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IP 재외동포들의 가슴아픈 과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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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P 재외동포들의 가슴아픈 과거사
  • 김진이기자
  • 승인 2005.01.27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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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이상씨를 망명자로 만든 동백림사건

동베를린 간첩단사건이라고도 불린다. 1967년 7월 8일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이 동베를린을 거점으로 한 반정부 간첩단사건으로 발표하면서 알려진 사건. 당시 철학박사였던 임석진이 귀국해 자수함으로써 밝혀졌는데 검찰 공소장에 따르면 북한은 1957년부터 동베를린에 거점을 두고 대남공작 경험자인 동독대사 박일영과 조선노동당 연락부 대 유럽 공작 총책인 이원찬을 상주시켰다. 

이들은 막대한 공작금을 동원해 서독을 비롯한 서유럽에 재학 중인 유학생 및 각계·각층의
장기체류자들에게 심리적인 공작을 시작했다는 것이다. 1967년 12월 3일 선거공판에서 관련자들에게 국가보안법·반공법·형법·외국환관리법 등을 적용해 조영수·정규명에게는 사형, 정하룡·강빈구·윤이상·어준에게는 무기징역 등 피고인 34명 모두가 유죄판결을 내렸다. 그러나 이 사건은 화가 이응로, 윤이상씨와 몇몇 재독일 유학생들이 동베를린을 구경하고 돌아온 것을 두고 북한의 배후 조종에 따른 어마어마한 간첩단 사건으로 확대 조작한 것에 불과했다. 이 사건으로 세계적인 음악가 윤이상씨는 독일에 망명해 평생을 조국을 그리워하다 생을 마쳤다. 

미 법원도 인정한 가짜 간첩사건
구미유학생간첩단 사건은 1985년 안기부 발표에 따르면 미국 웨스턴 일리노이대학에서 만난 양동화 김성만 황대권씨 등이 재미 북한공작원 서정균에게 포섭되어 간첩이 된 후 국내에 들어와 극렬학생에게 공작금을 주는 등 간첩 활동을 했다는 것이다. 강용주씨는 이때 고교 선배인 양동화에게 포섭돼 전남대 민주화투쟁위원회를 결성해 학원가 폭력시위를 주도했고 미문화원 타격 예비음모 등에 참여한 혐의를 받아 86년 1월20일 1심에서 사형을 구형받고 다시 2심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강용주씨는 항소이유서에서 양동화씨를 고등학교 동문 동아리에서 처음 만났으며 그후 가깝게 지냈으나 1984년 9월경 미국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양동화씨를 만난 것은 평소의 친분에 따라 오랜만에 귀국한 선배의 안부를 묻고 미국 생활에 대한 호기심에서 그에 대해 듣기 위한 것이였을 뿐이라고 밝히고 있다. 강씨는 안기부에서 두 달 동안 폭력과 고문에 못이겨 그들이 시키는대로 했다고 주장했다. 

당시 미국법원의 판결은 이 사건이 얼마나 허위였는지를 잘 보여준다. 한국정부가 발표한 이 사건의 내용을 그대로 인용 보도한 미주 발행 6개 신문사가 관련자의 명예훼손 소송으로 각각 1만5천달러 씩의 배상을 해야 한다는 판결이 89년 2월 2일 미연방 버지니아주 동부지방업원에서 나온 것이다.


한사람의 인생을 바꾼 이유진사건
1979년 한영길사건의 주역인 이유진씨는 1963년 서울대 문리대 심리학과 졸업 후 프랑스 심리학을 한국에 소개하겠다는 학문적 열망으로 유학을 프랑스 유학을 떠났다.

당시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 파리 무역관 부관장이던 후배 한영길 씨가 문책성 인사를 피해 정치 망명을 시도하면서 도움을 요청해 오면서 이유진씨의 인생이 바뀌었다. 부탁을 뿌리치지 못한 그는 프랑스 대사관으로 후배를 인도한다. 그러나 얼마 후 한영길 씨가 중앙정보부에 의해 압송되면서 그는 북괴 공작원이자 한영길씨의 딸을 납치했다는 아동 납치범의 누명을 쓰고 만다. ‘르 몽드’, ‘리베라시옹’ 등 프랑스 언론은 박정희 정권의 정치 공작이라며 그를 옹호했다. 그러나 레드 콤플렉스가 뿌리 깊은 한국에서는 그에게 간첩 낙인을 찍었고 그의 프랑스인 지기들마저 간첩단으로 몰았다. 프랑스 교민 사회에서도 그는 기피 대상자가 되었다. 결국 그는 평생의 대부분을 파리에서 보냈고 파리의 이방인으로 오늘을 살아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