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중한국인 이미지 점검-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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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중한국인 이미지 점검-5
  • 흑룡강신문
  • 승인 2003.03.1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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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룡강신문 - 2002년 11월 13일

중한수교10주년기념 특별기획(북경특집)

(1)벼이삭은 여물수록 고개 숙인다-중앙민족대학 교수 박사생도사 /황유복

10년전까지만 해도 한국은 중국인들에게 있어서 가깝고도 먼 나라였다. 그러나 수교 10년만에 중국과 한국은 《우호협력관계》의 나라를 넘어 《동반자관계》의 나라가 되였다. 중-일수교보다는 20년 늦었지만 서로가 꼭 필요하다는것을 절감한 상황에서 수교를 단행했기 때문에 두 나라간의 선린관계는 재빨리 발전할수 있었다. 2001년 중국은 한국의 첫번째 투자대상국과 두번째 무역대상국으로 부상되였고, 한국은 중국의 세번째 무역대상국으로 되여 두나라 무역규모는 이미 300억달러를 넘어섰다.

지금 중국에 장기 체류하고 있는 외국인들 가운데 한국인들이 수자적으로 단연히 제1위를 차지하고 있다. 재중 외국인 류학생중 한국류학생도 제1위를 점한다. 지난 한해에 중국으로 류학온 한국류학생은 1만여명이나 되였는데 그 수는 점점 늘어나는 추세이다.

중한 두나라의 정치, 경제, 문화 교류는 급속히 발전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재중한국인들 한사람, 한사람 모두가 그 교류의 민간사절(使節)이자 주역이 될수 있기때문이다. 그러나 《외국인 장기체류자 제1위》라는 인프라가 구축되였다 해서 모든 것이 저절로 되는 것은 아니다. 20만 재중 한국인 모두가 민간사절로서의 사명을 훌륭히 수행했을 때 동반자로서의 두나라 교류는 계속 거족발전을 할수 있을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주변에서 두나라 교류의 발전에 역(逆)역할을 하는 한국인들을 가끔 보게 된다. 굳이 마약제조, 사기 등 의도적으로 범법행위를 저지르는 사람들을 거론하지 않더라도, 무의식적으로 두나라 선린관계의 발전에 마이너스 작용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한일 월드컵때의 일이다. 6월 21일자 상해 ≪청년보≫에 ≪한 한국녀자≫가 쓴 ≪내가 본 중국사람≫이라는 글이 발표되였다. 한국의 월드컵경기장에서 몇몇 중국인들이 한국축구팀의 선전(善戰)을 보면서 자기나라 일처럼 기뻐하며 응원하고 있었다. 글을 쓴 ≪한국녀자≫는 리해가 되지 않아 응원하는 중국인들에게 ≪왜 그렇게 기뻐하느냐?≫고 물었다. 중국인들은 ≪우리는 모두 아시아인들이잖아요. 당신들이 아시아를 대표해서 이기고 있지 않습니까, 아시아의 영광인데 물론 기쁘지요.≫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그런데 ≪한국녀자≫는 중국인들의 대답이 너무나 ≪황당무계하다≫고 쓰고 있다. ≪오늘의 국제경쟁은 국가대국가로 진행되고 있지, 주(洲)대주(洲)의경쟁이 아니다. 그리스인은 영국의 영광때문에 기뻐하지 않는다.≫ (이 ≪한국녀자)는 유럽공동체도 모르는 모양이다.) ≪우리의 승리는 우리 인민들의 영광이지 너희들이 거지처럼 구걸해갈것이 아니다.≫ 그 뿐만 아니라 이 ≪한국녀자≫는 글에서 ≪우리 서울대학교는 과학기술면에서 너희 북경대학을 훨씬 앞질러 나갔고, 우리 나라 기업(삼성, LG, 기아, 대우, 현대, JNC…)등은 폭풍마냥 너희 중국시장을 휩쓸고 있다.≫ 또 ≪류행면에서 중국의 대부분 국토는 이미 <한류>에 의해 완전히 소탕되고 말았다.≫라는 등등 중국인들을 자극하는 오만함과 방자함을 서슴없이 표출시켰다.

우리는 어느 나라 국민이든지 ≪오만한 자와 방자한 자들에게 등을 돌린다≫ 는 리치쯤은 알아야 한다. 월드컵때 중국인 젊은이층에서 일어난 반한(反韓)감정이 상기 ≪한 한국녀자≫와 같은 재중한국인들의 오만과 방자에 무관할수 없다.

