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요커의 입맛 사로잡은 ‘뉴욕표 한국 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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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요커의 입맛 사로잡은 ‘뉴욕표 한국 음식’
  • 조선일보
  • 승인 2005.09.1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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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요커의 입맛 사로잡은 ‘뉴욕표 한국 음식’
뉴요커 스타일 맞춘 깔끔한 패스트푸드 등 인기…
뉴욕타임스 특집기사 다루기도
뉴욕= 이규현 조선일보 문화부 기자 kyuh@chosun.com
입력 : 2005.09.11 09:49 21'

▲ 화가인 애슐리 호프씨는 뉴욕의 한국 패스트푸드점 '코푸'를 즐겨찾는다고 했다.
뉴요커인 애슐리 호프(29·화가)씨는 맨해튼 첼시에 있는 자신의 화실 근처에서 10~20분 안에 빨리 때울 수 있는 점심거리를 찾고 있었다. 여느 뉴요커와 마찬가지로 애슐리 역시 점심을 레스토랑에 앉아 여유있게 먹을 시간이 없다. 그렇다고 해서 아무리 바빠도 맥도날드 햄버거 같은 값싼 패스트푸드로 아무렇게나 점심을 먹는 법은 없다. 하지만 매일 샌드위치나 베이글을 먹는 것도 질렸다.

‘오늘은 또 뭐로 점심을 때우나’ 고민하며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애슐리는 27번가와 8번가 애비뉴 사이에서 ‘코리안 패스트푸드젼이라고 적힌 간판을 발견했다. “뭐? 한국 음식 패스트푸드?”

맨해튼 한국타운에 있는 전통적인 한국 식당을 한번 가본 적이 있는 애슐리에게 한국 음식은 ‘맛있기는 해도 혼자 간단히 먹기에는 부담스러운 음식’이었다. 식당 분위기가 소란스럽고, 반찬까지 포함해 한상 차려져 나오는 푸짐한 밥상을 끝내려면 시간도 적잖이 걸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코푸(KOFOO)’라는 상호의 이 패스트푸드점은 뉴욕에 흔한 샌드위치 가게들과 다를 바 없어 보였다. 다섯 사람 정도 간신히 들어갈 만한 좁은 공간에서 샌드위치 팔 듯 비빔밥, 잡채밥, 김밥 등을 1회용 도시락에 넣어서 4~9달러에 팔고 있었다. 카운터 앞에서는 주변 직장인이 두세 명씩 쉬지 않고 줄을 서서 바삐 점심거리를 사가고 있었다.

▲ 오징어를 파(scallion)에 싼 '파롤'
가게 안에서 먹을 수 있는 공간은 작은 바(bar) 테이블에 의자 세 개가 달랑. 애슐리는 참치김밥과 떡볶이를 시켜서 그 자리에서 바로 먹고 나왔다. “일본 음식처럼 비싸지도 않고, 중국 음식처럼 기름지지도 않고, 패스트푸드이면서도 이렇게 몸에 좋은 재료를 쓰다니 너무 마음에 들어요.”

그 뒤 애슐리는 코푸의 단골이 됐다. 이 가게 손님의 70%는 서양인이고, 그 중 백인이 가장 많다. 애슐리처럼 이 주변에서 일을 하는 사람들이 단골이다. 코푸의 한동균(29) 사장은 “이 동네에 예술가들과 동성연애자가 많다는 점에 유의해서 이 지역 사람의 취향에 맞추려 노력한다”고 했다. “이를테면 이 주변에는 건강과 칼로리에 신경을 쓰는 사람이 많기 때문에 손님들이 야채의 신선도에 특히 예민합니다. 어떤 사람은 김치를 샐러드처럼 따로 먹기도 하기 때문에 김치를 샐러드처럼 담아내기도 해요.”

한국 사람들이 모르는 한국 식당, 뉴욕화된 한국 식당이 세계의 중심도시 뉴욕에서 ‘한국 음식의 세계화’를 이뤄가고 있다. 오래 전부터 있어온 뉴욕의 한국 식당들은 한인타운이랄 수 있는,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 뒤 맨해튼 32번가를 중심으로 자리잡았고 메뉴나 식당 분위기나 한국에 있는 ‘본토 식당’과 거의 다를 바가 없다. 이용객은 대부분 한국인이거나 외국인이어도 일본인이 대다수.

그래서 한국 식당은 늘 붐비기는 해도 정작 뉴요커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뉴욕의 맛집을 소개하는 대표적 소책자인 ‘자가트 서베이(Zagat Survey)’ 올해 판에 소개된 맛집 중 일본 식당은 81개나 되지만 한국 식당은 아직 15개에 불과할 정도다.

