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가 영화에 빠진 날 <망종> 들고 칸 간 장률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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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가 영화에 빠진 날 <망종> 들고 칸 간 장률 감독
  • 필름 2.0
  • 승인 2005.06.0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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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름 2.0 2005-06-02 20:30]

중국에도 이창동과 비슷한 운명을 겪은 사나이가 있었다. 교수, 소설가 출신인 장률은 어느 날 느닷없이 영화감독이 될 결심을 하고 그걸 실천에 옮겼다. 조선족이었던 그는 자신이 찍은 단편 필름을 들고 한국에 왔다. 그리고 한국인 친구를 제작자로 두고 두 편의 장편영화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의 신작 <망종>은 올해 칸에 갔다.

중국 조선족 동포 영화감독 장율을 만나 인터뷰한 혜화동의 한 영화사는 장소가 근사했다. 개점 휴업 상태인 그곳은 정원에 잡초들이 근사하게 자라 일부러 공을 들여 도심 속에 자연적 정취를 꾸며놓은 듯했다. 장률의 영화 두편을 제작한 두엔터테인먼트의 최두영 대표는 잠시 빌려 쓰고 있는 그 영화사가 자기 것이나 다름없다고 허풍을 쳤다. 돈 한 푼 없는 그는 장률의 데뷔작을 개인 돈으로 만든 후 두 번째 영화 <망종>은 중국 현지 자본과 합작하는 수완을 보였다. 매사에 순한 그는 성격이 급하고 허둥대는 편이지만 장률은 단호하고 까다로운 인상을 풍긴다. 장율은 그저 미소만 짓고 있었지만 막상 대화가 시작되자 부드러운 영혼을 드러낸다. 타인에 대한 근심과 배려, 세상의 동향에 민감한 예술가의 예민한 영혼이 나타난다.

장률은 한국말이 서투르니 최두영이 옆에서 거들어주기를 바랐지만 우리의 대화가 시작되자 그는 사라지고 없다. 장률의 두 번째 영화 <망종>이 칸영화제 비평가 주간에 선정됐고 그들은 그 다음날 칸으로 떠날 예정이었다. 칸 현지에 뿌릴 보도 자료와 포스터, 기타 실무적인 사항을 체크하느라 최두영 대표는 경황이 없었다. 뭘 해봤어야 알지, 라고 최두영은 툴툴거렸지만 정작 연출자인 장률은 칸이던 뭣이던 상관없다는 투로 무심하게 말을 이어나간다. 장률의 이력은 특이하다. 연변대학교 교수였으나 천안문 사태 이후 해직당하고 소설가로 전업했다. 세 권의 소설집을 낸 뒤 한 편의 단편과 두 편의 장편을 만들었고 서구의 여러 영화제에서 벌써 이름이 나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그는 흔히 말하는 중국 지하전영 감독으로 자신이 알려지는 것에 질겁했다. “지하전영이 아니라 그냥 독립영화다. 또, 내 영화는 조선족 동포의 삶을 다룬 조선족 감독의 영화도 아니다. 인류 보편의 문제를 다룬 작품일 뿐이다.”