그 당시 한국 매스컴들은 한국팀의 4강진출 과정에 일어난 일부 중국인들의 반한감정을 ≪중국인들의 대국주의의식 내지 고대의 종주국의식의 발로≫라고 한결같이 지적하고 있었다. 그러나 자세히 분석해보면 그러한 의식이 더 진하게 남아있는 50대이상 년령층의 중국인들은 도리여 한국의 4강진출을 긍정적으로 보는 사람들이 많았고, 반한감정으로 흐른 사람들은 대부분 ≪대국주의≫, ≪종주국≫의식이 제일 희미한 20대들이였다.

그들은 ≪한 한국녀자≫가 글에서 표현한 ≪<한류>에 의해 완전히 소탕된≫ 소위 ≪친한파≫들이였다. 물론 반한감정의 시원은 상업주의였다.(500만원 상금이 걸린 16강, 8강, 4강맞추기 T.V퀴즈응답에, 생각밖으로 선전한 한국팀 때문에 16강도 맞추지 못한)그러한 화풀이식 반한감정에 기름친것이 바로 일부 한국인들의 오만과 방자함이였다.

어느 나라 민족이든간에 그 나라 그 민족이 갖고 있는 문화적 장점이 있다. 우리는 외국에 갔을 때 그 나라나 그 민족의 문화적 장점을 겸손한 자세로 발견하고 배워야 한다. 오만과 방자는 세계화시대에 있어서 국가와 민족간의 우호교류의 금물이다.


(2)중국을 너무 쉽게 지어는 우습게 여기지 말자-고려문화경제연구회 회장 /김철

한·중 수교 열돐이 되는 시점에서 우리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된다. 그동안 많은 한국인들이 중국을 다녀갔고 또 많은 기업인들이 중국 곳곳에서 기업을 꾸리고 있다. 그들은 중한 경제교류나 두나라 친선을 위해 많은 공헌을 하였다. 대체로 한국인은 중국사람들에게 좋은 이미지를 심어주었다. 중국사람들은 한국인을 자기의 이웃으로, 친구로, 파트너로 호감을 갖고 대하고 있으며 그들에게서 많은 것을 배웠다고들 한다. 지척에 살면서도 먼 하늘끝처럼 아득했고 보이지 않은 높은 담을 쌓고 살던 시대는 영영 지나가고 교류와 친선의 물곬이 터진 좋은 시대라 할수 있겠다.

중국인 시각에 재중 한국인들은 매우 근면하고 사업성이 강하며 경영에도 능숙하다고 생각한다. 중국에 와서 사업하는 대부분 사람들은 (물론 전부는 아니지만)각자 부동한 일터에서 열심히 일하고들 있으며 자기의 기업을 살리기 위해 빈틈없이, 그리고 깐지게 사업을 짜나가고 있다. 이런 사람들은 거의가 다 성공한다. 이런 과정에서 그들은 중국사람들과의 신뢰와 우정을 쌓아가고 있으며 중국땅에 자기 기업의 기틀을 튼튼히 다져가고 있다.

물론 실패한 사례도 없지않다. 원인은 여러 가지다. 그중에서도 몇가지만은 각별히 교훈으로 섭취해야 할바라고 생각한다. 한 경제개발구 책임자의 경험담에 따르면 일본인은 처음이 까다랍고 뒤가 잘 풀리는데 한국인은 처음이 쉽고 뒤가 많이 꼬인다고 한다.

사업을 시작할 때 시장조사가 부족하며 계약서 작성이 미흡하다는 말이다. 한국사람들은 대체로 정이 많아서 파트너를 만나서 술 한잔 하면 곧바로 형님 동생하고 면밀하게 협상해야 할 사업문제는 동생이 알아서 하라는 식으로 마구 밀어맡기는 바람에 후에 많은 차질이 생기고 마찰이 생기다가 그것이 심각해지면 전반 합작이 깨지고 만다.

