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죽는 날까지 편하지 않은 게 인생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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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죽는 날까지 편하지 않은 게 인생이야”
  • 주간조선
  • 승인 2005.04.2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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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간 사형수 상담해준 양순자 할머니

“어렸을 때 난 도무지 말이 없었어. 친구도 없이 항상 혼자서만 생각에 잠겨 살았지. 학교도 남보다 늦은 9살에 들어갔어. 사람들은 나보고 ‘벙어리’라고 놀렸어. 우리 집에 찾아온 사람은 동네 아이들한테 ‘벙어리네 집 어디냐’고 묻곤 했지. 그러다 내가 10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어. 나는 막내딸이었는데 아버지하고 워낙 친했거든. ‘사람이란 게 이렇게 죽는 것인가. 죽음이란 무엇일까. 나도 아버지랑 같이 가고 싶다.’ 그 이후론 항상 그런 생각을 하며 컸어.”

37세였던 1977년 2월부터 교도소 교화위원으로 활동하며 지금까지 약 30년간 사형수의 인생을 상담해온 양순자(67) 할머니. 그는 자신의 어린 시절을 회상하며 이렇게 이야기를 꺼냈다.

“집안에선 혹시 자폐증 아닌가 우려했지. 워낙 말이 없었으니까. 어른들이 걱정하다 나를 교회에 다니도록 했어. 사람들과 만나면 좀 나아지려나 했던 거지. 교회에서는 천당과 지옥이 있다고 하잖아? 그 말을 들은 뒤부터 난 줄곧 ‘아버지가 천당에 계시겠구나. 나도 천당에 가야지’라고 생각했어. 그러던 어느 날 교회에서 서울구치소 교화위원을 모집한다고 하더라고. 그때 막 집사가 됐을 때였는데 내가 제일 먼저 손들었어. 보수? 그런 건 없었어. 상관하지도 않았고. 그냥 죽음을 앞둔 사람들과 한번 부딪쳐보고 싶었어.”

할머니가 처음 만난 사람은 세칭 ‘유학생 간첩’ 혐의로 사형을 선고받은 재일동포 김철현(당시 28세)씨였다. “그때는 철현이가 막 사형을 확정받았던 때였어. 만나보니 애가 아주 올곧고 착하더라고. 게다가 정직했어. 이 아이는 배신감과 슬픔에 젖어있었어. 기관에서 ‘이중 스파이 노릇을 하면 목숨은 살려주겠다고 했다’는 거야. 그런데 자기한테 사형을 내렸다는 거지. 불안해 하고 있었어. 내가 온 것도 혹시 자기를 해치려 하는 것 아닌가 했던 거야. 철현이는 일본에서 태어나고 자란 데다 성격이 무척 내성적이었어. 게다가 한국말이 서툴렀지. 더듬더듬 말하는 것을 보니, ‘저 녀석 꼭 나 어릴 때 같구나’ 싶었어.”

할머니의 눈시울이 촉촉해졌다. “간첩이고 뭐고 그런 것을 떠나 세상엔 따뜻한 사람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더라고. 그래서 이렇게 말했어. ‘내가 너 죽는 순간까지, 꼭 너하고 함께 있을게. 그리고 필요한 것이 있으면 내가 최선을 다해 구해줄게’라고.”

할머니의 이야기는 여기서 반전됐다. “그런데 일본에서 ‘김철현 구명운동’이 일어난 거야. ‘순수한 신학도를 정치적으로 이용했다’이거지. 신문에 대서특필되고 여론이 불거지니까, 당시 정부가 3·1절 특사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형해주더라고. 살게 된 거지. 원래 사형수 상담에서 감정은 금물이야. 특히 정치범은 더더욱 그래. 어디 보통 사람들인가? 깊이 배우고 많이 생각한 사람들 아니야? 교화한다고 갔다가 사랑에 빠지는 경우도 있어. 그러니 조심해야지. 지금은 잘 살고 있나 모르겠네. 감형이 거듭돼서 한 20년쯤 전 석방됐어. 지금은 일본서 교회 일을 하고 있을 거야.”

박철웅, 덤덤하게 죽음 맞아

30년 가까운 세월 동안 할머니가 맡았던 사형수는 한두 명이 아니다. 그 중엔 골동품상 주인을 유괴살해한 금당사건의 박철웅(1979년), 거액의 재산을 노리고 부모를 살해한 뒤 불태운 유학생 박한상(1994년), 21명을 연쇄적으로 살해한 유영철(2003~2004년) 등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살인범도 있다.

