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중국은 역사상 한국의 일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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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중국은 역사상 한국의 일부였다
  • 심백강 민족문화연구원장
  • 승인 2021.10.25 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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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백강 민족문화연구원장
심백강 민족문화연구원장

중국의 국가주석 시진핑은 2017년 당시 미국 대통령 트럼프를 만난 자리에서 “한국은 역사상 중국의 일부였다.”라는 망언을 하였다. 오늘의 한반도가 역사상 중국 땅의 일부였다고 만천하에 공포를 한 것인데 시진핑은 무슨 근거로 이런 주장을 하였을까. 아마도 중국 공산당이 조작한 동북공정의 논리를 바탕으로 한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한국의 국격과 국위를 여지없이 손상시킬 뿐만 아니라 가위 국본을 송두리째 뒤흔드는 이런 망언이 나왔을 때 한국은 정부 차원에서 즉각적인 반박성명이 나왔어야 했다. 그러나 역사의식이 부족했던 한국정부는 함구하고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이는 결과적으로 시진핑의 망언을 승인하는 꼴이 되고 말았다. 

국가의 근본을 건드려도 아무런 반응이 없자 한국을 얕잡아 본 중국은 최근 들어 김치와 한복마저도 중국이 원류라는 억지 주장을 서슴없이 늘어놓고 있다. 역사 침략을 넘어서 문화침략을 자행하고 있는 것이다. <주역>에 “서리가 내리면 그 다음은 차가운 얼음이 얼게 된다.”라고 말했다. 역사, 문화 침략 다음에 올 것은 무엇일까. 옛날에 중국 땅의 일부였으니 한국 땅덩어리를 내놓으라고 윽박지르지나 않을는지 모르겠다. 생각만 해도 소름 끼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다만 시진핑 주석이 “한국은 역사상 중국의 일부였다.”는 망언을 하고 문재인 정부가 엄중하게 대처하지 못한 채 침묵을 지켰던 것은 양국의 지도자가 한국 역사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부족했던데 기인한 것이다. 이러한 사태의 최종적인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 것인가. 광복 75년이 흘렀건만 식민사관을 청산하지 못한 채 올바른 한국사를 제대로 정립하지 못한 한국의 강단사학자들에게 가장 무거운 책임이 돌아갈 수밖에 없다고 하겠다.

“중국은 역사상 한국의 일부였다”(저자 심백강) 표지
“중국은 역사상 한국의 일부였다”(저자 심백강) 표지

여기서 한국과 중국의 역사에 대한 기존의 인식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 확인하기 위해 몇 가지 사례를 들어 설명하고자 한다.

1. 만리장성의 마지막 관문 ‘거용관’

한고조 유방의 손자 유안(劉安)이 쓴 <회남자淮南子>에 의하면 천하의 9새(塞) 즉 만리장성의 아홉 관문을 설명하는데 동쪽의 마지막 관문이 거용관(居庸關)으로 되어 있다. 이는 한나라 때는 만리장성의 동쪽 끝이 지금의 산해관이 아니라 북경 부근의 거용관임을 말해준다.

현재의 중국 지도상에는 만리장성의 동쪽 끝이 산해관으로 되어있는데, 거용관에서 산해관까지의 장성은 명나라 때 주원장이 부하 장수 서달(徐達)을 시켜 축성한 ‘명나라 장성’인 것이다.

지금 중국의 사회과학원에서 만든 지도에는 만리장성의 길이를 고무줄처럼 늘여서 압록강을 넘어 청천강까지 연결시켜 놓았다. 이것은 너무나 어처구니없는 짓이라서 길게 논할 가치도 없지만, 한나라와 고조선의 국경을 청천강이라고 주장한 일제의 식민사학과 그것을 지금까지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 한국의 강단사학이 그 원죄다.

진시황 만리장성의 동쪽 끝은 거용관까지 왔었고 유방의 한나라 시대에는 서쪽은 만리장성을 더 늘려 쌓았지만 동쪽으로는 성을 늘려 쌓았다는 기록이 없다. 그러므로 진, 한시대의 만리장성의 동쪽 끝은 거용관이었던 것이며 북경의 거용관을 경계로 그 서쪽은 중국 땅이고 동쪽은 고조선 땅이었다. 즉 오늘의 북경시 일대는 한나라시대에는 고조선의 영토였던 것이다.