그리고 일부 사람들은 중국을 너무 쉽게 생각하고 지어는 우습게 여기고 달려들었다가 코를 다치는 수가 종종 있다. 중국은 그리 만만한 나라가 아니다. 너무 쉽게 생각하거나 우습게 여기고 달려들었다간 큰 코 다친다. 또 어떤 사업가들은 중국시장의 실황을 잘 모르고 너무나도 간단하게 혹은 단순하게 생각하고 계획을 짠다. 인구가 13억에서 내 상품 한사람이 하나씩만 사도 큰 돈이 된다는 식인데 천만의 말씀, 해역이 넓다해서 온 바다에 명태가 다 잘 잡히는것이 아니지 않는가

합작회사를 꾸리는 경우, 어떤 사장님은 사회주의체제에서 살아온 사람들과 자본주의 사회에서 습관된 사람과의 사고방식과 경영방식의 차이점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고 있다. 이 바람에 사사건건 마찰이 생기고 그것이 나중에는 파탄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적지않다. 같지않은 두체제와 환경속에서 물젖어온 사람들의 차이잠이나 이질성은 엄연한바 것이 하루이틀사이에 좁혀질수는 없다. 그러므로 서로 리해하고 양보하고 서서히 차이점을 좁혀가며 그실태에 맞는 방식을 조절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그리고 중국의 법과 정책규정을 사전에 잘알고 시작하는 것도 아주 중요하다. 법규를 무시하거나 알지 못하고 제나름대로 제속심대로만 생각하고 일을 벌렸다가는 다된 밥을 먹지 못하고 골탕을 먹은 사례도 한 두가지가 아니다. 대우그룹이 이 실패한 원인의 하나가 바로 이점에 있다. 중국의 법도 세부에 들어가서는 매우 까다로운 점이 많은데 이런것들은 사전에 잘 학습하고 연구하지 않다간 자칫하면 실수하게 된다.

그리고 또 극히 개별적인 사람들은 한국에서 부도가 나가지고 돈 한푼 없이 중국돈을 벌려고 왔다간 큰 소리 치고 거짓말 하고 신용을 안 지키는 바람에 중국정부의 신임을 잃고 한국인의 이미지를 흐리우는 사례도 있다. 물론 재중 한국인도 하나의 사회를 이루고 있기에 그속에는 좋은 사람도 많고 나쁜 사람도 있는것은 당연하며 자연스러운 지어는 리해할만한 일이기는 하지만 이런 소수인의 잘못된 소행으로 전반 한국인의 이미지를 흐리우는 것이 같은 동포로서는 매우 안타깝다.

나는 중국에 살고있는 조선족의 한 사람으로서 더 많은 한국인들이 중국에서 지구촌 어느 나라보다도 더 성실하게, 더 재치있게, 그리고 더 튼튼한 상호 신임관계를 구축하면서 훌륭한 기업들을 꾸려나가기를 진심으로 바라마지 않는바이다.


(3)미운 사람 고운 사람-중앙민족대학 교수/서영섭

나는 북경에 살면서 여기에 오는 한국분들을 종종 만나게 되고 사귀기도 한다.그들가운데는 한국인의 이미지를 흐리우는 미운 사람도 없지 않고 한국인의 이미지를 돋보이게 하는 고운 사람도 적지 않다. 여기서 인상깊은 두가지 사례만 적고저 한다.

그 하나는 7년전에 있은 일이다. 아주 멋지고 점잖고 미더워 보이는50대 한국인 한 남성이 스무나무살되여보이는 한 조선족처녀를 비서로 앞세워가지고 업을 벌리느라 할빈, 내몽골, 남경 등지를 전전하다 한동안 북경에 정착하였다.

마침 북경 한 의과대 교수가 새 의료기기를 발명하고서도 특허권도 신청하지 않은채 계속 연구에만 몰두한다는것을 알게 된 한국인 김모는 그 대학 관계부서와 왕교수를 꼬드겨 한국국제학술회의에 초청함과 함께 국제발명특허권신청을 도와드리겠노라 감언리설로 꾀여 결국 그 특허권신청서류를 가로채 가지고 몰래 자취를 감추었다. 독실한 기독교신자로 자선을 베푸는줄로만 안 그 한국인이 바로 위선자이고 사기군일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였다. 앉은자리에서 당하고난 당사자와 학교당국은 분하고 원통하기 그지없고 한국인이라면 아예 상대하기조차 꺼리지 않을수 없도록 되였다.미꾸라지 한마리가 온 강물을 다 흐린다는 말의 뜻이 새삼스레 떠오른다.

