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사까 코리안타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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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사까 코리안타운
  • 임영언(세계한상문화연구단)
  • 승인 2004.11.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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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류와 재일코리안 사회의 새로운 변화
1. 일본에서의 뉴커머 소기업의 탄생배경

지난 10월22일부터 26일까지 오사까성 공원에서 열린 ‘원코리아 페스티발’에 다녀왔다. 이 행사에 참가하는 것 자체가 중요한 방문목적 이었지만, 무엇보다도 이번 기회에 오사까 재일코리안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새로운 변화의 바람을 감지할 수 있었던 것이 큰 수확이었다. 세계화와 한국의 여행자유화조치로 인한 한일왕래증가, 월드컵 공동개최, 한류 등의 뿌리를 찾아보고 최근 오사까지역 재일코리안 사회의 변화를 간단히 알아보고자 한다.

일본에는 현재 재일코리안이라고 불리우는 올드커머와 뉴커머, 단기체류자를 합하여 약100만 명 가량이 생활하고 있다. 올드커머는 전쟁전후 세대, 뉴커머는 1980년대 전후를 기준으로 도일(渡日)한 사람들로 대략 분류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올드커머와 뉴커머를 한단어로 포괄적으로 아우르는 것이 ‘재일코리안’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재일코리안이라는 개념이 ‘한국적/ 조선적’의 구분, 그리고 이념과 사상을 초월한다는 점이다.

이러한 재일코리안의 탄생은 80년대이후 일본에서 뉴커머의 증가와 한류와도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뉴커머기업은 원래 세계화와 더불어 한국정부의 89년 “해외여행자유화”조치 이후 도쿄를 중심으로 취학생(일본어학교 학생)이나 유학생, 주재원들이 늘어나면서부터 형성되었다. 이들을 상대로 장사를 하는 한국가정요리, 비디오나 식료품가게가 주업종이었다. 최초의 중심고객은 스나쿠(스낵)나 크라브(술집클럽)에서 일하는 여성들이었다.

이러한 여성들은 일본어가 서툴기 때문에 일본문화에 쉽게 적응할수 없었으며 자동적으로 한국음식이나 문화상품을 찾게되었고 이러한 크라브나 스나쿠가 집중되어있는 지역을 중심으로 뉴커머의 소기업이 형성되었다. 예를들어 현재 뉴커머 소기업의 가장 큰 상권을 형성하는 쇼쿠안도오리나 오쿠보도오리, 아까사까, 우에노, 닛뽀리, 긴시초, 코이와 지역들이 이에 해당되며 거의 대부분의 뉴커머 소기업이 집중되어 있다.

뉴커머소기업의 이러한 탄생 배경과 더불어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 또 한가지 있다. 뉴커머소기업들이 왜 한국 음식문화, 특히 김치판매로 일본에서 크게 성공할 수 있었는가 하는것이다.

이미 알려진 바와 같이 일본 식민지시대부터 본격적으로 강제징용이나 징병, 노동자로서 도일하기 시작한 올드커머들은 일본에서 호르몬(곱창)문화를 탄생시켰다. 이른바 야끼니꾸 문화로 일본인들이 먹지 않고 버리는 소나 돼지의 내장을 요리하여 먹는 것을 시작으로 본격화된다. 그 후 각 지역마다 대형 야끼니꾸점이 생겨나고 일본인의 중요한 음식문화로 자리잡았다. 또 하나는 파칭코문화 이다.

이것들은 재일코리안들이 가장 성공한 케이스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야끼니꾸나 파칭코문화는 일본인들에게는 버려진 문화라든지 마이노리티가 주업으로 한다는 부정적인 이미지가 강하다. 취직이나 모든 사회활동에 제약받는 일본이라는 차별받는 사회구조속에서 올드커머가 통성명이라는 일본이름을 강요당하거나 써가면서 이룩한 기업들 이다. 이러한 네가티브적인 성격이 강하다는 의미에서 한국과의 관계도 자연적으로 소원해진 상태에 머물러있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와는 달리 1980년대 후반부터 본격적으로 도일하기 시작한 뉴커머들은 당당한 한국인을 강조하면서 한국의 김치문화나 음식문화를 기업의 문화사업으로 연결시킨 주역들이다. 사실 뉴커머가 등장하기 이전까지만 해도 한국음식이라면 김치에 들어가는 마늘냄새나 매운 고추가루 때문에 일본사람들이 제일 싫어하는 음식중 하나였다. 가령 지하철이나 버스에 김치를 가지고 타면 다들 도망치거나 김치에 시선이 집중될 정도였다.

