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생과 봉사, 나누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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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생과 봉사, 나누는 사람들
  • 장혜진
  • 승인 2005.08.19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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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닐라 서울에서는 '희생과 봉사, 나누는 사람들'이라는 주제로 자신을 희생하여 주위를 따듯이 밝히는 자랑스런 한국사람들을 만나 그들의 진솔한 얘기를 4회에 걸쳐 연재 합니다.
1부 메트로 마닐라 POEA에서 한글 교육을 하고 있는 KOICA단원들
2부 메트로 마닐라 필리핀 대학(UP)에서 한글 교육을 하고 있는 KOICA단원들
3부 사마리아 나환자촌을 운영하고 있는 전 한인회장 장재중씨
4부 민다나오 지역 오지에서 학교를 지어 주고 있는 정토회 회원들과 법륜(法輪) 스님


koica 단원들

봉사하는 삶 속으로

현재 56명의 koica단원들이 필리핀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메트로 마닐라 지역을 비롯, 비자얏, 민다나오 지역에 이르기까지 필리핀 전 지역에서 활발한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이들은 농, 축, 어업을 비롯 TI분야, 한국어 교육 등 다양한 분야에서 봉사활동을 펼치고 있다. 그중 메트로 마닐라지역에서 일하고 있는 KOICA 봉사단원들을 만나 보았다.

POEA 조창휘씨

POEA(Philippine Overseas Employment Administration) 5층에 위치한 HRDD사무실에 들어서자 책 상위에 놓인 태극기가 이곳이 조창휘씨의 자리임을 귀뜸이라도 하듯 반갑게 손짓한다. 지금 막 수업을 끝 냈는지 다음 수업을 준비 하는 그의 뒷 모습에서 학창 시절 선생님을 연상시킨다.
중학교때부터 적십자 활동을 한 조창휘씨는 대학 3학년 방학중 적십자 해외 봉사활동으로 카자흐스탄 '무스토베'라는 고려인 마을의 학교를 방문적이 있었다.
학교의 수업과정중 한국어 과정은 있었지만 학국어를 가르칠 수 있는 선생님은 없었다. '2년전 KOICA에서 한국어를 가르치는 선생님이 2년간 한국어 교육을 했었지만, 불안한 카자흐스탄의 정세로 한국어 교육의 맥이 끊어졌다.'라는 교장 선생님의 말씀이 안타까웠고 그후 계속된 한국어 교육에 대한 관심이 KOICA에 지원하게된 동기가 되었다.
"처음 KOICA에 지원한다고 했을때 부모님의 반대가 심했습니다. 그것도 그럴것이 한참 기반을 잡고 결 혼할 나이에 갑자기 2년간 해외에서 봉사활동을 한다고 하니 마른하늘에 날벼락이라고 할까요"
POEA에서 그는 이곳 공무원들을 대상으로 한국어 교육을 하고 있다. 이들은 한국어로된 서류를 접하거나 한국과 관련된 업무가 잦아 자의로 한국어를 공부하는 학생들이다.
하지만 한국어의 불모지인 이곳 필리핀에서 한국어 교육을 한다는 일이 쉽지 만은 않았다. 다른 외국어에 비해 어려운 한국어에 쉽사리 포기하는 학생들도 있었다. 하지만 현재 한국 드라마에서 시작된 한류열풍 때문인지 다들 한국어를 배우는데 열심이다.
"난생처음 한국어를 접하는 이들이 한국어 교육 3주만에 한글을 읽고 간단한 인사를 하는걸 보면 내가 지금 무엇인가를 하고 있구나라는 생각에 보람도 느끼고 그리고 한국어를 배울려고 하는 학생들의 열 의에 힘이 불끈 쏟습니다."
2년 과정으로 지난 2004년 12월 필리핀에 온 조창휘씨는 전공이 중문과라 KOICA에서 중국으로 발령이 났지만 갑작스럽게 필리핀으로 발령이 변경되어 이곳으로 오게되었다.
그가 필리핀에 대해 전해들은 이야기는 '치안이 좋지않아 위험하다'라는 얘기가 전부였지만 직접 만나본 필리핀 사람들은 무섭다기 보다는 순진하고 마냥 착하기만 한 사람들이 더 많은것 같다고...
현재 그의 학생은 오전반 10명 오후반 10명 모두 20명이다.
오전반은 한글 기초교육을 하는 초급반 수준의 학생들이며, 오후반은 초급이 끝난 한단계위의 학생들이다.
4개월의 한국어 교육과정이 끝나면 학생들은 한국어를 읽거나 간단한 회화를 하고 인사를 할정도 수준이 된다. 그리고 한국어 교육을 더 받기를 희망하는 학생들을 위해 한반을 더 증설할 계획을 가지고 있다.
조창휘씨는 한국어 교육 뿐만아니라 한국문화도 대해서도 알리고 있다.
2주에 한번 교실에서 상영하는 한국영화는 한국 문화와 한국사회를 알리기에는 더없이 좋은 수업교재가 되고 있다.
학생들이 한국영화에 쏟는 관심은 엄청나다. 제일 처음 보여준 영화인 '엽기적인 그녀'와 같이 흥미위 주의 영화도 상영을 하지만 '취화선'과 같은 한국전통 가옥, 복식, 음악, 풍경등 한국 문화를 소개할 만한 영화 위주로 보여주고 있다.
머잖아 필리핀에서 '안녕하세요'가 '헬로우'와 같은 친근한 언어가 될날이 얼마 남지 않은것 같다.
한국 드라마 처럼 모든 필리핀인들이 친근히 한국어를 하는 그날이 오길 바라며...


