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러 양다리 내마음 둘 곳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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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러 양다리 내마음 둘 곳은...
  • 김승력
  • 승인 2005.12.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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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블 에트랑제] ‘포근한 정’ 포장마차 그리워져

   
▲ 김승력

.서울생
.97년 러시아 이주
.우수리스크 사범대학 한국어과 강사
.동북아평화연대 연해주 사무국장
30대를 러시아에서 다 보내리라고는 꿈도 꾸지 못했었다. 한도 끝도 없는 대평원의 길 위를 하루 종일 달리다보면 낯선 이 땅과 전생에 무슨 풀지 못한 악연이 있어 이러고 있나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한다.

어느새 러시아 생활에 익숙해져 딱딱한 러시아 빵을 잘라 버터와 치즈를 능숙하게 발라 입에 넣으면서도 머리속으론 된장찌개, 자장면 생각이다. 인간의 본성 중에 살면서 가장 변하지 않는 것 중에 하나가 먹성이란 걸 외국생활을 오래 하다 보면 깨닫게 된다.

어쩌다 한국에 나오게 되면 나는 허겁지겁 자장면부터 시켜 먹는다. 저녁엔 허름한 포장마차 불빛아래서 소주 한 잔하고 편한마음으로 밤늦게까지 거리를 산책한다.

한국에서만 살았으면 잘 모른다. 전화 한 통 이면 불과 십 여분 내에 음식이 코앞까지 배달되는 게 얼마나 신기한 일인지, 마음 편하게 술 한 잔하고 늦도록 거리를 배회해도 안전하다는 것이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

러시아는 배달서비스란 게 거의 없다. 손수 차려 먹든 식당에 가야한다. 식당에 가서도 한국처럼 손님은 왕 대접을 받을 생각은 접어두는 게 좋다. 소 닭쳐다보듯 무성의한 종업원의 태도에 일단 식욕부터 잃을 테니까. 식사 시간도 넉넉하게 시간 반 정도는 잡아야 한다.

빨리 먹고 나올 생각을 했다면 차라리 굶는 게 속이 편하다. 음식이 너무 더디게 나와 배를 채우기도 전에 복장이 먼저 터져버리고 만다. 기다리는 여유가 있어야 한끼 점심을 먹을 수 있다는 게 익숙하고 편해질 무렵에야 러시아란 나라를 조금 이해할 수 있었던 것도 같다.

또 한국이 정말 좋은 나라구나 느낄 때가 늦은 밤거리를 혼자 취해 거닐 때다. 아무리 늦은 밤이라도 식사를 할 수 있고 쇼핑을 할 수 있을 때다. 러시아에서는 저녁 8시 정도면 거의 모든 상점이 문을 닫는다. 시끄러운 술집에서 술을 마시는 일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다. 어쩌다 혼자 술에 취해 걸어서 늦은 귀가를 해야 되는 상황이 된다면 조금 과장해 말해 목숨을 거는 일이다.

시청 보건국장을 하는 러시아인 친구가 자기는 ‘금요일부터 일요일 저녁까지 절대 밖에 나가서 술을 마시지 않는다’며 내게도 그렇게 하길 진정으로 걱정해 주었던 적이다. 주말을 쉬고 월요일 출근하면 응급실 사건 사고를 보고받는데 인구 18만의 작은 시에서 술 때문에 밤새 죽거나 다치는 끔찍한 사건 사고가 항상 일어나고 그걸 자신이 처리하기 때문이란다. 그렇다고 러시아에 대해 지레 너무 겁먹을 필요까지는 없다. 러시아도 사람이 사는 모습, 인정은 매 한가지다. 도를 지키며 살면 위험에 처할 일은 없으니까.

이제 한국에 나와 있으면 연해주가 그립고 연해주에 있으면 한국이 그립다. 마음이 어느 한곳에 정착하지 못한 탓이기도하려니와 이미 두곳을 다 사랑하는 탓이기도하다. 어느 날은 한국과 러시아 양쪽에 근거지가 있으니 남들보다 부자인 듯도 싶고, 또 어느 날은 양쪽 다 살붙일 곳이 없는가 싶어 허전해지기도 한다. 더블에트랑제의 삶이 이런건가 보다.

오늘 밤은 함박눈이나 펑펑 내렸으면 좋겠다. 모질게 매운 연해주의 눈보라 말고 대한민국 12월의 포근한 함박눈이나 실컷 맞으며 밤늦도록 거리를 쏘다녀보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