술김에 결심한 영화감독

장률은 한국어가 서툴다고 스스로 고백했지만 그렇지가 않았다. 다소 더듬거리는 그의 말투는 단호했고 전달력은 완벽에 가까웠다. 서울의 한 극장에서 뒤늦게 개봉하는 그의 데뷔작 <당시>에 관해 화제를 꺼내자 그는 “나는 그때 영화를 아무것도 몰랐다. 그렇지만 나 자신이 그 영화에 들어가 있다”고 말했다. 연변대학교 교수였던 장률은 천안문 사태에 연루돼 해직당하고 10여 년 넘게 아내가 버는 돈으로 살았다. 소설을 쓰는 동안에도 두문불출한 채 세상과 담을 쌓고 살았다. 딱히 그가 영화감독이 되려던 계획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평소 알고 지내던 영화감독이 그에게 시나리오 집필을 의뢰했다. 장률이 처음 쓴 시나리오는 중국 당국으로부터 영화 제작 허가가 나오지 않았다. 장률의 영화감독 친구는 중국 정부의 검열을 피할 수 있는 시나리오를 써달라고 재차 부탁했다. 대신 영화는 첫 번째 시나리오로 찍을 것이라는 약속도 덧붙였다. 장률은 새로 시나리오를 썼고 그건 검열에서 통과됐지만 친구 영화감독은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장률은 불같이 화를 냈고 친구를 불러 사과하라고 다그쳤지만 생계에 신경을 써야 하는 그의 처지를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중국에선 영화감독이 정부로부터 월급을 받는 직장인이기 때문이다.

친구 영화감독과 설전을 벌인 술자리에서 장률은 자기 인생을 바꿀 말을 내뱉었다. “영화가 뭐가 그리 대단한가. 그렇다면 내가 직접 영화를 찍을 테다.” 다음날 장률은 술에서 깨어 자신의 말을 후회했지만 술김에라도 뱉은 말에 타협을 해서는 안 되는 것이 그의 성품이었다. 그는 영화를 찍기 위해 지기들의 도움을 청했고 대개는 정신 차리라는 비판만 들었다. 도무지 영화 찍을 돈이 마련되지 않아 낙담한 그에게 누군가가 먼저 단편영화를 찍어보라고 권했고 그게 평판이 나면 장편을 찍을 돈이 모일 것이라고 말했다. 장률은 친구들에게 돈을 빌려 단편영화 <11세>를 찍었다. 그렇지만 후반 작업을 할 여력도, 돈도 없었다. 그는 몇 해 전 중국에 들러 자신과 친구가 된 전직 소설가 이창동 감독을 떠올렸고 무작정 한국에 필름통을 들고 들어왔다. 이창동은 이렇게 대책 없이 오면 어떡하냐고 장률에게 기가 막혔지만 한국에서 후반 작업할 수 있도록 도와줬다. 그렇게 해서 완성된 영화를 베니스영화제에 보냈더니 단편 경쟁 부문에 선정됐다는 답변을 들었다.

베니스에서 장률은 또 한 사람의 한국인 친구를 사귀게 된다. 영화진흥위원에서 색보정 기사로 일했고 몇 편의 단편영화에서 촬영을 맡은 최두영을 만난 것이다. 우연히 한 방을 쓰게 된 두 사람은 의기투합했고 서로 미래를 맡기는 단계로까지 나아갔다. 최두영은 장률의 제작자로 나서기 위해 두엔터테인먼트를 차렸다. 영화 <오구>의 제작과 촬영을 겸한 경험만을 믿고 최두영은 덜컥 제작자로 나서버렸다. 장률도 덜컥 영화를 찍어버렸다. 사스가 한창 유행이던 2003년 4월 그는 인적이 드문 베이징의 어느 술집에 촬영 기사와 조명 기사를 불러 신세 한탄을 하다가 필름으로 찍을 돈이 없으면 비디오라도 찍겠다고 선언했다. 초저예산으로 만든 <당시>는 그렇게 나왔다. 촬영 기사의 집에서 11일 동안 찍은 이 영화, <당시>는 아파트 바깥으로는 한 번도 카메라가 나가지 않은 채 전직 소매치기였던 중년 사내의 고요한 일상을 담는다. 애인인지 제자인지 모를 여자가 수시로 다녀가지만 두 사람 사이에는 별다른 대화가 없다. 옆집 노인이 죽어 실려 나가는 사건이 일어나도 남자는 덤덤하다.