POEA 박지영씨


박지영씨는 POEA에서 한국으로 송출되어 일하게 되는 필리핀 사람들에게 발생하는 여러가지 문제들을 해결하고 원만히 처리하는 일을 하고 있다.
POEA는 항상 바쁘다. 수 많은 인파들로 항상 북새통을 이루는게 Quiapo의 재래시장을 닮았다.
일층에 위치한 박지영씨의 사무실 역시 바쁘다. 전화받는 사람, 서류 작성하는 사람, 컴퓨터 모니터에 시선이 고정된 사람. 이 많은 사람들이 바삐 움직이는게 도통 이곳이 필리핀이라고는 믿어지지 않게 만든다.
"최근까지 한국에서 국어 선생님을 하던중 현재의 생활을 바꾸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KOICA에 지원하게 되었죠."
조창휘씨와 같이 POEA에서 근무하는 박지영씨는 필리핀에서 한국으로 송출되어 일하게 되는 사람들과 그들이 일하게될 회사와의 중간 커뮤니케이션 역할을 담당 하고 여기서 발생하는 여러가지 문제를 해결하는 그들의 '해결사'다.
필리핀 사람들이 한국에서 일을 하기 위한 경쟁은 생각외로 치열하다.
그도 그럴것이 까다로운 면접과 쟁쟁한 고학력의 경쟁자들을 물리쳐야만 한국에서 일할 기회가 주어진다.
이러한 이유로 한국에서 일한 경험이 있는 경력자들을 우선적으로 채용자 명단에 올리고 있다.
조금이라도 한국문화를 접한 경험이 있고 한국기업에서 일한 경험이 있는 사람들을 고용하고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필리핀 사람들이 한국에서 일하는 동안 생긴게 향수병 이외에도 불법체류자라는 눈으로는 보이지 않지만 온라인에서는 훤히 들어나 보이는 꼬리표를 가지고 있어 한국에서 다시 일을 하고 싶어도 그러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사실 알고 보면 한국에서 이러한 불법체류자들을 구제해주는 곳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몰라서' 그냥 불법체류자가 되고 만다. 이러한 사람들 중에서 구제가 가능한 사람은 구제를 해주고 또한 한국에서 행정적으로 착오가 생기는 경우. 예를들어 생일이 똑같거나 이름이 비슷한 경우 또는 다른 사람이 자신의 위조된 여권을 가지고 한국에서 일을 하고 있는 경우 등 여러가지 문제들을 처리하고 필리핀 근로자와 한국 고용주와의 커뮤니케이션 역할과 이들이 한국에서 지장 없이 일을 할 수 있도록 돕는 일이 박지영씨가 하는 일이다.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고학력자라 좋은 환경에서 깨끗한 일을 하고 싶어하지만 한국에서의 현실은 그렇지 못하거던요. 대다수의 외국인 근로자가 그러하듯 필리핀 사람들도 3D업종에서 일을 하게 되는 게 현실입니다."
예전에 비해 한국에서 일하는 필리핀 근로자수는 큰 폭으로 줄어들고 있다. 그 이유중 하나가 고학력에서 발생하는 각종 문제 때문이다. 예를들어 근무조건이 계약서와 똑같이 이행되어 지지 않거나 조금의 부당한 대우를 받아도 업주에게 항의를 한다. 그리고 월급 또한 생각한것 만큼 많이 받지 못하는것도 불만이다.
한달에 백만원 정도의 코리아 드림을 꿈꾸고 한국에 와 때로는 늦은 밤까지 야근을 해야하는 힘든 고통을 참아 가며 일을했지만 월급날 막상 손에 쥐는 월급은 백만원에 턱없이 부족한 박봉이 전부다.
하지만 이에 한국에서 기업을 운영하시는 분들의 필리핀인에 대한 불만도 늘아가고 있다. 다른 기타 국가의 근로자들에 비해 항의가 잦다라는게 그들의 불만이다.
이러한 이유로 최근에 한국 기업주들의 필리핀인들에 대한 선호도는 갈수록 낮아지는 추세이며, 반면 베트남, 방글라데시와 같은 다른 동남아 국가 근로자들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반면 한국에서 일하길 간절히 원하지만 한국에 갈 수없는 사람들의 안타까운 사연을 들을때면 가슴이 아프다고 한다.
"한국에서 10년동안 일하다 자진출국 기간에 필리핀으로 온 분이 있습니다. 예전에 그분을 고용 했던 회사 사장님이 전화를 해서 그사람을 다시 고용하고 싶으니 꼭 보내 달라고 부탁을 한적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찾아 보아도 그분을 찾을수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3달이 지나서야 어렵게 연락이되어 그분을 다시 한국으로 보낼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끝맺음이 좋으면 저도 많은 보람을 느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