2. 요나라 이전에 요녕성에 ‘요하’는 없었다

1,500년 전 남북조시대의 대표적인 학자였던 유신(庾信)은 형가(荊軻)의 역수가(易水歌)로 유명한 하북성 남쪽의 역수를 요수(遼水)라고 말했다. 중국 요녕성의 요하를 중심으로 그 동쪽을 요동, 서쪽을 요서라고 인식한 것은 요녕성이 거란족의 영토로 된 요(遼)나라 때부터 이다. 그래서 지금의 요하는 고구려시대에는 요하가 아니라 ‘구려하’로 〈성경통지(盛京通志)〉에 기록되어 있다. 한마디로 말해서 요녕성이 거란족이 세운 요나라 영토로 편입되기 이전에는 요녕성에 요하는 없었던 것이다.

<사기> 흉노열전의 기록에 따르면 고조선시대에 연나라의 장수 진개(秦開)가 고조선 서쪽 땅을 기습하여 1,000여리 땅을 빼앗아 상곡군, 어양군, 우북평군, 요서군, 요동군 5군을 설치한 내용이 나온다. 고조선시대의 요서, 요동군은 당연히 상곡군, 어양군, 우북평군과 함께 오늘의 하북성 쪽에 있었으며 요녕성에 있지 않았다.

한, 당시대의 요서군, 요동군은 거란족이 세운 요나라 시대의 요서, 요동과는 위치가 완전히 달랐던 것이다. 그런데 식민사학이 요나라 시대의 요서, 요동을 한나라 시대의 요서군, 요동군과 같은 위치로 착각을 일으켰고, 이것이 한국사가 송두리째 뒤틀리고 압록강 서쪽의 북경을 포함한 한국의 역사영토가 싸우지도 않고 모조리 중국에 빼앗겨 한반도 안으로 축소되는 발단이 된 것이다.

3. 하북성 갈석산이 한무제 당시 한과 고조선을 가르는 분계선

<전한서前漢書> 가연지전(賈涓之傳)에는 한무제가 “동쪽으로 갈석산을 지나서 낙랑, 현도군을 설치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때 한무제의 군대가 만일 한반도를 진격하여 대동강 유역에 낙랑군을 설치했다면, 백두산을 지나서 낙랑군을 설치했다고 하거나 청천강을 넘어서 낙랑군을 설치했다고 말했을 것이다. 

왜 하필이면 대동강에서 수 천리나 떨어져 있는 갈석산을 들먹였겠는가. 하북성에 있는 갈석산(북경 남서쪽 170km)이 한무제 당시 한과 고조선을 가르는 분계선이었기 때문에 갈석산을 넘어와 고조선의 서쪽영토를 침공하여 한의 군현인 낙랑, 현도군을 (지금의 북경 부근에) 설치한 것이다. 한무제가 대동강 유역에 낙랑군을 설치했다는 것은 한국의 역사영토를 압록강 안쪽으로 축소시키고 중국의 역사영토를 청천강까지 확대시키기 위해 사대사학, 식민사학이 날조한 것이며 역사의 진실이 아닌 것이다.

4. <사고전서>는 “중국은 역사상 한국의 일부였다”고 말한다

청나라 건륭황제가 국력을 기울여 편찬한 중국 사료의 보고인 <사고전서> 안에는 “한국이 역사상 중국의 일부”였던 것이 아니라, 그와는 정반대로 “중국이 역사상 한국의 일부였다”라는 것을 보여주는 자료들이 차고 넘친다.

나는 역사학자의 한 사람으로서 시진핑이 “한국은 역사상 중국의 일부였다”라고 망언을 하였을 당시 <사고전서>의 이런 자료들을 바탕으로 즉각 반박하며 그 해명을 요구하는 공개질의서를 시진핑 주석이 거주하는 북경의 중남해와 주한중국대사관 등에 보낸바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 어떠한 해명도 사과도 답변도 들은 바가 없다.