너무 적요해서 돌아버릴 것 같은 이 절대적인 고독의 기운은 그때 장률의 품고 있던 것이기도 하다. 오랫동안 정신적 유배자 처지를 자처했던 장률은 집 바깥으로 나가지 않는 자신처럼 옆집에 사는 할아버지도 비슷하게 살고 있는 것을 깨달았다. 그 할아버지는 퍽 부지런하고 친절한 사람이었으며 그가 사는 집에서 나오는 모든 소리와 소음이 장률의 방까지 다 들렸기 때문에 개인적인 신상에 관한 정보도 훤히 꿰고 있었다. 어느 날 할아버지가 일주일 동안 보이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장률은 그동안 할아버지의 일상을 관찰하는 것이 자신의 생활 리듬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된다. 장률은 아내에게 말했다. “난 도무지 저 할아버지가 어떤 사람인지 모르겠어. 꽤 오랫동안 이웃에 살았는데도 말이야.” 장률의 아내는 장률을 한동안 바라보더니 빙그레 웃었다. “왜 웃어?” “이봐요. 당신이 바로 옆집 할아버지와 똑같이 살고 있단 말이에요.” 아내의 말을 들은 장률은 충격에 빠졌다. <당시>를 만들며 그는 많은 생각을 했다. 모두 소통을 갈망하지만 사랑과 마찬가지로 소통도 능력 있는 사람이나 하는 것이다. “<당시>에는 나, 장률이 반영돼 있다”고 그는 말했다.

병 속에 갇힌 파리의 운명, <당시>

<당시>는 줄거리라고 요약할 만한 것이 없다. 한 중년 남자의 일상이 소개된다. 그는 종일 자기 아파트 방에서 나오지 않는다. 그는 시를 소개하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보고 청소하고 밥을 먹는다. 그를 찾아오는 어떤 여자를 통해 그가 왕년에 소매치기였다는 것을 알게 된다. 여자가 새로 나이트클럽을 털자고 제안하지만 그는 가타부타 말이 없다. 어느 날 옆집에 사는 할아버지가 총에 맞아 죽는 사건이 발생한다. 할아버지의 불행한 최후는 주인공의 운명을 예시하는지도 모른다. <당시>는 육체적으로는 살고 있지만 정신적으로는 이미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한 남자의 일상을 통해 지독하게 고독하고 무의미한 삶을 그린다. 영화 교육을 받지 않은 소설가가 연출한 작품이라고는 믿기 힘들 만큼 화법이 영화적이다. 디지털 카메라의 얄팍한 깊이감으로도 아파트 내부 공간의 공기를 묵직하게 전달하는 시선을 느낄 수 있다. 미동도 하지 않는 카메라는 한없이 화면을 응시하고 있고 주인공이 사람이 아니라 공간은 아닐까, 착각하게 만든다. 파리 한 마리가 날아도 소리가 크게 들리는 이 고요 속의 무의미가 장률이 영화를 만들 당시 느끼던 삶의 실체다.

<당시>의 주인공을 연기한 사람은 소설가이자 대학 교수다. 그는 영화 속 주인공의 말과 행동을 이해할 근거를 달라고 장률에게 말했다. 장률은 말해주지 않았다 두 사람은 이틀 동안 내리 싸웠다. 사흘 째 그 교수는 장률과 싸우는 것을 멈췄다. 촬영이 끝난 후 장률은 물었다. “왜 내게 더 이상 따지지 않는가?” 교수는 “이상하게도 리듬이 맞았다”고 답했다. 여주인공 역을 맡은 무용과 교수는 처음부터 아무런 불만이 없었다. 그는 몸으로 사고하는 사람이었다. 자기 몸과 영화의 리듬이 맞으니까 시종 일사천리였다. 이것이 오늘의 중국을 사는 지식인들의 삶의 리듬이다. 아무것도 진전되지 않고 미래를 생각할 수 없으며 병 속에 갇힌 파리의 운명을 굳이 피하려 들지 않는 것이다. 장률은 “중국의 오늘은 어둡다. 미래는 모르겠다”고 말한다.