이와 대조적으로 2년전 본교 조문과에 객원교수로 일년간 와 계신 한국인 내외분에 대한 미담이 있다.사실은 그분이 객원교수로 초빙되고 부인은 가족으로 수행한셈이다. 객원교수로 초빙된 강신항교수는 고령에 여러 과목을 맡아 밤낮 바삐 보내시고 수행한 정량완교수 역시 고령에 지명으로 가사나 돌보면서 편히 쉬여도 무방하겠지만도 부군과 내기라도 하듯이 한국당대문학,강호문학,영어 강의,대학원생 론문지도까지 자진하여 하시느라고 여념없이 보내시였다. 학덕이 높기로 유명한 두분께서는 조예깊은 학문을 알뜰히 가르치느라고 로고를 아끼지 않았을뿐만아니라 사람을 사람답게 가르치기 위해서도 자식마냥 보살피시였다.

남을 도와주는것을 성직으로 아는 내외분께서는 오실때 숱한 돈을 팔아 세 학급의 수십명 학생들 몫의 교과서를 사다 나눠주었고 학생들에게 배포한 강의록복사본 복사료만 해도 만원 남아된다. 가실땐 평소 아껴쓰며 모은 거액으로 컴퓨터 여러대를 사서 선물했고 보던 귀중한 서적을 몽땅 자료실에 선물했으며 쓰던 생활필수품이며 가구, 옷가지 침구 등을 이웃들에 선사하였고 리발료나 채소대 거스럼돈을 받는 법이라곤 없었다. 남돕기를 자신의 락으로 삼는 그들은 이민족이웃들과도 무난히 친절히 지냈고 심지어 주택층계 손잡이에 쌓인 먼지까지 깨끗이 닦고하여 주민들 치고 존경과 칭찬을 표하지 않는 사람이 없도록 한국인의 이미지를 크게 높였다.

그러기에 떠날 땐 교원, 학생뿐만아니라 이웃들,리발사, 채소판매원 등 별의별 사람들까지 다 배웅을 나왔고 공항에선 석별의 찰나 흐느껴우는 학생들의 울음소리는 숱한 사람들을 경탄게 하였다. 내외분께서는 학문을 가르쳤을뿐만아니라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고 학문은 어떻게 터득해야 하며 일은 어떻게 해야 하고 사람은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를 실제 언행으로 가르쳐 주시고 본을 보여주셨다. 그래서 한국의 산<뢰봉>이라고 까지들 한다.

앞사례를 지적하고 고발함은 미운 사람을 경계하고 각성시키기위함이요. 뒤사례를 언급함은 그이같은 훌륭한 한국인의 본을 받아 남에게 사랑을 주고 도움을 주며 사는 참되고 바른 삶의 락을 만낄할수 있도록 홍보하려는데 있다.


(4)중요한 과제는 유명 브랜드의 개발-청화대학교수/ 정인갑

한국과 중국은 경제상 서로 보완의 관계에 처해 있다. 중국은 한국의 공산품(工産品) 및 기술의 시장이고, 한국은 중국의 농산품 및 원료의 시장이다. 한국이 중국 시장을 공략하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가? 여러 가지 면의 노력이 필요하겠지만 필자는 유명 브랜드 개발이 십분 중요하다고 본다.

한국은 1960-1980년대에 급속한 경제 성장을 이룩했지만 로동집약성으로부터 시작했으므로 물론 브랜드 개발에 여념이 없었을것이다. 그러나 1980년대 후반에는 꽤나 질이 좋은 제품을 배출하면서도 브랜드 개발에 소홀한 것이 차질이다. 그러므로 1980년대 후반부터 한국 제품이 중국 시장에 들어설때는 부득불 가격 전을 앞세워야 했다. 제품의 질이 타국에 못지 않아도 저렴한 각격으로 판매하는 수밖에 없었다. 중국인에게 준 인상은 "한국 제품은 질이 시원치 않지만 가격이 저렴하니까…"였다.

그러나 중국인의 소비 현황과 소비자의 심리 상태는 그것이 아니다. 가격이 비싸더라도 좋은 것을 추구하며 생활수준이 향상됨에 따라 이런 추세가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그러므로 한국 제품은 중국 시장에서 별 재미를 못 볼 수밖에 없었다.

