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따따...따따...랄랄라라” 평생을 음악속에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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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따따...따따...랄랄라라” 평생을 음악속에 살고 싶다.
  • 유자나무
  • 승인 2005.12.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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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아 주 ‘New Atlanta Philharmonic’ 지휘자 유진 리

   
<유자나무가 만난 사람: 오케스트라 지휘자 이 성철(Eugene Lee)>

지난 11월 초 유자나무 본 기자가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기자교육 중 미국 아틀란타 동아일보 기자 자격으로 온 이성철씨를 만나 특이한 그의 얘기를 듣고 그 자리에서 인터뷰를 하기로 했다.

늦은 나이인 91년 한세대 음대에 수석입학 해 95년 수석졸업(작곡 전공)으로 끝내고 도미전인 98년 예술의 전당에서 소래기 챔버 오케스트라 객원 지휘했다. 다채로운 그의 이력은 대학 재학시절인 자신이 창단한 세미-프로 합창단인 서울 도쏠콘서트콰이어 지휘자(‘91-‘98)로 제 25회 난파 음악제 우수상을 수상했으며 일본에서 한국인의 연주가 전무했던 시절인 92년부터 97년까지 매년 2차례씩 총 14회의 초청 순회연주회를 일본 도쿄, 오사카, 고베 등에서 가지며 한국인의 음악 파워를 과시했다.

지난 96년에는 이스라엘과 이집트 등에서 열린 JC 2000 페스티발에 참가, 지휘했다. 또 97년 일본 동경의 신주쿠 문화센터에서 박인수, 김성길, 이규도 교수 등과 일본의  유명 오페라 가수들이 출연하는 2002년 한일 월드컵 축하기념 갈라콘서트에 초청되어 몸집답지 않게(?) 쉴새 없이 세계를 누비며 연주에 몰두했다. 

그러나 그에게도 시련은 있었다. 98년 3월 지휘자자격으로 미국에 입국했으나 영주권이 바로 나오지 않았다. 풀 타임 일을 찾을 수도 없었고 생계도 문제였다. 이대로는 안될 것 같아 방법을 찾던 중 무작정 인근의 고등학교를 방문, 지휘자 자리를 구하러 다녔다.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한국에서 찍어 온 연주했던 사진들을 손에 들고 교장을 만났다. 그러자 이번엔 교장이 오히려 당황해 했다. 더구나 얘기하다 보니 고등학교라고 생각한 학교는 다름아닌 중학교 였다. 영어가 짧은걸 어쩌겠나. 이미 의자에 앉아 시작한 얘기를 없었던 일로 하자기도 뭐하고 짧은 영어로 자신의 지휘 경력을 얘기했다. 그러자 놀랍게도 교장이 그 자리에서 고등학교 한군데를 소개시켜 주는 것이 아닌가. 미국 도착한 지 겨우 3주째 얘기다.

댄싱가수 클론과 영화배우 박중훈이 도와줬다?
애틀랜타 부촌에 위치한 던우디 하이스쿨. 그가 미국에 온지 3주만에 지휘를 한 학교이다. 음악 수업이 시작되자 틴 에이저들의 질문이 쏟아졌다. 예민한 백인 고등학생에, 사춘기 아닌가. 영어 못하는 동양인을 우습게 볼 수밖에. 황당했다. “좋다. 난 지휘자다.” 그의 두뇌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영어가 갑자기 됐다는 얘기가 아니다. 한국 댄싱그룹 클론이 생각났다.

“꿍따라 사바 빠빠빠빠...” 거기에 옛날 모 맥주회사 광고로 히트친 영화배우 박중훈의 구음 멜로디도 그를 도와주었다. “랄랄라, 랄랄라...” 영어대신 그의입에서 쏟아지는 멜로디는 훌륭한 언어였다. 

아이들의 반응이 나쁘지 않았다. 국제어(?)였기 때문이다. 점점 자신감이 생기면서 분위기가 무겁다 싶을 땐 이태리 가곡도 불러주고 독일어 노래도 한 곡조 뽑았다. 학교에서 인기가 올라가기 시작했으나 영주권이 없어 사례비를 못받는 자원봉사자에 만족해야 했다. 이도 생계를 위해 택한 다른 일들로 인해 가까스로 2년이 채 되기 전에 그만두어야 했다. 진짜 해야 할 것이 있기 때문이었다.

일년에 1,200명 인터뷰했다
가족도 있고 생계는 유지해야 하기에 샌드위치샾, 사무실 청소, 영어학원강사 등을 전전하며 1년을 보내야 했다. 그러다 99년 5월 신문사로 자리를 옮겼다. 그는 몸으로 때울 수 있는 것은 다 할 수 있다라고 작정. 인터뷰를 시작했다. 일년에 약 1,200명 정도가 그와 인터뷰했다고 한다. 또 기사량도 일 주일에 최고 33건을 작성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 인터뷰를 밑천으로 2001년 1월 한국인을 중심으로 14명의 단원을 모집해 오케스트라를 창단했다. 이름하여 ‘Peach Prime Orchestra’. 조지아주 상징이 Peach(복숭아)였기 때문이다. 창단공연은 미국교회에서 했다. 그리고 같은 해가 저물기 전에 10회의 공연을 해냈다.
그 해에 황당하고 인생역전의 사건이 생겼다. 2001년 8월 16일 광복절음악회를 결정했다. 자비 행사였다. 안익태의 코리안 판타지를 공연하기로 했으나 오케스트라 14명으로는 턱없이 부족했다. 이곳 저곳 교섭 중 미국인 전문 단원들을 보강해 오케스트라를 60명으로 증원 시켰다. 신바람이 났다. 원하는 것을 한번에 얻었기 때문이다. 

