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명생활 청산하고 고국서 살고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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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명생활 청산하고 고국서 살고싶어
  • 김진이기자
  • 승인 2004.12.10 00:00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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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성봉 편집위원장이 만난 사람 - 재독학자 김성수 박사>

국내에서 국보법 폐지논쟁이 계속되고 있다. 정치적인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고통을 받았던 사람들은 국내뿐 아니라 외국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생각의 차이만으로 오랜 세월 고국 땅조차 밟지 못하고 살아왔던 사람들, 재독학자 김성수 박사도 그들 중 한명이었다. 다행히 김박사는 작년 9월 ‘해외민주인사 모국방문단’에 소속돼 고국의 땅을 밟을 수 있었다.

최종길 교수 사건, 유학생 간첩단 사건 등에 연루돼 정치망명자가 됐던 김박사. 37년만에 찾은 고국에서 할말이 많지만 그는 애써 표현을 삼갔다.
첫 방문 후 1년만에 다시 고국을 찾아 영구귀국 가능성을 타진하고 있는 김박사를 재외동포신문의 강성봉 편집위원장이 만났다.
 

   
▲ 김성수 박사

△강성봉 편집위원장=우선 독일동포사회가 궁금하다. 독일은 다른 동포사회와 특수한 면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독일의 동포들이 어떻게 구성이 돼있고 어떻게 살고 있는지 편하게 얘기해달라. 

△김성수박사=60년대 중반에 간호사들과 광부들이 대량으로 오기 전에는 주로 유학생들이 중심이었다. 60년대 중반부터 10여년에 걸쳐 광부들과 간호사들이 왔다. 동독의 경우 북한대사관이 있고 예전에는 우리 유학생들이 못갔지만 북한의 유학생들도 있었다.  

동포들의 고국정착 어려움많아

△강위원장=당시 간호사나 광부들이 정착과정의 어려움이 컸을 것같다. 

△김박사=당시 광부들의 경우 독일에 온 목적 중 돈을 벌자는 것 말고 미국에 가기 위한 발판을 삼자는 이들도 많았다.  또 광부 중에 몇사람 공부를 해서 고국에 돌아간 사람도 있다.

대표적으로 이종수씨라고 전남대 교수도 하고 KBS이사장이 된 이도 있다. 당시 광부들이나 간호사들이 번 돈은 그리 큰 돈이 아니었지만 가족들에게 그들이 보낸 돈이 굉장히 큰 힘이 됐다. 그런데 70년대 되면서 독일경제에 광부들이 별로 필요하지 않게 돼 독일에서 이들을 쫓아내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그들이 결혼해서 자식들이 생기니까 안착을 하려고 하는데 독일에선 정착을 막고. 어려움이 많았다.   

△강위원장=유럽내의 동포들만 해도 프랑스나 독일, 영국이 다르다고 들었다. 전세계의 동포들이 고국을 위해 기여한다고 할 때도 이념적 편차를 극복하는 게 대단히 중요한 과제라고 생각한다.

△김박사=한인회장하는 과정에 동포문제가 드러난다는 걸 나도 알게 됐다. 독일에선 교회쪽에서 제안이 와서 아까 말한 독한공동체를 만들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정치적인 문제가 터졌다. 60년대 동백림 사건(동베를린 간첩단 사건)이 있었고 70년대 내 문제이기도 했는데 최종길 교수 사건과 재독 유학생 사건이 터졌다.  

△강위원장=최종길 교수 사건에 대해 자료를 찾아본 바로는 선생과 어떠한 연관도 없던데. 

△김박사=실제 연관이 없다. 최종길 교수 등 기타 40여명을 그냥 엮어버렸다. 다들 관련이 없었는데 사건을 만들어버렸다. 6명이 주동인물로 신문에 나왔는데 그 중에 나를 넣어놓았더라. 

△강위원장=신문에서 조직도라도 만들었던가. 

△김박사=(웃음)그건 아니다. 그냥 중심적인 인물로 넣었더라. 

△강위원장=그 당시 소식을 한국 신문을 통해 어떻게 알게 됐나? 

