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쓰는 독립운동列傳]Ⅳ미주편-1. 하와이의 이방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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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쓰는 독립운동列傳]Ⅳ미주편-1. 하와이의 이방인
  • 경향신문
  • 승인 2005.09.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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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2005-09-19 17:45]
현재 한국인 소유의 카후쿠 사탕수수 공장 건물은 ‘이민유적지’로 지난해 말 철거후 폐허상태이다. 왼쪽사진은 철거전 모습.

해외 항일운동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곳이 미주 지역이다. 이중 하와이는 미주지역 한인 이민의 시발점이자 미주 독립운동의 전초기지였다. 한말과 일제강점기 자의반 타의반으로 이역만리로 떠난 초기 한인 이민들은 저임금과 고된 노동에 시달리면서도 임금의 상당 부분을 독립운동자금에 보탰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과 이봉창·윤봉길 의사의 의거도 미주 한인들의 재정지원이 뒷받침됐기에 가능했다. 안창호·이승만 등 거물급 독립운동가들이 이곳에서 한인단체를 만들어 조국 독립을 위한 선교·교육·외교활동에 매진했다. 박용만은 무장투쟁운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경향신문은 지난달 미주 항일운동의 전초기지였던 하와이를 찾아 선조들의 뜨거웠던 조국애와 독립열망의 발자취를 확인했다.

기자가 하와이 호놀룰루항을 찾았을 때 항구 곳곳은 정박한 대형 컨테이너선과 대형 유람선들로 차 있었다.

해변의 대명사격인 와이키키 해변에서 자동차로 10~20분 거리의 호놀룰루항 또한 손꼽히는 미항으로 주요 관광코스 중 하나다. 호놀룰루항을 한눈에 굽어볼 수 있는 알로하 타워 주변은 깃발을 들고 무리지어 다니는 일본인 등 관광객들로 붐볐다.

바다를 바라봤을 때 알로하 타워의 왼쪽편 제1~4부두 지역이 당시 이민배가 오가던 곳이다. 1903년 1월13일 새벽 3시30분 대한제국 고종황제의 허락을 받은 첫 공식 집단 한인 이민자 102명이 이곳에 도착했다. 공교롭게도 하와이 왕국이 망한 지 10년째 되던 해였다.

100여년 전 종교의 자유를 찾아 또는 빈곤과 가렴주구에서 벗어나기 위해 이역만리로 떠나온 초기 한인 이민자들은 고된 개척과 정착의 과정에서 국권회복에 대한 열망을 잃지 않았다.

온화한 아열대 기후와 맑고 푸른 하늘 아래 이곳은 ‘지상낙원’으로 불리는 곳이지만 100여년 전 이민배를 타고 들어온 이들 한인에게는 지상낙원도 휴양지도 아니었다.

사탕수수농장에서 힘든 노동과 저임금, 그리고 말이 통하지 않는 농장관리자들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천혜 휴양지의 필수 조건인 아열대 기후와 햇볕을 여과하지 않는 청명한 하늘은 노동의 고통을 가중시켰다.

이들은 1902년 12월22일 일본배 현해환을 타고 제물포를 떠나 일본 나가사키항에서 미국 상선 갤릭호로 갈아타고 들어왔다. 1905년 8월까지 모두 7,200여명의 한인이 호놀룰루항을 통해 하와이로 이민왔다.

이들은 누구였을까? 하와이대 한국학연구소 이덕희 연구원은 “미 이민국 자료에서 초기 이민자 7,200명 중 6,739명의 명단을 확인했는데 부인·자녀와 같이 온 세대주가 363명, 총각이 2,143명, 홀아비가 1,554명, 결혼은 했으나 혼자 온 이가 2,214명(남자)이었다”며 “과부나 남편을 두고 떠나온 용감한 부인들도 꽤 있었다”고 전했다. 이중에는 1908년 3월 샌프란시스코에서 스티븐스를 암살한 장인환도 포함돼 있다. 그는 28세 때인 1904년 호놀룰루에 도착했다.

그러나 지금 호놀룰루항에서 한인들의 자취를 찾기는 힘들었다. 이민기념관 역할을 겸하는 알로하 타워에도 한인 이민기록이나 간단한 표지조차 없는 실정이다.

초기 한인들의 발자취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곳은 사탕수수농장이다. 초기 이민 한인들은 이곳 오하우섬과 빅아일랜드·마우이·카우아이섬 등지의 사탕수수·파인애플 농장에서 하루 10시간, 주 6일씩 일했다. 월급은 15달러 정도였다. 한인들은 이후 열악한 노동조건과 저임금 속에서 간신히 생계를 유지하면서도 임금의 상당 부분을 독립운동자금 모금에 기꺼이 보탰다.

와이알루아 사탕수수 농장에서 거둔 사탕수수를 설탕으로 가공한 공장. 왼쪽 건물은 당시 한인들이 물품을 구입하던 가게다.

광복 때까지 하와이 한인들이 지원한 독립자금에는 사탕수수농장 임금뿐 아니라 자영업과 기타 활동으로 벌어들인 돈이 포함돼 있었다. 한인들의 성장과 이들이 지원한 독립운동자금의 원천은 결국 사탕수수농장에서의 노동이었다. 이 때문에 사탕수수농장 노동은 하와이 내 한인독립운동을 대표하는 상징어가 되었다.

1903년 1월 도착한 최초 이민자들은 호놀룰루항에서 검역과 통관절차를 거친 뒤 협궤열차를 타고 와이알루아 사탕수수농장으로 향했다. 호놀룰루에서 자동차로 2시간가량을 달려 찾은 이곳은 폐허였다. 농장 입구와 주변은 철제 차단막과 철조망으로 둘러싸였고 차단막 주위에는 소파와 가전제품 등이 버려져 있었다.

이곳 농장에서 거둔 사탕수수를 설탕으로 가공한 와이알루아 사탕수수공장은 지금은 천연비누공장으로 바뀌었다. 공장 왼쪽편에는 한인들이 물품을 구입하던 가게 자리만 남아 있다.

이곳에서 자동차로 30분 거리인 카후쿠 사탕수수농장도 초기 이주 한인들이 일한 곳이다. 농장의 중심 카후쿠 사탕수수공장은 ‘이민유적지’로 외형이 보존되었으나 지난해 12월 철거되었다. 일본말과 함께 한글로 쓴 ‘이민유적지’라고 쓰인 간판과 우체국만 남아 있었다.

공장터 옆에서 편의점을 운영하며 땅 관리도 함께 맡고 있는 토비 베넷은 “10년 전 한국인이 구입해 소유하고 있다”면서 “하와이 주정부에 돈을 내고 ‘유적지(Historical Site)’ 사인을 받았으나 이곳을 보러 오는 관광객도 많지 않고 유지관리도 힘들어 철거했다”고 말했다.

필리핀계 이주노동자 후손인 조이스 반데리아는 “지난해 말 이곳을 철거할 때 주민들이 모두 나와 안타깝게 지켜봤다”면서 “필리핀인, 한국인, 일본인 등 사탕수수 노동자들의 슬픈 사연을 담고 있는 장소인데 그냥 사라져버려 안타깝다””고 말했다.

미주 이민사와 독립운동사의 중심인 하와이에서 이민 초기 한인들의 발자취는 점차 희미해져 가고 있었다. 이덕희 연구원은 “하와이 한인사회의 힘만으로 한인 이민자들의 유적지를 보존하고 기리기는 벅차다”면서 “국가보훈처나 재외동포재단이 더 큰 관심을 가져주면 좋겠다”고 말했다.

〈호놀룰루|글·사진 김종목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