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적자 618명에게 호적 만들어준 '할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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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적자 618명에게 호적 만들어준 '할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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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5.04.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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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2회 법의 날 맞아 국민훈장 모란장 받아

(서울=연합뉴스) 김상희 기자= "호적이 없으면 선거 때 투표도 못 하고 혼인신고도 못하죠. 공식적인 이름도 없고 의료보험 혜택도 받을 수 없고요. 그런 사람들을 제가 도와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25일 제42회 법의 날 행사에서 국민훈장 모란장을 받는 정종연(65)씨는 20여년간 남몰래 해온 '무적자(無籍者) 호적 만들어주기' 사업에 뛰어든 이유를 그렇게 설명했다.

정씨가 호적 만들어주기를 시작한 것은 1984년 12월 여수 여객선 터미널에서 한쪽 팔이 없는 열살짜리 구두닦이 소년을 만난 다음부터다.

정씨는 "집도 절도 없고 부모도 모르는 이 소년이 호적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두 달 간 순천지원을 다섯 번 오가며 내 돈을 들여가며 서류를 갖춰 호적을 만들게 해줬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그 후 무적자들이 정씨의 이런 선행 소식을 직접 듣거나 지역신문에 소개된 정씨의 사연을 알고 찾아와 도움을 청해 호적을 갖게된 사람은 지금까지 무려 618명에 달한다.

정씨는 무적자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려다 혼자 힘으로는 벅차다는 사실을 절감하고 정부부처에 15년간 투서와 청원서를 내는 노력도 병행했다.

그 덕택에 1999년 초 행자부가 전국 무적자 일제조사 및 취적지원 사업을 시행해 무적자 6천375명 중 이중호적자ㆍ기소유예자 등을 제외한 2천880명이 호적을 얻게 됐다.

"그때 호적을 얻은 사람들이 2000년 4.13 총선 때 난생 처음 투표를 해본 겁니다. 만세를 불렀죠"

이런 정씨에게 늘 보람만 있었던 게 아니었다. 우여곡절도 적지 않았다.

"어느날 갑자기 경찰서에서 오라는 거예요. 알고보니 내가 호적을 만들어준 사람이 기소중지 도중에 이중호적을 만든 거였어요. 피의자로 경찰에서 조사를 받다가 '누가 이중호적을 만들어줬느냐'는 신문에 내 이야기를 한 것이었죠."

경찰에서 진땀을 흘린 끝에 '호적 브로커'가 아니라는 사실은 입증됐지만 이런 수모는 무려 10여차례나 이어졌다.

집에서는 '돈도 안되는 일을 뭐하러 그렇게 열심히 하고 다니느냐'는 푸념도 들었다. 중국동포들의 이중호적을 만들려는 브로커들이 '접선'을 시도해오기도 했다.

정씨가 '돈도 안되는' 사업을 하는 이유는 선친이 남겨준 명심보감의 영향이었다.

"유학자였던 선친께서 제가 군대에 있을 때 명심보감을 보내주셨습니다. 3년 간 탐독했죠. 항상 남을 위해 살 줄 알아야 한다는 가르침을 마음에 새겼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정씨의 도움을 받은 사람 중 지속적으로 연락을 해오는 사람은 거의 없다.

   "이달 17일 제 아들 결혼식 때 제가 호적을 만들어준 250명에게 청첩장을 보냈는데 절반 넘게 반송됐어요. 주소 불명으로. 연락 오는 사람들이 거의 없어요."

정씨 덕분에 정신지체 아들을 호적에 올릴 수 있었던 90살 할머니가 축의금 10만원을 보내온 게 유일한 답례였다.

   정씨의 요즘 관심은 영등포 쪽방촌이다. 2000년 겨울 전남 여수의 가게를 정리하고 서울로 올라온 것도 '쪽방촌 아이들과 상담을 하고 싶어서'였고 앞으로 관심을 갖고 하려는 일이기도 하다.

   "2000년 12월 추운 겨울에 쪽방촌에 음식과 술을 사들고 가서 아이들과 먹고 마시면서 그네들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햇빛도 들지 않는 쪽방에서 사는 아이들이 500명이 넘습니다. 정부가 관심을 가져야지요."
   lilygardener@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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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등록일 : 04/25  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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