최근 몇 년간 이런 관념이 변해가고 있다. 우선 한국이 유명브랜드개발에 박차를 가한 것이 근본 원인이며 중국인도 이제는 한국 제품도 일본, 미국 등 제품에 못지 않다는 인식을 하기 시작한다. 그러므로 한국 제품이 중국시장에서 활기를 띄기 시작하고 있다. 전형적인 례가 삼성 애니콜 핸드폰 등 전자제품, LG에어컨, 랭장고, 텔레비죤 등 가전제품이다. 애석한 것은 삼성과 LG의 상기 제품과 같이 중국인의 인정을 받을 수 있는 유명 브랜드가 너무 적다.

지금까지 한국의 의류가 중국 시장에서 재미를 보지 못하는 주요 원인은 한국 의류에 유명브랜드가 없기 때문이다. 한국에 가보아도 의류의 유명브랜드는 거의 다 구미유명 브랜드의 상표권을 사서 제작한 것이고 한국자체로 개발한 것은 거의 없다.

유명 브랜드 개발에는 기술 개발에만 신경을 쓸것이 아니라 심리적인 선술도 필요하다. 례를 들면 만약 삼성 애니콜 휴대폰을 지금보다 싸게 팔면 오히려 더 안 팔릴것이라고 필자는 본다. "내가 왜 싼 핸드폰을 써야 한단말인가"라는 중국인의 자존심을 건드리기 때문인 것이다. LG의 가전 제품도 지금보다 값을 올리면 오히려 더많이 팔릴지도 모른다. "한대 사면 죽을 때까지 쓰겠느데 최고로 좋은 것을 사야지"하며, 그러나 좋은 제품도 싸게 팔면 "싸구려"로 둔갑될 가능성이 있다.

유명 브랜드 개발에는 또한 광고에도 소홀하지 말아야 한다. 중국은 13억 인구의 대국인 데다가 중국인 인식 변화의 템포가 느리기 때문에 다른 나라보다 시간상 몇 배 길게 하여야 광고 효과가 생긴다. 말하자면 "삼인성호"(三人成虎)심지어 "십인성호"(十人成虎)가 되는 셈이다. 지금 중국인이 한국의 승용차에 대해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주요한 원인은 광고 등을 통해 중국인에게 인식시키는 노력이 따르지 못하는 것이 주된 원인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방법과 수단을 강구하여 중국인에게 인식시키는 것이 급선무일 것이다.

상품 경제의 활성화와 소비자의 소비 능력이 높아짐에 따라 상전(商戰)은 "브랜드 전", "이미지 전", "광고 전"일 것이다.


(5)조선족을 리용하는 행위는 삼가 했으면-리동춘

대한민국이나 한국인을 나쁘게 표현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 중 십상팔구는 한국인과의 거사에서 누구의 옳고 그름을 떠나 만족한 결과를 얻지 못했거나, 한국에서 마음만큼 대우를 받지 못했고, 또는 개별적 한국인들이 제 잘 살고 제 잘났다고 거만을 떠는 꼴이 미워서란다.

사실 대한민국으로 하여 우리 조선족들은 목돈을 벌어볼수 있는 기회가 생겼고, 타 민족보다 더 빠르게 산업화 사회를 접촉하게 되고 민족사회의 진보도 앞당기였으며, 중국에서 우리들의 위상도 한층 올라가게 된것이다.

특히 이번 월드컵의 4강 진출과, 대한민국 국민이 보여준 성숙된 모습은 정말로 눈물이 나도록 감격스러웠고 오히려 옛날 한국과 한국인에 대한 오해와 자기의 부족한 사고로 한국인들을 평가했던 점이 부끄러웠다.

한중수교 10년여간 중국 진출을 시도했던 한국기업인들의 파란많은 창업사를 들어보면 성공보다 실패, 순탄보다 곡절, 기쁨보다는 고통이 많았다는 것이다. 주 원인은 당시 중국의 투자환경이 성숙되지 못하였으므로 처음 진출한 한국 기업들도 유흥업, 보따리 장사 등 경영능력이 미숙한 상공인들인데다 금방 농촌과 학교에서 나온 산업현장 경험이 전혀 없는 햇내기 조선족들과의 만남으로서, 여건상 미숙한 산업현장이고, 상호 리용 관계의 한계에서 맴돌며 빚어지게 된 모순과 갈등이 많은 비중을 차지하지 않았나 한다.

