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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오 구경은 잘 하셨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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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오 구경은 잘 하셨습니까?"
  • 조선일보 브라질지사
  • 승인 2003.05.3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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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오(Rio) 구경은 잘 하셨습니까?"

문희상 대통령 비서실장님, 브라질 방문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지구 반대편까지 먼 길을 오시느라 대단히 힘이 드셨을줄 압니다. 직접 만나뵙지 못하고 이렇게 지면을 통해 인사드리게 돼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이번에 아르헨티나 대통령 취임식 참석을 위해 노무현 대통령의 특사 자격으로 오셨다지요. 그리고 돌아가시는 길에 지난 26일 오후 5시 무렵 히오에 도착해 이틀밤을 보낸 뒤 28일 아침 11시경 쌍파울로에 오신 것으로 압니다. 곧이어 이날 밤 비행기로 귀국하신다고 들었습니다.
그래 히오에서는 편안한 시간을 보내셨는지요? 과거에도 한차례 브라질을 다녀가신 적이 있다 하니 전혀 낯설지는 않았으리라 짐작됩니다. 예수 동상이 우뚝 선 꼬르꼬바두 정상에서 바라본 아름다운 해변의 정취가 국정수행의 한 축을 담당하느라 지친 몸을 잠시라도 쉬게 해드렸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대한민국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또 교포의 한 사람으로서 이번 방문에서 뭔가 잊으신 것이 없는지 묻고 싶습니다. 무슨 소린가 하시겠지만, 잠시동안만 시간을 허락해 주시기를 청합니다.
실장님께서는 우리의 조국 대한민국의 국가원수를 최측근에서 보좌하는 분입니다. 그래서 나라 돌아가는 사정을 누구보다 잘 아실 것이고, '한국호(號)'의 방향타가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자세하게 일러줄 수 있는 분으로 생각이 됩니다.
다른 지역도 마찬가지겠지만, 요즘 브라질 교포들은 한국의 상황에 대해 많은 우려를 하고 있습니다. 새 정부가 출범한지 채 100일도 안돼 갈팡질팡하는 모습을 멀리서 듣고 보면서 안타까운 마음을 표시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심지어 "한국 뉴스는 짜증이 나서 보기도 싫다"고 말하는 교포도 많습니다. 실장님께서 아르헨티나에 이어 브라질에 오신다는 말을 듣고 이왕 걸음을 하신 김에 이런 갈증을 다소나마 풀어주기를 기대했었습니다. 바쁜 일정이지만 어렵게라도 시간을 내서 교포들에게 '참여정부'의 의미를 설명하고 지향하고자 하는 바를 알려주어 조국에 대한 믿음과 애정을 확인하는 시간이 마련되기를 바랬던 것입니다. 지난번 노무현 대통령께서 미국을 방문했을 때 교포들에게 "이중국적 문제를 긍정적으로 검토하겠다"고 말씀하신 부분에 대해서도 궁금해하는 교포들이 많구요.
하지만 애석하게도 이런 기대는 헛된 것이었나 봅니다. 실장님께서 브라질에 오시는 날짜나 일정에 대해 무슨 이유에선지 총영사관은 전혀 알리지를 않더군요. 나중에 물으니 단순히 경유지이기 때문에 공식일정이 없어 알리지 않았다는 설명만 되풀이하면서요.
이 설명대로 브라질을 단순한 경유지로 생각하고 공식일정을 잡지 않으셨다면, 한인타운이나 한국학교는 무엇하러 둘러보시고 만찬은 왜 하셨는지 궁금합니다. 얼마전에도 한국에서 몇몇 국회의원들이 다녀갔습니다만, 그 때도 실장님께서 이번에 하신 일과 똑같은 일을 하고, 똑같은 곳을 방문하고 갔습니다. 어쩌면 이렇게도 녹음테이프 틀 듯 하는지 신기하기만 합니다.
들리는 말로는 총영사관측이 교포언론과의 간담회를 마련하려 했으나 실장님측에서 "필요없다"고 하셨다는데, 맞습니까? 아니면 총영사관측에서 실장님의 피곤한 여행일정을 고려해 일부러 이런 자리를 만들지 않은 것인지요?