“철웅이는 아주 체격이 좋고 잘 생겼었어. 나보고 ‘누님’이라고 깍듯이 불렀어. 철웅이는 특이했어. 죽음 앞에서 무척 의연했거든. 한번은 그런 말을 하더라고. ‘나는 살아서 밖에 나가고 싶지 않다’는 거야. ‘나가봐야 또 범죄를 저지를 것 같다’고. 그러더니 달관한 사람처럼 덤덤하게 죽음을 맞았어. 아주 편안하게 떠났지.”

“박한상이는 나쁜 놈이야. 내가 그렇게 사형수를 많이 만났지만 내 입으로 나쁘다고 하는 놈은 박한상이 하나밖에 없어. 젊은 놈이 꼭 무슨 구렁이 같애. 부모를 47번이나 칼로 찔러 죽여놓고 도무지 반성하는 기색이 없었어. 끝까지 자기가 안했다고 우기는 거야.”

화제가 박한상 사건으로 옮겨가자 할머니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박한상이는 나보고 ‘어머니’라고 불렀어. 편지를 70통이나 보내왔는데, 하나같이 똑같애. 감정을 표현하질 않아. ‘추운 날씨에 잘 지내십니까? 건강 조심하세요. 저는 무슨무슨 물건이 필요합니다. 그럼 다음에 만날 때까지 안녕히 계십시오’ 이런 식이야. 자기가 그랬든 안그랬든 부모가 돌아갔잖아? 그러면 최소한 ‘어머니 얼굴이 떠올라 한잠도 못잤다, 견딜 수가 없다’ 이렇게 나와야 되는 거 아니야? 그런데 그런 얘기가 하나도 없어. 나중엔 점점 무서워지더라고. 그놈 지금 대구교도소에 있어. 김대중 정부 들어서면서 사형집행을 하지 않았고 노무현 정부 들어서는 사형폐지가 논의되고 있잖아. 그래서 아직 형이 집행되지 않았어.”

박한상에 대한 기억이 끔찍했다는 할머니는 “유영철을 맡아달라”는 구치소 측 요청을 거절했다. “못한다고 그랬어. 난 절대 못한다. 도저히 안된다고 했어. 그랬더니 구치소 측에서 ‘그러면 편지라도 한 통 보내주시라’ 그러는 거야. 유영철이가 자꾸 자해하고 자살하려고 그러니까 좀 진정시킬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 거지. 사형을 집행하려면 반드시 죄인의 건강을 체크해야 돼. 자해해서 건강에 이상이 생기면 형집행이 늦춰져요. 그러면 그게 모두 교도관 책임이 되거든. 그러니까 ‘좀 진정시켜 달라’고 한 거지.”

할머니는 결국 유영철에게 편지를 보냈다. “반말로 썼어. ‘넌 죽을 자격도 없다. 너 같은 놈 동정도 하지 않는다. 한 올의 양심이 있다면 솔직하게 죄를 고백해라’ 그랬지. 그랬더니 바로 답장이 온 거야. ‘편지 고맙다’고. 그런데 정말 깜짝 놀랐어. 박한상이랑 유영철이 글씨체가 똑같은 거 있지?”

“기억나는 사람이 있어. 자기 아버지가 경찰관이었대. 동료들을 데리고 와서 개고기를 자주 먹었다는군. 그런데 개를 잡을 때 아주 잔인하게 때리잖아. 아버지가 그걸 꼭 자기한테 시켰대. 자긴 그게 너무나 싫었다는 거야.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거기에 익숙해지더래. 그 사람, 결국 살인을 저지르고 말았어. 교육·환경이 그렇게 중요한 거야.”

양 할머니는 “날 때부터 악인으로 태어나는 사람이 있는 것 같더라”면서 “사형제 폐지는 신중하게 고려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에게 “인생이란 무엇이라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할머니는 이렇게 답했다.

“인생? 죽는 순간까지 편안한 날 없는 게 인생이야. 그저 그러려니 하면서 파도를 헤쳐가야 돼. 불평하고, 시기하고, 원망하면서 적개심을 키워봐. 해결되는 게 있나. 자기만 힘들어질 뿐이야. 산다는 건 그런 거야. 그저 묵묵히 열심히 성실하게 가는 거라고.”

※양 할머니는 자신의 이야기를 ‘인생9단’(명진출판)이란 책에 담았다. 할머니는 “이별, 배신, 좌절 등으로 괴로워 하는 보통 사람들에게 인생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었다”며 “살인범 이야기는 끔찍해서 일부러 책에 담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범진 주간조선 기자(bomb@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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