“네가 필요하면 나도 너 꼭 도와준다.”
그러나 세상에 거저는 없었다. 그만 잠 못 이루는 사건이 터지고 말았다. 도와준다던 한인합창단이 무슨 연유인지 공연 포스터까지 이미 인쇄되었는데 3주 전에 취소통보가 왔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머리가 아찔했다. 어쩔 것인가. 재차 연락을 취해봤지만 도와줄 수 없단다. 그러나 그가 누군가. 다시 발로 뛰기 시작했다. “왜 안돼.” 그것이 그가 믿는 모토였다. 그는 한국인 대신 미국 합창단 쪽으로 눈을 돌렸다. 로컬 합창단 ‘Chorale Guild’에 연락했다. 뉴욕 카네기 홀에서 공연한 경력있는 그룹이었다.

사정얘기를 했다. ‘돈이 없어 사례는 못하겠다. 하지만 연주만큼은 자신있다” 그러자 합창단의 지휘자인 Philip Shoultz 는 “같은 지휘자로서 흔쾌히 도와주겠다”고 말했다. 바로 가서 그를 만났다. 그리고 내친김에 한가지 더 부탁했다. 노래를 한국말로 부탁한다고. 한국사람 친구도 없던 그 지휘자 입을 딱 벌렸다. 이성철(유진 리)씨는 사정을 했다. 안익태의 코리아 판타지는 한국말로 불러야 한다고. 그도 안익태는 알고 있었다. 머뭇거리는 그에게 한마디 던졌다. “네가 필요하면 나도 너 꼭 도와준다.”

나도 울고 너도 울고 미국인 합창단도 울고
드디어 공연 날. 이번엔 공연장에 들어온 청중들이 황당해했다. 포스터에는 소규모 그룹의 연주그룹과 한인 합창단 얼굴이었는데 와서 보니 60명의 한미합작 오케스트라 단원과 무대에는 자그마치 100명의 서양합창단이 서있었기 때문이다. 공연이 시작되고 무대에선 서양합창단의 한국어 코리아 판타지 곡조가 흘러나왔다. 감동한 객석의 청중들이 여기저기 울기 시작하고 지휘자인 그도 울고 미국인 합창단들도 그 청중의 모습에 그만 울고 말았다. 그 사건이 그대로 커뮤니티에서 뜨고 말았다. 그의 열정과 용기가 ‘무’에서 ‘유’로 바꾸어놓은 것이다.

2003년에는 ‘이민100주년기념사업회’ 주최로 이민 100주년 공연을 하게 됐다. 2차례의 공연으로 나누어 열린 이 공연에서 첫번 공연은 줄리아드에서 장영주를 키운 명교수 도로시 딜레이를 사사하고 100 대 1의 경쟁을 뚫고‘애틀랜타 심포니 오케스트라’에서 부악장으로 부임한 한국인 헬렌 김이 멘델스존 바이올린 협주곡을 협연과 브람스 4번 교향곡이 이씨의 지휘로 열렸다.

두번째 공연 역시 이씨의 지휘로 귀넷코랄길드와 카톨릭 ‘Christi Corpus’ 합창단 100명이더 합류해, 서양 합창단 200 명과 90 여명의 오케스트라가 베토벤 9번 교향곡인 “합창”을 연주했다. 커튼 콜로 애국가가 또 한번 선사 됐다. 이날은 관객 1,000 여명 중 700여명이 미국인 관객이었다. 한국인 300명을 위해서 200명의 서양합창단이 무대에서 애국가를 불러준 것이다.

2002년 ‘New Atlanta Philharmonic’로 이름도 바꾸고 72명의 미국인 전문 단원으로 재구성 (한인인 그를 포함해 6명뿐이다)하고 36회의 정기 연주회를 지휘해 오며 연 6회의 정기연주회를 개회해오고 있다. 

그러나 아직도 오케스트라 재정은 그 동안 안면 있던 한인 동포들의 성금과 펀드레이징, 그리고 그이 주머니에서 나온 자비로 운영된다. 그를 인정해주는 신문사덕분에 그는 기사만 보내주고도 풀타임으로 인정 받는다. 그래서 가게에서 일도 하고 글도 쓰고 펀드레이징도 하고 연주도 하는 열정투성이(?)의 그런 멋진 지휘자이다.

그는 내년 1월 조지아주립대 대학원 진학, 지휘를 또 공부하기에 더욱 바빠질 예정이다.
 마이클 파머 교수(미국의 5대 지휘자 중 한 명)가 지난해 애틀랜타로 이주해왔기 때문에 이런 좋은 기회를 마다할 리가 없다. 현재 이성철씨는 그를 가장 잘 이해해주는 아내 숙희씨와 한국에서 출생한 지은(9살), 미국에서 출생한 가은(6살)이와 함께 오손도손 잘 살고 있다.

그에게 성원을 보내려면 이메일: yizart@yahoo.com 전화(조지아주)404-259-6711로 연락하면 된다.

사진 글 이언주 기자 (정리 정병학)
yooja_ej@yaho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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