초창기 실패의 원인중 한국인의 성급함의 작용이 크다고 생각한다. 조선족과 비록 언어는 통하지만 산업사회의 경험으로는 유치원생이란 것을 망각하고 자기들이 원하는 것을 당금 그들의 몸에서 찾아 첫술에 배를 불리려고 한 것이 잘못된 것 같다. 그 중 성공한 기업인들의 경험을 보면 일단 성급함을 가라앉히고 인내력 있는 마음가짐으로 중국을 실질적으로 관찰하고 분석하면서 중국인들의 취향에 맞추어 한동아리가 되여 준다. 그리고 그들이 배우면서 깨우칠수 있도록 가르치면서 기업일군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중국인들의 안목에서 한국인의 성급함은 경박스러움으로 취급받을 때가 많으며 오히려 역리용 당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는 것을 지적하고 싶다.

다음은 조선족의 허점을 리용하는 행위는 삼가해야 한다. 우에서 언급한바와 같이 한국은 그만한 산업 과정을 거쳤으니 조선족에 비해서는 선생이다. 그래서 발붙일때는 조선족의 힘을 빌고 일단 목적을 달성하면 조선족을 차버리는 행위들이 주변에 가끔씩 있다. 그것도 한족이나 정부의 힘을 빌어서 말이다. 그것은 동족간의 모순을 넘어 중국에서 조선족이 살아가는 립지를 망그러 뜨리는 것이며 서로 풀수 없는 한을 새롭게 맺는 것이라 생각한다.

한가지 실례를 들어보자. 흑룡강성 모시의 조선족 유지들이 무너져가는 조선족 사회의 새로운 구심점을 만들기 위해 조선족 집거구를 형성하면서 그 주위에 부지를 내여 대한민국 항일명장의 기념관을 세워 영웅의 뜻을 기리고 애국애족의 사상으로 젊은이들을 교육하고 관광산업을 발전시키면서 중한량국의 우의를 돈독히 하고 상호 발전을 도모하려는 목적으로 10여년의 노력으로 중국 정부의 인가를 따냈다(중국에서 외국인 영웅의 사적비 건설이나 기념행사는 금지되여 있다) 한국 정부에서도 그에 따라서 국회의 비준으로 십 몇억원의 자금을 지원키로 했다.

그 과정에 한국의 자금이 늦어지여 중국 당지 정부의 용지변경으로 정부측과, 한국측, 그리고 조선족 촌간에 대지 보상 문제로 쟁의가 빚어졌다. 나중에 조선족들이 양보하여 정부에서 지정한 조선족 민속공원의 중심위치에 4만 헥타르의 부지를 무상으로 제공하기로 했고, 정부측에서도 동의했다. 그런데 현지 조선족들과는 일을 않겠다고 하면서, 정부를 촉구하여 자그만한 삼각지 구석에 1만헥타르의 면적으로 부지를 정했다. 그 목적을 보면 조선족들은 이미 할 일은 다해주었으니 삐치지 못하게 함이요, 덕분에 돈도 이미 받았으니 예산계획보다 작은 곳에 건설하면 돈도 적게 쓰고, 일은 독단적으로 하겠다는 속궁리이다.

그래서 투자관리인사진도 모두 가정성원으로 바꾸고 현지 건축관리업자도 현지에서 얻은 한족애인이 소개한 사람으로 이른바 외인이 삐치지 못하는 관리진을 묶는 것이다. 이 목적 달성을 위해 짐짓 변호사까지 앞세워서 성정부 유관 기관을 찾아다니면서 지방정부와 조선족의 못마땅한 행위를 고발하여 성정부에서 지방정부로 공문까지 띄워 조사하게 만드는 등 졸렬한 수단까지 쓴다는 것이다. 결국은 한족들의 비웃음 투성이속에서 칼자루를 쥔 한국인이 승리하여 10년여 동안 고생한 조선족 유지는 완전히 배제당하면서도 한족들의 비웃음 거리로 되였버렸다는 것이다.

중국에는 나쁜 일이 좋은 일로 변한다는 말이 있다. 그 론리로 풀이하면 한국 국비로 건설되는 영웅의 기념관이 그 뜻 외에도, 한국인과 조선족간의 모순과 갈등으로 빚어진 기념관이 되여 후세에 교훈으로 남아 더 의미가 깊다는 것이다.

수천의 수종이 사는 강물에 미꾸라지가 안끼울수는 없겠습니다만은 극 소수의 사람들의 불미스러운 행위로 한국과 한국인의 얼굴에 먹칠하는것은 용서할 수 없는 일이다. 그들은 스스로 자아 성찰을 하면서 더욱 성숙된 자세로 행했으면 하는 바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