장률은 <당시>를 제목 그대로 당시의 리듬을 모방하는 형식으로 만들고 싶었다. 물리적, 화학적 매체인 필름이 뭔가를 재현한다면 디지털은 복제하고 카피하는 데 좋다. 당시를 카피하는 영화를 만들려고 했던 장률은 디지털도 맞겠다고 생각했다. 완성된 영화는 아무래도 영화적 질감을 맞추는 데는 힘이 달렸지만 이것을 필름으로 옮기는 키네코 작업을 거치자 미묘한 변화가 일어났다. 뭔가 영화적 질감이 생겨난 것이다. 필름으로 작업한 두 번째 영화 <망종>은 그런 면에서 본격적으로 장률의 연출 진가를 보여 준다.

벼를 수확하는 마음, <망종>

중국 어느 도시인지 모를 곳에서 김치를 팔며 어린 아들과 함께 사는 최순희란 여인의 삶을 담은 이 영화는 중국에서 가난한 최하층 사람들의 운명이 어떤 것인지를 집요하게 파고든다. <당시>와 마찬가지로 화면은 천천히 전개되지만 이야기의 살은 풍부하다. 제목 ‘망종’은 곡식을 거둬들이는 시기를 가리키는 말이다. 6월 초 이모작을 하는 농부들은 봄에 수확한 농산물을 거두고 새 곡식의 씨앗을 뿌린다. 얼마 전까지 농경사회에서는 사람들이 이런 시간적 리듬을 정확히 지키며 살았지만 공업 사회인 현대에는 그 리듬을 잊어버렸다. 공동체는 무너졌고 선의도 사라졌다. 장률의 비유에 따르면 이런 세상에서 가난한 사람들이 산다는 것은 ‘집에 비가 새는데 운 나쁘게 밤새도록 새는’ 상황이다.

<망종>의 주인공 최순희는 선량함을 잃지 않는 이타적인 여인이고 열심히 산다. 어느 날 그녀의 삶 모든 게 깨진다. 그녀는 그렇게 되자 사회에 자기만의 방식으로 복수를 한다. 선량했던 사람이 자기 본성과는 반대로 행동함으로써 그동안 피해자였던 그녀는 졸지에 가해자로 돌변한다. 장률은 이 영화가 일종의 테러리즘을 다룬 것이라고 주장한다. “정치가들이 말하는 테러리즘이 아니고 우리 보편 생활의 약자와 강자의 운명을 다룬다. 압박과 피압박의 씨가 일상에서 계속 생긴다. 테러리즘은 우리 옆에 있다. 아니, 우리의 마음속에 있다. 영화 예술로는 테러리즘을 해결하지 못한다. 그렇지만 사람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지는 않겠느냐?”고 반문했다. 장률이 이 영화를 착상한 계기는 중국 어느 지역을 가봐도 항상 볼 수 있는 김치 파는 아줌마들의 존재였다. 심지어 티베트에 가도 김치 파는 아줌마들을 볼 수 있다. 김치는 정갈한 음식이고 그들도 깨끗한 마음을 지니고 있다. 그렇지만 그들은 사회 최하층의 삶을 산다. 거기에는 다른 삶의 방법이 없다.