△김박사=그때는 한인회장 그만두고 독한 사업공동체할 때였다. 당시 한국일보를 하나 구했는데 내 이름이 어마어마한 사건에 들어있더라. 해럴드트리뷴을 사서 보니 거기 또 내 이름이 들어있어. 진짜 야무지게 걸렸구나 생각하고 독일사람에게 가있었지.
내가 다니던 교회에서 스페인으로 비용이 저렴하게 수양회를 갔던 일을 가지고 그게 이북에서 돈을 받아 그렇게 싸게 갔다는 소문이 돌았다. 이북에 큰집을 사두었다는 소문도 있었다. 나를 알았다는 게 죄가 되고 공포가 순식간에 퍼졌다.

가만있으면 안되겠다 싶어 동포들에게 얘기했다. 독일의 유명한 사회학과 교수 3명이 기자회견을 하면서 독일 신문이 다뤄주었다. 내가 공격적으로 나가니까 대사관과 외무부가 수세에 빠지게 됐다. 그렇게 74년 정치망명을 하게 됐다. 

△강위원장=87년 재독 광부 간첩사건에 배후인물로 지목됐는데. 

△김박사=어째 자꾸 그런 거만 물어보나. 국정원에서 나오셨나.(웃음) 

△강위원장=자료를 조사했는데 그 부분에 대해 별로 나온 게 없더라. 김형규라고 하는 광부가 고국에 들어와 김선생에 대해 얘기했고 나중에 무릎꿇고 사과했다고 들었는데.  

△김박사=그때 노동자 연맹이 생기고 재독여성모임이란 게 생겼다. 그 다음에 내가 독일 땅에서 활동하려면 독일사람들의 협조가 필요하다는 생각에서 한독연대위원회를 만들었다. 그게 뿌리가 돼서 코리아하우스가 됐다.

안기부에서는 당시 이런 단체에 사람들이 가까이 하지 못하게 했다. 그런 상황에서 김모씨란 사람이 모임이 있으면 오고가고 관심도 또 있고 그랬다.  그 사람 친척 중 서울대도 나오고 고급 관료로 일하는 사람이 독일 출장을 와서 2주일 동안 김형규씨 집에서 머물게 됐다.

그동안 의식이 좀 높아진 김씨와 그가 토론이 붙었다. 새로운 각도에서 김씨가 문제제기를 하니까 “너 빨갱이 다됐다”고 하고 일주일만에 가버렸다. 가서 김씨 아버지에게 “당신 아들 빨갱이 다 됐더라”고 얘기를 했다. 김씨는 집에서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소식에 의심을 하면서도 들어갔다. 가족들이 빨갱이가 됐다는 소식에 먼저 신고를 해버린 거라.

이념논쟁 동포사회 분열시켜

△강위원장=송두율교수가 재독 고정간첩 ‘김철수’는 본인이 아니라 김성수 박사라고 밝혔다는 애기가 있는데.

△김박사=당시 독일 내에 돌던 소문을 송교수가 듣고 자신이 빠져나갈 욕심에 그렇게 얘기했던 것같다. 송교수가 고국에 무척 오고 싶어했었구나 하고 생각한다.

△강위원장=김박사 본인이 국보법의 피해자이기도 한데 국내에서는 한나라당이 거세게 반발하고 있고 열린우리당도 무리해서 통과시키지 않겠다는 입장이다. 국보법 폐기가 좀더 현실성있으려면 어떻게 하면 좋겠나. 

△김박사=순리적으로 되려면 국민들이 그만큼 납득을 해야하지 않을까. 또한가지 국보법이야말로 남과 북의 문제가 연결돼있으니 남북이 평화적으로 교류하면서 살아가야 하지 않을까. 남북이 잘사는 모습이 현실적으로 보여지면 거기에 국보법이 걸림돌이 된다는 걸 스스로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강위원장=영구 귀국을 준비 중인 것으로 아는데. 

△김박사=가능하다면 있고 싶다. 상황을 봐야할 것 같다. 가능하다면 고국에서 강의를 할 수 있기를 바란다.                          

김성수 박사 약력 
-1936년 화순 출생 
-연세대 철학과 및 동대학원 졸업 
-1966년 독일 유학 
-프랑크푸르트대학에서 정치철학 박사학위 
-1970년 프랑크푸르트 한인회 회장 
-최종길 서울대 교수 고문치사 사건 관계자로 지목 
-1973년 유학생 간첩사건 관계자로 지목 
-1987년 파독광부 간첩단 사건의 배후 인물로 지목  
-2003년 9월 ‘한가위 해외민주인사 고국방문’단으로 귀국 
-현 한독문화원 원장


정리=김진이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