전자(前者)가 사실이라면 실장님은 교포들에게 큰 실례를 범하신 것이라고 감히 말씀드립니다. 교포들도 엄연히 대한민국 국민인 이상 나라의 운명을 좌우할 수도 있는 정부의 정책방향을 알 권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다른 사람도 아닌 대통령 비서실장으로서 교포들이 갖고 있는 궁금증을 조금이라도 풀어주고 걱정을 덜어주는 역할을 마땅히 하셨어야 했다고 봅니다. 이 점을 소홀히 하셨다면 "그냥 놀다 가게 놔두지 뭐!"라는 일부 교포들의 비아냥을 감수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교포들 중에도 '참여'하고 싶은 사람들이 많다는 점을 헤아려 주시기 바랍니다. 후자(後者)의 경우라면 총영사관이 또 다시 교포들을 무시하는 행태를 되풀이한 것으로 이해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교포들에게 정부의 입장을 알릴 수 있는 좋은 기회를 공관 스스로 저버렸다고 질책도 한번쯤 하시구요.
실장님께서는 혹시 총영사관 관저에서 공관원과 교포원로, 교포단체장 등 30여명을 초청해 만찬을 하는 것으로 대신한다고 말하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한인 이민사가 40년을 넘어 성숙단계에 접어들고 있으며...1.5세와 2세들이 주류사회에 많이 진출해 브라질 사회로부터 인정을 받는 등 한인들의 위상을 높이고 있으며..."하는 말들이 오갔으리라 쉽게 짐작이 됩니다. 이런 말들이 얼마나 공허한 것들인가는 실장님께서도 잘 아시고 새겨 들으시리라 믿습니다. 또 만찬석상에서 실장님께서 아무리 '참여정부'의 전도사 역할을 하시더라도 그 말은 자리가 끝나기 무섭게 묻혀버릴 것입니다. 교포사회에 말썽이 생겨도 움직이지 않는 공관원, 평소에는 무슨 일을 하는지 보이지도 않다가 넥타이 차림으로 생색나는 모임에나 나타나는 행사용(?) 단체장들과 함께 찍은 기념사진만 남겠지요.
고교 동창인 교포 한분을 특별히 실장님 옆자리에 모셔서 교포사회의 이모저모를 들으신다고 하더군요. 정말로 이렇게 하면 교포사회의 모습이 낱낱이 들리리라고 생각하셨습니까? 오랜만에 동창생을 만나 우정을 확인하거나 회포를 푸실 요량이라면 차라리 따로 자리를 마련하셨던 것이 낳지 않았을까 합니다.
송구스러운 말씀이지만 실장님께서 브라질에 오시면서 찾아갈 곳은 히오가 아니라 브라질리아가 아니었던가 합니다. 자주 찾기 힘든 먼 곳에 오시면서 미리 준비가 됐다면, 대통령 비서실장으로서 브라질 정부요인을 만나는 시간을 가지는 것이 교포들이 보기에 훨씬 더 자랑스러운 모습이고 국익에도 보탬이 되는 일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 때문입니다. 이런 일이 불가능했다면 쌍파울로에서 교포들과의 만남에 시간을 더 할애하시던지, 아니면 말 그대로 일체의 공식일정없이 조용히 계시다가 귀국하실걸 그랬습니다.
말못할 어떤 사정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이 자리를 빌어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은 실장님의 방문에 걸었던 기대감이 컸던 탓이며, 잘 모르고 언급한 부분이 있다면 교포사회 내의 커뮤니케이션에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요즘 브라질 교포들은 최악의 경기침체로 의기소침해 있습니다. 하루 하루 전해지는 한국소식은 가뜩이나 어두운 마음을 더욱 가라앉게 만들고 있습니다. 얼마전 권병현 재외동포재단 이사장이 프랑스의 시인 마리 로랑생의 싯구 가운데 "버려진 여자, 떠도는 여자, 죽은 여자들 보다도 '잊혀진 여자'가 가장 불쌍하다"는 구절을 인용해 우리 재외동포들이 '잊혀진 여자'가 되고 있다고 글을 쓴 적이 있습니다.
모처럼 조국의 대통령 비서실장님께서 오신 김에 신문지상을 통해서라도 교포들과의 살가운 만남이 있었다면 이들에게 작은 위로가 되지 않았을까 다시한번 생각해 봅니다. 편안한 귀국길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김재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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