뉴커머기업은 이러한 부정적인 한국의 음식문화를 도전적이고 적극적인 기업활동을 통하여 일본인들이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좋아하게끔 바꾸어 가기 시작하였다. 뉴커머들이 모여사는 각 지역마다 식료품가게를 차려놓고 한국음식과 문화를 적극적으로 알린 결과, 이제는 일본인 스스로가 한국음식, 한국문화상품을 즐겨 찾게 되었다.

즉 뉴커머 기업가들이 국제화나 80년대 이후 사회전반적인 시대흐름에 잘 부응하여 차별적이고 부정적인 한국 음식문화의 이미지를 맛있고 깔끔하며 건강에 좋은 음식이라는 긍정적인 이미지로 바꾸어준 셈이다. 이러한 시대 흐름에 따라 일본에서 본격적으로 대형 한국음식점이나 식료품가게로 성공한 뉴커머가 탄생되게 되었다. 이것은 한국인이나 한국과의 관계를 감추던 시대에서 한국의 맛과 문화상품을 적극적으로 홍보하여 상품화 시켰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크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이러한 뉴커머들의 성공배경에는 일본이라는 차별사회에서 끝까지 버티고 물심양면으로 도와준 올드커머의 존재를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기존연구에 의하면 올드커머 기업이 집거하고 있는 지역에 뉴커머가 들어가 성공하는 사례가 적지않게 발견되기 때문이다. 그러면 여기에서 오사까에서는 지금 어떤 변화가 일고있는지 재일코리안들의 새흐름을 중심으로 구체적인 내용을 살펴보도록 하자.

2. 오사까지역의 새흐름

도쿄지역이 주로 뉴커머 중심의 소기업이 집중되는 것과는 반대로 오사까지역은 올드커머들이 집거하고있는 지역이 대다수이다. 오사까지역의 재일코리안들은 이쿠노쿠 지역 안에 , 미유키도오리, 츠루하시, 이마자토신지를 중심으로 집주하고 있다. 원래 이쿠노쿠는 대부분 제주도에서 밀항한 이민1세가 집주하고 있으며 헤푸샌달공장, 고무공장, 유리공장, 금속하청, 종이줍기, 고철줍기, 밀조(술) 등을 주요 직업으로 하고있었다. 그러나 1989년 한국정부의 해외여행자유화 이후 최근까지 도일한 한국인들 가운데 나이드신 분은 김치나 헤푸샌달 공장에 취직했으며, 젊은이들은 이마자토지역를 중심으로 유흥음식점을 번창시켰다.

여기에서 이들 각각의 지역에 대한 최근의 변화를 간단히 알아보자.
오사까 코리안타운으로 가는 길목에 들어서면 제일먼저 오사까교회, KCC(재일한국기독회관), 관음사 라는 한글 간판이 눈에 띈다. 그리고 KCC 건물을 조금 지나 5분정도 걸어가면 다리가 나오고 이 다리를 건너면 이쿠노쿠 미유키도오리에 위치한 코리안타운을 알리는 대형간판이 눈에 선히 들어온다. 이 지역의 특색은 간판에서부터 금방 차이가 난다.

도쿄에 소재한 쇼쿠안도오리나 여타지역을 보더라도 한글간판이 두드러지게 눈에 띄나 이 지역은 한글보다는 일본어 간판이 아직도 많이 남아있다. 가게도 한국으로부터 직접 수입한 식품류보다는 현장에서 직접 요리하거나 만든 다양한 김치종류를 판매하거나, 한복(손수제작), 제사상에 올라가는 육류(삶은 돼지고기, 족발), 불고기집(야끼니쿠) 등이 주종을 이룬다. 대신에 요리에 들어가는 각종 양념은 보따리 장사들을 통하여 한국에서 들어오는 수입품을 주로 쓰고있다. 이 지역에 거주하는 재일코리안의 80%가 제주도 출신으로 올드커머에 해당되며 총련계 출신이 많았는데 최근에는 반전되어 절반정도가 한국적이라 한다. 그리고 나머지 20%가 일본인이 운영하는 가게이다.

최근에는 한류의 열풍으로 이 지역의 거리도 점차 바뀌어가고 있다. 일본인과의 공생프로그램증가, 한글학교운영, 한국에서 직수입한 문화상품 판매처 증가, 그리고 한글간판의 증가가 무엇보다도 뚜렷하다.