이에 <사고전서>의 새로운 자료를 바탕으로 ‘발해만에서 건국한 발해조선’, ‘천하를 경영한 고구려제국’, ‘왕과 제후를 거느렸던 대륙백제’의 역사를 다룬 논문들, ‘중국은 역사상 한국의 일부였다’라는 주제로 발표한 자료, 또 ‘시진핑에게 보낸 공개질의서’ 등 관련자료를 한데 모아 한권의 책으로 묶어낸다. “중국은 역사상 한국의 일부였다”

5. 중국은 중원의 한족과 동북방의 동이족이 번갈아가며 통치했다

오늘의 중국이 있기까지 한족은 물론 조선족, 흉노족, 돌궐족, 거란족, 몽골족, 여진족 등 아시아의 여러 민족 조상들의 피와 땀과 눈물이 보태진 것이다. 따라서 역사상의 중국은 조선족의 나라도 한족의 나라도 흉노족의 나라도 몽골족의 나라도 여진족의 나라도 아니며, 이들 민족이 함께 어울려 이룩한 나라다. 그래서 중국을 다민족 통일국가라 하는 것이다.

2,000년 전, 유방이 한나라를 세워 한족이 중국무대에 등장한 이후 한, 당, 송, 명은 한족의 나라이고, 요, 금, 원, 청은 거란족, 몽골족, 여진족, 신라족의 나라였던 것이 그것을 증명한다. 한족의 뒤를 이은 당, 송, 명도 중국역사의 주인이고 동이족의 뒤를 이은 요, 금, 원, 청도 중국역사의 주인이다. 

중국 역사의 뿌리로 올라가면 홍산의 밝족과 만나게 되는데 이들 홍산의 환국 밝족이 바로 한국인의 직계 조상이다. 우리 한국인들은 먼 옛날 조상들이 중국의 토착민, 선주민으로서 전 중국에서 가장 살기 좋은 땅 발해 유역에 터를 잡고 여기서 홍산문화를 창조하여 황하문명의 모태가 되었고, 여기서 발해조선을 건국하여 중국문명의 기초를 닦았다.

6,000년 전, 7,000년 전, 8,000년 전 중국은 환국 밝달민족의 나라였다. 동북방 밝족에서 발원하여 서쪽으로 흘러간 한 갈래가 화하족이고 동쪽으로 흘러간 한 줄기가 동이족이다. 3,000년 전, 4,000년 전, 5,000년 전의 중국은 서방의 화하족과 동방의 동이족이 서로 정권을 주고받은 시기였다. 

6. 한, 중 양국의 우의와 평화를 염원한다

나는 한글보다 한자를, 한국사보다 중국사를 먼저 배웠다. 나야말로 뼈속까지 친중주의자라고 말할 수 있다. 나는 지금은 한국인이지만 지난날 우리 조상들은 대륙을 누빈 중국인이었다. 나의 몸속에는 중국의 피, 대륙의 피가 흐르고 있기 때문에 나는 한국 못지않게 중국을 사랑한다.

러시아 연해주에는 발해, 옥저의 유적이 남아있고 몽골초원에는 부여, 고구려의 발자취가 남아있으며, 발해만을 끼고 그 주변엔 고조선, 백제, 고구려의 숨결이 살아 숨쉬고 있다. 바이칼은 우리 역사의 출발점이고 발해만은 우리 문화가 꽃을 피웠던 곳이며 한반도는 한민족의 최후의 정착지이다. 오늘 한국인은 한반도라는 좁은 땅에 살고 있지만 우리의 혈관 속에는 웅혼한 대륙의 피가 흐르고 있는 것이다.

나는 두 가지 이유에서 이 책을 썼다. 첫째, 시진핑은 “한국은 역사상 중국의 일부였다”라고 말했지만 그 근거를 분명히 제시하지는 못했다. 어떤 주장이 근거를 통해서 뒷받침되지 않으면 공허한 구호에 불과할 뿐이다. 나는 “중국은 역사상 한국의 일부였다”라는 나의 주장이 구호로서 그치지 않고 자료로서 뒷받침되게 하기 위해 이 책을 썼다. 둘째, 역설 같지만 반중정서를 자극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중국과 한국을 아울러 사랑하기 때문에 한, 중 양국의 우의와 평화를 염원하여 이 책을 썼다. 

“중국은 역사상 한국의 일부였다”(저자 심백강)의 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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