▲ 지난 8월31일 뉴욕 맨해튼에서 미국 언론을 대상으로 열린 한국음식 시연회에서.
하지만 최근 인기를 끄는 뉴욕화된 한국 식당들은 일단 위치부터 이스트 빌리지, 첼시, 소호처럼 뉴욕의 멋쟁이들과 미식가들이 모이는 곳으로 뚫고 들어간다. 가게 간판은 전통적인 한국 식당처럼 ‘감미옥’ ‘한밭’ 등과 같은 한국식 이름을 달지 않고, 대신 ‘코푸’ ‘수라’ ‘코리안 템플 쿠진’ 등처럼 외국인이 쉽게 기억할 수 있는 이름으로 달았다. 가게 주인은 대부분 젊은 사람이다.

패스트푸드 스타일 외에 또 하나 인기를 끄는 한국 식당 스타일은 ‘로맨틱 스타일’이다. 왁자지껄한 한인타운의 전통적 한국 식당과 전혀 다르게 예쁘고 조용한 갤러리 분위기로 꾸며져 있다. 이스트 빌리지에 있는 ‘코리안 템플 쿠진(Korean Temple Cuisine)’의 내부는 양초와 꽃으로 장식되어 있고, 일반적인 한국 식당에서 틀어주는 한국 가요가 아닌 조용한 재즈 음악이 흐른다. 이 식당의 사장인 제니퍼 맹(23)씨는 “젊은 사람들이 데이트할 때 분위기를 내기에도 적합한 한국 식당을 만들고 싶었다”고 했다.

▲ 한국음식 시연회에 선보인 '뉴욕식 족발 보쌈'
맹씨와 그의 식당 ‘코리안 템플 쿠진’은 ‘한국 식당의 새로운 경향(New Wave)’으로 최근 뉴욕타임스에도 소개가 됐다. 뉴욕타임스는 섹션 프런트 톱에 소개한 이 기사에서 이런 새로운 경향의 한국 식당들은 한인타운에 있는 전통적인 한국 식당에서 벗어나, 일본 식당 같은 세계화와 인기를 노리고 있다고 설명했다.

서양화된 퓨전 메뉴, 색깔과 모양에 신경을 쓴 예쁜 메뉴도 뉴요커들을 끌어들이는 방법 중 하나다. 푸른 깻잎 옆에 동그랗게 싸여져 놓인 김치, 그 옆에 앙증맞게 놓인 돼지고기가 이를테면 ‘뉴욕식 보쌈’이다. 프랑스 요리나 이탈리아 요리와 비교해도 뒤지지 않을 만큼 보기에도 예쁜 보쌈요리다.

이런 세계화 전략 덕분에 뉴욕에서 한국 음식의 인기는 눈에 띄게 성장하고 있다. 지난 8월 31일 저녁 맨해튼에서 한국 농수산물 유통공사 뉴욕센터 주최로 열린 ‘미국 언론 대상 한국 음식 시연회’에는 미국 언론의 음식담당 기자들이 80명이나 와서 한국 음식을 취재하고 갔다. 뉴욕 언론의 한국 음식에 대한 관심이 얼마나 큰지 보여주는 셈이다.

이날 행사에 취재왔던 와인평론가 마노스 안젤라키스씨는 “우리 집 냉장고에는 늘 김치가 떨어지지 않는다”며 “김치는 매운 맛이 아주 독특하게 들어가 있어서 고기 요리와 잘 어울리기 때문에 닭고기처럼 특별한 소스가 필요한 요리를 먹을 때 김치를 같이 즐겨 먹는다”고 했다.

마침 미국인의 건강에 대한 관심이 부쩍 늘어나 ‘몸에 좋은 음식’을 찾는 웰빙붐이 일어난 바람에 한국 음식의 인기는 더더욱 바람을 탈 수 있었다. 여기에 한국식 디저트까지 인기를 얻어가고 있다. 칼로리 덩어리인 아이스크림과 케이크 대신 팥빙수를 찾는 사람이 늘고 있기 때문이다. 뉴욕 타임스는 ‘한국 뉴 웨이브 식당’에 이어 며칠 뒤에는 ‘팥빙수’ 특집기사를 다루면서 한국의 팥빙수는 미숫가루, 과일, 우유 등 각종 재료가 다양하고 정성스럽게 들어가 있는 디저트라고 소개했다.

한번 맛을 본 사람들은 쉽게 팬이 되는 한국 음식. 옷만 살짝 바꿔 입으면 일본 음식보다도 더 세계화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뉴욕의 한국 음식들은 보여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