던 한인들은 1921년 쿠바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하면 부자가 될 수 있다는 말에 다시 계약을 맺고 떠났다. 모두 270여명이었다.

 사탕수수 농장 임금이 좋다는 말만 듣고 찾아왔지만 국제 설탕가격의 폭락으로 한인들은 졸지에 실업자 신세가 됐다. 이들은 다시 에네켄 농장을 찾아갔다. 힘들고 고된 삶은 계속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쿠바 한인들은 2~3세들에게 한국 문화를 가르치기 위해 한인들이 몰려 살던 아바나'갈데나스'마탄사스 지방 등 3곳에 한인회를 세우고 학교를 설립해 한글을 가르쳤다. 또 한국의 독립을 위해 군자금을 보아 보내기도 했으며 자식을 대학에 보내는 열심을 보였다.

 지금 쿠바의 한인 후손들은 6세대까지 내려가고 있다. 이들은 의사, 회계사, 엔지니어, 교수 등 전문직에 다양하게 종사하며 당당히 주류사회에서 활동하고 있다. 올가 리디아 림 이(38. 건축설계사)씨도 그 중 한명이다.

 림 이씨는 "사탕수수 농장 이민자로 한인 3세이지만 난 한인"이라며 "비록 말은 하지 못하지만 한국을 사랑한다"고 강조했다.

 84년이 지난 지금 쿠바에 거주하는 한인수는 750여명을 오간다. 정확한 한인수가 집계되지 않는 것은 쿠바정부가 인종 또는 민족간 움직임을 원치 않기 때문이다. 쿠바정부는 한인회 구성도 금지하고 있어 정식 쿠바한인회는 발족되지 않은 상태다. 중국이나 일본 교민회를 허용한 태도와는 대조적이다. 이처럼 보이지 않는 차별대우가 존재하고 있지만 한인들은 모이고 있다. 명절이 되면 가정집에 몰래 삼삼오오 모여 애국가를 부르기도 하고 음식을 나눠 먹기도 한다.

 로니시아 박 김(71)씨는 "지금 이 나이가 돼보니 "피가 물보다 진하다"는 말을 깨닫는다. 정부가 금지해도 또 한국어를 몰라도 한인들끼리 서로 그리워한다"고 전했다.

 쿠바 한인들의 단결력은 이민 초창기에서도 찾을 수 있다. 멕시코에서 쿠바로 도착한 한인들은 일본인으로 취급하려는 쿠바정부에 대항해 무국적자로 남기를 고집, 항구에서 17일동안 정박당하는 어려움을 겪었다고 후손들은 증언했다.

 파블로 박(67. 한국명 박금성)씨는 "일본 국적은 갖기 싫다는 부모 때문에 쿠바에서 국적없이 살아야 했다"며 "여권이나 정부가 발행한 서류가 없기 때문에 학교가는 것도 힘들었고 아파도 정부의 혜택을 받을 수 없어 병원은 가지도 못했다"고 당시 한인들의 생활모습을 들려줬다.

 지금도 쿠바 한인들의 생활은 매우 어렵다. 사회보장제도로 의료, 교육 등은 걱정할 필요가 없지만 전문직 종사자라 해도 한달 10달러를 벌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문화나 여가생활은 꿈도 꿀 수 없다는 것이 이들의 증언이다.

 지난 2월 멕시코 메리다에서 열린 멕시코 한인 이민100주년 행사에 참석했다 멕시코시티로 밀입국하며 자취를 감춘 쿠바 한인 케이스도 쿠바의 경제적 어려움을 단적으로 증명해주고 있다.

 보이지 않는 차별과 경제적 어려움 속에서도 쿠바 한인들은 멕시코 한인 이민100주년 행사를 준비한다.

 오는 6월6일부터 9일까지 한인들이 처음 도착한 엘볼로 농장에서 기념행사를 갖고 마나티 항구에 기념비를 세운다.

 쿠바한인회를 이끌고 있는 헤로니모 임(78)씨는 "한국어는 모르지만 쿠바의 한인들은 모두 한국의 피가 흐르는 후손들"이라며 "이들에게 선조들의 사랑과 땀, 눈물과 희망을 알려주고 싶다"고 밝혔다.

헤로니모 임 쿠바한인회장 인터뷰

쿠바 출생. 피델 카스트로와 아바나대 법대 동기. 메달을 12개나 갖고 있는 공산당 창단 멤버. 전 쿠바산업부 식품청장(차관급). 현 쿠바한인회장.

쿠바의 정계에서 활동했던 한인 3세 헤로니모 임(78. 한국명 임은조)씨의 약력이다.

그도 멕시코 메리다 에네켄 농장 이민자의 후예다. 그의 아버지는 쿠바에서 조국 독립운동에 헌신한 공로로 1997년 국민훈장 동백장에 추서된 임천택(85년 작고)씨. 임씨는 1921년 멕시코 농장에서 혹독한 노예 이민생활을 끝내고 다른 한인들과 함께 쿠바 남부 마탄사스와 카르데나스의 사탕수수 농장에 계약노동자로 떠났다.

그의 장남 헤로니모 임씨는 1926년 마탄사스의 에네켄 농장에서 노역하던 와중에 태어났다. 쿠바 한인 최초로 아바나 법대에 입학했다는 소식은 메리다와 쿠바 한인들의 주머니를 열게 했고 가정형편이 힘들었던 헤로니모 임씨는 그 돈으로 입학금을 냈다고 한다.

1946년 아바나대 법대에 진학한 뒤 49년부터 10년 동안 같은 학과 동기생인 피델 카스트로 국가평의회 의장과 도시게릴라 활동을 펼치는 등 사회주의 직업 혁명가로 활동했다. 1959년 혁명 후 경찰공무원으로 입문해 산업부 차관을 지냈고 88년 퇴직 후에는 아바나 인근의 소도시 키테라스시장 선거에 출마해 당선되기도 했다.

쿠바의 혁명영웅인 체 게바라가 산업부장관을 지낼 당시 차관으로 4년 동안 함께 일했고 지금도 아바나 델 에스테 지역 위원회를 주도하는 등 쿠바의 대표적인 국가원로로 꼽힌다.

그런 그가 지금은 과거를 후회하고 있다.

임씨는 "과거 카스트로 정권을 지지했던 것은 젊은 시절 혈기가 많았기 때문"이라며 "지금은 자유와 인간의 창조력을 잃게 만드는 시스템이 싫다"고 말했다.

지금은 쿠바 한인 후손들에게 정체성과 문화를 물려주기 위해 앞장서고 있는 임씨는 "할아버지 세대가 떠나왔던 한국은 하나의 나라였다"며 "이제는 통일과 민주주의를 위해 남은 생을 살고 싶다"고 전했다.

한편 임씨는 "한인들도 많지 않은데다 흩어져 살고 있어 한인들을 대하지 못하는 까닭에 자녀들에게 정체성을 알려주기가 쉽지 않다"고 어려움을 털어놓으며 한국어 교육이나 음악을 가르칠 수 있는 교재나 동화책 등의 도움을 요청하기도 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