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어는 그 나라사람의 절반만 하는 것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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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어는 그 나라사람의 절반만 하는 것이 좋다
  • 김제완기자
  • 승인 2005.02.14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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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동포 이유진박사의 저서 <빠리망명객 이유진의 삶과 꿈>서 발췌

모국을 떠나 외국에 사는 사람들에게 가장 스트레스를 주는 것이 무엇일까. 나라마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현지 언어 문제가 수위를 다툴 것이다. 외국생활을 늘 힘들게하는 외국어에 대해 생각해볼 화두를 던지고 있는 프랑스 동포 이유진박사의 글을 소개한다.

비록 몇해전 영어공용론이 한국사회의 화두로 떠올랐을 당시에 집필했던 글이지만 그의 견해의 힘은 여전하다. 이박사는 이글에서 외국어는 그나라 사람의 절반만큼 하는 것이 좋다는 니체의 말을 들어 그의 생각을 보여주고 있다.

일전에 한국의 한 유명인사가 영어공용론을 주장했다고 한다. 세상에는 별별 사람들이 다 있는 법이니까 그다지 놀랍지는 않았다. 정작 내가 놀란 것은 그 의견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는 말을 듣고나서였다.

외국어는 목적 아니라 수단

내가 설마, 했더니 한 친구가 자기 학교 총장 얘기를 들려주었다. 우연히 총장과 같이 차를 타게 됐는데 자기가 얼굴을 안 보이고 영어를 하면 영국사람도 자기가 영국 사람인 줄 안다고 자랑을 늘어놓더라고 했다.
“총장님, 일단 모국어가 생기면 그 나머지는 전부 외국어입니다. 성대가 모국어에 맞도록 고정됩니다. 그래서 외국어를 아무리 잘해도 성대가 말을 듣지 않습니다.”

얌전하기 짝이 없던 내 친구가 한 마디 쏘아붙였단다.
“너 같은 물렁이가 어떻게 그런 용기를 냈니?”
“하도 꼴같지 않아서 학장직 내놓고 다른 학교 갈 생각으로 한 번 덤벼봤지.”

하기야 나도 그런 사람을 본 적이 있었다. 하마 30여 년 전 일이다. 한국 대사관에서 3·1절 행사를 한다기에 갔더니 대사가 자기 아들과 영어로 말을 주고 받는 것이었다. 조금의 부끄러움도 없이 오히려 자신들의 영어실력을 과시하는 태도였다.
그것도 3·1절에.

영어를 배우지 말자는 것은 아니다. 영어, 독어, 불어, 러시아어, 중국어, 뭐든 모국어처럼 열심히 배울 필요가 있다. 특히 영어의 중요성은 두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외국어는 필요에 의해 필요한 만큼 배우면 되는 것이지 모국어가 되라고 배우는 것은 아니다. 모국어처럼 잘 할 필요도 없다.

남들에게 자기 실력을 과시하기 위해, 혹은 모국어처럼 능숙하게 하고 싶어서 시간을 투자하는 것은 바보들이나 할 짓이다. 외국어는 수단이지 목적이 아니기 때문이다. 교수라면 자기 전공분야 책을 볼 수 있고, 외국 학자와 토론할 수 있는 수준이면 되는 거고, 무역업자면 외국 사람에게 물건을 팔 수 있는 수준이면 되는 거지 영국사람이나 미국사람과 똑같은 수준으로 말할 필요가 뭐 있는가? 니체가 그에 대한 명언을 남긴 바 있다.

니체에 따르면 외국말은 그 나라 사람의 절반! 정도 수준으로 구사하는 게 유리하다. 그러면 나머지 반은 본국 사람이 더 좋게 상상해준다는 것이다.
나 역시 그렇게 해서 덕을 본 적이 있다. 차를 몰고 루브르 박물관 앞을 지나는데 황색 신호등이 깜박거렸다. 서는 것보다 그냥 가는 게 나을 것 같아 달렸는데 경찰이 차를 세웠다.

“빨간 신호등인데 왜 정지하지 않았습니까?”
며칠 뒤 즉석재판을 받으러 갔다. 사람들이 줄을 좍 서서 간단하게 재판을 받는데 순순히 제 잘못을 인정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자기업무 수행 무리없게만

나처럼 빨간 불이 아니라 황색 불이었다는 둥 온갖 변명을 늘어놓았다. 하루종일 그런 사람을 상대해야 하는 판사는 얼마나 괴롭겠는가? 온갖 사람의 항의를 듣는 둥 마는 둥 3백 프랑, 5백 프랑 벌금형을 선고하는 것이었다. 내 차례가 되었다. 순간 니체의 말이 떠올랐다. 나는 불어를 잘 못한다는 듯이 더듬거리기 시작했다. 항의에 시달리던 터에 나같은 사람은 처음이었던지라 판사의 얼굴에 갑자기 미소가 떠올랐다.
“천천히 설명하세요. 프랑스 말은 내가 도와줄테니까.”

그래서 나는 손짓발짓 동원해가며 빨간 신호등이 아니라 황색 신호등에서 사거리를 지났다는 것을 더듬더듬 설명했다. 그러느라 제법 시간이 걸렸는데 판사는 나를 재촉하지도 않았고 화를 내지도 않았다. 내 말과 몸짓을 자기가 해석해가며 확인하더니 마침내 판사봉을 들었다.

“벌금 3프랑을 선고합니다.”
그 말에 나도 모르게 입이 활짝 벌어졌다. 벌금 3프랑이라니. 커피 한 잔 값 정도였다. 내 앞 사람들은 비슷한 사건이었는데도 최하 3백 프랑이었다.

“감사합니다. 재판장님께서는 참으로 명판사이십니다.”

너무 기쁜 나머지 나도 모르게 유창한 발음과 억양으로 감사의 인사를 하고 말았다. 주변 사람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잠시 후 법정 안은 키득거리는 웃음으로 가득찼다. 판사도 어이없다는 듯 웃고 있었다. 연극이었다는 걸 모두 알아차린 것이었다. 그러나 이미 배는 떠난 후였다. 그 나라 말을 못해서 덕을 볼 때도 있는 것이다.

영어의 노예 되지 말아야

다시 말하지만 외국어를 잘 해야 할 필요도 있고 잘 하는 것은 물론 좋다. 그러나 모국어로 삼자는 것은 망발이다. 사업이든 학문이든 외국어를 모국어처럼 잘 한다고 공용론자들이 좋아하는 국제경쟁력을 갖출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외국어보다 사고력이나 비즈니스 능력이 사실은 더 중요하다.

외국어를 모국어처럼 잘 하려고 시간을 낭비하느니 그 시간에 자기 전공에 필요한 다른 능력을 쌓는 것이 이른바 영어공용론자들이 그토록 애타게 부르짖는 국제경쟁력 제고를 위해서도 더 도움이 될 것이다.

국제경쟁력 제고를 위해 영어를 공용어로 삼자는 것은 이를 테면 인간의 편의를 위해 만들어낸 기계의 노예가 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발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