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동포정책 제자리 걸음 4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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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동포정책 제자리 걸음 40년
  • 이민호
  • 승인 2005.08.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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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민호
동경 통일일보 기자
동포정책의 시발은 63년 7월 관세법 개정이었다. 재일동포들의 국내재산 반입에 대한 제한을 전면철폐했던 것. 이는 외자유치에 목말라하던 당시 박정희 정권으로선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그러나 1인당 국민소득이 100달러도 채 안되는 한국에 투자하려는 나라는 없었다.

이런 절체절명의 상황에 놓인 한국정부에게 재일동포들은 구세주였다. 65년 완공된 한국최초의 수출산업단지 ‘구로공단’의 설립도 재일동포의 돈을 끌어들이려는 목적때문이었다. 66년 7월 한달동안에만 대한광학(허필석), 한국마벨(김용태), 삼화제혁(정환무), 싸니전기(곽태석)등 14개 동포기업이 입주했고, 그후 수십개 동포기업가들이 모국투자에 나선다.

그러나 동포정책은 이들의 투자와 모국기여부분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민족교육과 취업불이익, 지문날인 등 차별문제에 대해선 수수방관했다. 대표적 케이스로 일본내 한국계 민족학교는 고작 3개였지만 북한정부의 지원을 받는 조총련계 민족학교는 100개를 넘었다.

헌법(2조2항)에 재외국민보호조항이 생겨난 것은 80년대초 전두환정권 들어서다. 이는 정부가 60만 재외국민이 주류인 재일동포사회에 대해 얼마나 무관심했는 지를 잘 보여주는 증표다.

88서울올림픽을 기점으로 동포정책은 재일동포 일변도를 탈피, 다변화된다. 재미동포사회가 대형화됐고, 90년대초에는 중국, 러시아와의 국교수립으로 재중 재CIS동포들이 시야에 들어오게 된 것. 김영삼 정부때 비로소 명문화된 동포정책이 처음으로 등장한다.

그러나 이른바 ‘신교민정책’ 5개항은 ‘현지화정책’이란 비판을 받았다. 핵심내용인 1항의 “거주국안에서 그 사회의 모범적인 구성원으로 정착하도록 지원한다”는 듣기에는 좋지만 “동포들은 현지적응이나 잘하라”는 메시지로 해석됐다.

97년 10월 정부는 교민청의 대안으로 재외동포재단을 출범시켰다. 이 역시 기능과 역할이 대폭 축소된 외교부 재외국민영사국 산하단체에 불과했다. ‘독자적 정책입안이 불가하면 백지화가 낫다’는 동포사회 다수의 의견은 묵살되고 말았다.

김대중 정부는 ‘재외동포법’을 제정, 이중국적 허용과 맞먹는 조치라고 홍보한다. 그러나 해방이전 해외로 이주한 재중 재CIS 270만명을 그 대상에 제외시키는 우를 범하고 만다. 2001년 12월 헌법재판소가 ‘차별소지가 있다’며 헌법불합치 판결을 내림으로서, 이 법은 위헌임이 입증된다. 이중국적을 요구하는 일부 미국시민권자들의 목소리만 반영함으로써 생겨난 파행이었다.

참여정부를 자칭하는 노무현 정부들어서도 정책의 틀은 바뀌지 않고 있다. 작년 11월 재외동포정책위원회(위원장 국무총리)를 부활시킨 것이 변화라면 변화였다. 그러나 7년만에 재개된 정책위는 동포사회의 현안인 재외국민참정권과 재일동포 지방참정권 문제, 재중동포 출입국문제 등은 의제로도 올리지 않았다. 이 때문에 정책위 개최가 김선일 피살사건으로 비등해진 ‘재외국민 보호 소홀’에 대한 비난여론을 잠재우기 위한 방편아니었냐는 비판이 제기되기도 했다.

그나마 긍정적인 현상은 최근 정치권에서 재외동포관련 법안들을 속속 내놓고, 이를 둘러싼 여야간 논의가 어느때보다 활발하다는 점이다. 여당 열린우리당에서는 한명숙, 이화영 의원이 각각 ‘재외동포교육문화진흥법’과 ‘재외동포기본법’안을, 야당에서는 홍준표(한나라당) 권영길(민노당)의원이 각각 ‘공직선거법 개정안’,‘재외동포기본법’안을 발의했거나 준비중이다.

흔히들 재외동포를 ‘민족의 자산’이라고 평한다. 박정희 정권때 고착됐던 ‘不可近 不可遠’원칙, 즉 “동포는 가까이도 그렇다고 멀리도 하지 말라”는 동포기피인식은 완전히 사라졌는가. 정부는 진정 재외동포정책을 펼 의지가 있는 지 ‘자산’인지 ‘짐’인지 답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