올해 칸영화제 비평가 부문에서 첫 상영되고 부산국제영화제로부터도 초청장을 받은 <망종>은 김치 파는 아줌마 최순희의 비극을 다룬다. 조선족인 최순희는 남편이 돈 때문에 사람을 죽이자 고향을 떠나 아홉 살 아들 데리고 타향에서 김치 팔며 산다. 어느 날 그녀에게 사랑이 생긴다. 그 지방에서 드물게 조선족 동포 김 씨를 만나게 되고 관계가 깊어진다. 그러나 김 씨는 유부남이다. 어느 날 김 씨의 부인이 두 사람의 불륜 현장에 들이닥친다. 마누라가 비난하자 김 씨는 최순희와 애인 관계가 아니라 돈을 주고 몸을 샀을 뿐이라고 발뺌한다. 김 씨의 마누라는 매춘부라고 최순희를 공안에 신고한다. 최순희는 동포이자 애인에게 배반당했지만 그건 약과다. 파출소에서 그녀는 또 다른 봉변을 겪는다. 그것도 평소 자신을 잘 봐주던 경찰에게 봉변을 당한다. 슬슬 그녀의 삶을 지켜보던 관객도 고통스러워지기 시작하는데 정작 최순희는 파출소를 나와 평소와 다름없이 산다. 그녀를 더 큰 불행에 빠트린 인간들도 평온한 삶을 산다. 장률은 “그들의 삶은 지나간다”고 표현했다. 어쨌거나 시간은 흐르고 살아지는 것이다.

<망종>의 마지막 장면은 매우 인상적인 롱테이크 화면으로 끝난다. 상황을 자세히 설명할 수는 없지만 카메라는 최순희를 쫓아가고 그녀는 떠나간다는 것만 말해두도록 하자. 그 와중에 관객으로 하여금 긴 고통의 터널을 지나 다른 어디론가에 도달하는 듯한 휴식 같은 기분을 안겨준다. 최순희는 떠나가지만 그녀의 발자국 소리는 가까워진다. “그녀는 우릴 떠나지만 뒷모습으로 우리에게 남는다. 우릴 떠나지만 그녀의 소리는 다시 돌아온다. 후반 작업할 때 사운드 기사가 이건 좀 이상하다고 고개를 갸우뚱했으나 완성 프린트를 보고 그럴 수도 있겠다고 수긍했다”고 장률은 말했다. 이 장면에서 제목을 망종으로 정한 이유도 뚜렷해진다. 농경 사회로 돌아가자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지만 철저하게 개인화된 중국 사회에서 잃어버린 것에 대한 아픈 감정이 남는다.

<당시>와는 달리 <망종>에서 장률은 비관과 낙관을 동시에 취하는 시선의 겹을 지킨다. 예술가의 튼튼한 태도가 거기 들어 있다. <당시>를 만든 후 그는 고향 연변에 들렀을 때 어머니에게 비디오테이프를 보여드렸다. 그의 어머니는 5분여 간 영화를 보더니 끄고 귓속말로 조용히 장률에게 당부했다. “절대 이 영화를 다른 사람에게 보여 주지 마라. 큰일 난다. 망신이다.” 그때 텔레비전에선 인기 있는 드라마가 방영되고 있었다. 어머니는 덧붙였다. “영화도 저 정도로 만들어야 하는 거란다.” 이 일화를 들려주며 장률은 소리내어 웃었다. 애초에 영화감독이 될 운명이 없었다고 스스로 생각했던 그는 어느새 촉망받는 영화감독이 됐다. 40대 중반의 나이에 이르러 그는 영화와 연애에 빠졌으나 그의 영화가 많은 이들에게 보여질 거라고는 여기지 않는다. 한국에서 데뷔작을 준비할 때 그는 타협하지 않았고 얘기가 오가던 영화사와 헤어졌다. 장률은 “그건 첫사랑과 같은 것이다. 첫사랑이 결혼으로 이어지는 경우는 드물다. 그렇지만 첫사랑을 잊기도 힘들다”고 말했다. 아마도 그는 첫사랑을 하는 심정으로 계속 영화를 찍을 것이다. 거기에는 세상에 대한 은밀한 낙관과 집요한 어루만짐이 있다. 우리는 우선 <당시>로, 그 다음엔 <망종>으로 그의 영화세계와 접하게 될 것이다. 세상을 어루만지는 그의 영화의 농밀한 농탕질의 기쁨을 알게 된 관객이라면 이후로도 그의 영화를 기다리게 될 것이다.

사진 서지형 기자
김영진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