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입맛을 바꾼 떡볶이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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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입맛을 바꾼 떡볶이 사건
  • 오마이뉴스
  • 승인 2005.02.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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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2005.02.10 13:49:01]
        
 
 
[오마이뉴스 조석진 기자] 사람은 환경의 영향을 받는 것 같습니다.


한국 토속음식에 강한 집착을 보였던 우리 식구들이 이민을 와서 걱정한 부분도 그것이었습니다. ‘우리도 입맛이 변할까?’, ‘이곳에서 한국의 맛을 유지하며 살 수 있을까’하는 걱정이었습니다. 이민 첫해에 가게를 꾸리느라 정신없이 보냈는데 가게를 마치고 저녁 8시경에야 아이들에게 돌아오게 됩니다.


아이들은 학교 갔다 오후에 집에 돌아와 라면을 끓여먹고 빈그릇만 달랑 남겨 둡니다. 언제나 라면밖에 먹을 수 없는 아이들이 딱해보여 우리 부부는 ‘샌드위치 같은 것도 만들어 먹지 그래?’하고 운을 떼면 아이들은 한사코 라면을 고집했습니다. 김치를 담궈 먹을 경황이 없어 이곳 한국식품점에서 사다가 먹습니다.


어떤 상황이라도 김치만은 절대 포기하지 못하는 우리네 식성은 첫해의 막대한 김치소비량에서 잘 나타났습니다. 김치부침개, 김치찌개, 김치돼지고기 볶음 등이 우리집의 단골 메뉴였습니다. 가게가 쉬는 일요일 아침에는 느지막이 일어나 멸치로 국물을 낸 김치국밥을 끓이면 특히 딸아이가 좋아했습니다.


다행히 이곳 미시사가 중심지에 ‘한양식품’이란 조그만 반찬가게 겸 식품가게가 있어 여간 다행이지 않습니다. 첫눈에 주인 할머니, 할아버지는 캐나다 이민 원조세대로 보였습니다. 할아버지 인상에서 척박한 이국에서 정착하려 애쓴 이민 역정이 그려져 있는 듯하여 볼 때마다 안쓰러웠습니다.


마음이 따뜻한 주인내외는 단골이 된 저희가 계산대를 떠나려 할 때면 생색도 내지 않고 장꾸러미에 김치부침개나 떡을 슬며시 집어넣어 줍니다. 아이들은 그 반찬가게에 가면 부산 할아버지네 부엌 냄새가 난다며 싫어하지만, 우리가 어릴 적 먹었던 그 반찬 그대로 간직한 그 가게는 우리 이민생활에서 보배였습니다.


갓김치, 무우김치, 겉절이등 계절에 맞는 김치류랑 심지어 간장게장까지 선보여 이곳 햄버거류의 패스트푸드에 질린 우리들에겐 정말로 소중한 가게입니다. 그러던 아이들이 어느 때부터인가 점점 김치를 멀리 하더니 둘째 딸아이는 아예 김치를 가까이 하려 하지 않습니다. “여보, 우리 아이들도 이곳 영향을 받는 모양이지.” 이렇게 말하는 사이에 어느덧 아이들이 좋아했던 그 많던 라면 종류도 슬그머니 줄어들고 우리 부부도 이제는 매운 맛이 덜한 라면만 찾아다닙니다.


저는 고향이 부산이라 남포동 골목길의 ‘할매집’ 회국수가 한동안 생각났습니다. 투박한 양은그릇에 삶은 국수, 가오리회 몇 점, 생미역, 깐마늘, 양배추를 넣어 그 위에 고추장 양념을 듬뿍 얹어 버무려 먹는 그 유명한 할매집. 매운 입을 뜨거운 멸치국물로 달래며 먹노라면 음식을 먹는다기보다 너무 매워 어떤 수행에 가까운 체험을 하는 듯했습니다.


이민 오기 전에 들른 그 노포(老鋪)도 지금은 며느리가 이어받은 모양이었습니다. 메뉴판에 회국수와 별 연관이 없는 칼국수, 떡국 등이 보이길래 이유를 묻는 저에게 주인이 말했습니다. “아저씨, 요즘 아이들이 회국수 먹능교? 옛날 먹을 것이 없을 때 이야기지. 점포세 내기도 빠듯합니다.” 세태에 따라 장소에 따라 나이에 따라 식성도 변하는 모양입니다. 그래도 입맛이 이렇게 슬그머니 변하리라곤 생각지 않았는데 이유를 살펴보니 어떤 일이 떠오릅니다.


이민 첫해라고 기억됩니다. 그 날도 허겁지겁 일을 정리하고 집으로 달려와 하루종일 라면만 먹고 기다린 아이들에게 저녁을 지어주려 냉장고 문을 열었습니다. 그래도 일식당 개업을 염두에 두고 학원까지 다닌 제가 언제나 저녁을 준비합니다. 아내보다 음식을 잘 만들고 또 빨리 만들기 때문입니다. 눈에 띈 것은 떡볶이재료였습니다. 떡볶이를 만들려고 서둘렀는데 냉장고 안에는 며칠 전에 사다놓은 깐마늘도 보였습니다.


오래 두면 곰팡이가 슬어 먹지도 못하고 버릴 것같아 벌겋게 풀어놓은 고추장 국물에 마치 김치를 담구듯 깐마늘을 마구 으깨어 넣었습니다. 마늘을 남겨놓으면 안된다는 생각과 빨리 만들어야된다는 생각에 피곤한 몸과 마음까지 겹쳐서인지 아무 생각없이 넣은 그 마늘 맛으로 그날따라 떡볶이가 무척 매웠다는 기억밖에 없습니다. 아침에 물어보니 다들 숙면을 하지 못하고 밤새 속이 쓰려 뒤척였다던군요. 얼굴이 다들 퉁퉁 부어있었습니다.


그날 이후 “떡볶이나 만들어 먹을까?”하는 제말에 아이들은 이구동성으로 소리칩니다. “아니, 아니! 하더라도 엄마가 만들어줘!” 그날 저녁의 떡볶이가 우리네 이민생활에서 입맛을 변케한 결정적인 계기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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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이민 생활의 단상입니다. 저는 토론토 인근 미시사가시에서 세탁소를 경영하는 재외동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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