그리고 두번째로 재일코리안들이 많이 집주하고 있는 츠루하시 지역은 역 앞에 자리한 일본인 상점가와 뒤섞여 있다. 원래 이 지역은 올드커머들이 대부분의 상점을 운영하고 있었으나, 최근에는 올드커머와 뉴커머의 집주비율이 반반으로 뉴커머로의 세대교체가 뚜렷한 지역이다. 이 지역사람의 말에 의하면 몇년전까지만 해도 올드커머가 상권을 쥐고 있었는데 최근에는 뉴커머의 시장참여율이 증가하고, 판매되고있는 재일코리안 문화상품도 김치종류에서 한국에서 직수입한 다양한 문화상품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세번째로 이마자토신지는 지역은 뉴커머들이 개척한 지역으로 대부분 80년대이후 진출한 사람들이다. 원래 이 지역은 일본인이 경영하는 집창촌이었으나 현재는 풍속업이나 뉴커머들이 크라브나 스나쿠(일본식 술집)를 중심으로 진출한 지역이다. 이 지역 역시 뉴커머들이 도쿄지역에서 개척한 순서와 똑같이 크라브나 스나쿠, 에스테, 한국가정요리, 비디오와 식품점, PC방 등이 즐비해 있다.

이와 같이 지역적 특성으로서 미유키도오리는 올드커머, 츠루하시는 혼합형, 이마자토는 뉴커머가 각각 그 지역의 주도권을 잡고있다고 할 수 있다. 츠루하시나 이마자토 지역은 올드커머 상점가에 뉴커머가 진출한 지역이나 이쿠노쿠 미유키도오리는 80%이상이 올드커머가 집주하고 있는 지역으로 최근까지 아무런 변화의 조짐이 없다가 작년부터 엄청난 변화의 바람이 거세게 몰아치고 있다.

그러면 올드커머들이 주로 집주하고 있는 이쿠노쿠지역에서 생활하는 거주자의 인터뷰조사를 통하여 최근에 어떤 변화가 일고 있는지 알아보자.

3. 한류의 주역자-구체적인 사례

사례1) 덕산물산 H회장(남, 74세)
이쿠노쿠 미유키도오리 코리안타운 내에 자리잡은 덕산물산이 운영하는 ‘홍가식공방’에 들어서자 한국문화를 접하고자 하는 일본인들로 가득 차있었다. 2층 건물로 1층은 바깥쪽이 식료품, 안쪽은 식당이었으며 식당 테이블 앞에는 대형 텔레비전 화면에 인기드라마 ‘겨울연갗 가 방영되고 있었다. 한켠에는 일본인들이 식사를 하면서 무언가 열심히 종업원의 설명을 듣고 있었다.

아마 이문화체험을 하러 온 모양이다. 2층에는 한국인과 일본인 도예교실, 한국어교실, 한국 전통문화교실이 열리고 있었다. 모두들 대단히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는 가운데 회장님이 나타나셨다. 일흔이 훨씬 넘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대단히 젊어보였다. 인터뷰하기에는 너무 시끄러워 한국 전통문화교실이 열리고 있는 교실에 들어가 잠시 양해를 구하고 마주앉았다.

“처음 어머니가 시루떡 장사를 하셨기 때문에 장사를 돕다가 한국 음식문화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이 자리에서 장사한지 50년이 되었다. 이곳은 주로 한국 전통식품이나 제수용품(제사에 쓰이는 물품)을 판매했다. 그러나 작년 10월부터 조선은행 터를 매입하여 한국문화공간을 세우고 한국문화, 전통음식을 일본인에게 소개하고 있다. 한국을 왕래하면서 한국의 전통문화의 소중함을 깨달았지만, 특히 제일코리안 3-4세의 세대교체에 의해 민족적인 넋이나 혼이 허물어진다는 것은 안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민 1-2세대는 차별 속에서 성장해왔기 때문에 자기평안이나 만족의 여유가 없었는데 해방 후 사회적인 기여를 조금씩 생각하게 되었다. 작년에 이 건물을 구입하여 한국문화상품, 음식문화소개, 태권도, 장구(일본인)교실, 한국 문화센타를 열었다. 한국 전통식품 판매만 50년간 해오다가 지난해 회사를 법인화하여 덕산물산을 설립했다. 그리고 주변인근에 자체공장을 설립하여 냉면, 떡국, 김치를 제조하여 개인상점을 상대로 장사를 시작하였다.

최근까지 6남매 모두가 각 계열공장에서 사업을 시작하였다. 일본인이 경영하는 슈퍼에도 덕산물산 식품코너를 개설하여 한국식품을 제공하고 있으며 일본인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았다.

이 지역은 1960년대까지만 해도 관혼상제나 명절 때 조선인들에게 조선시장으로서 널리 알려져 있었다. 여기에 오면 재일코리안들이 필요한 물품을 구입할 수 있었기 때문에 일본전국에서 조선인들이 모여들었다. 당시만해도 명절 전후 일주일간은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그러나 이 지역도 세대교체가 이루어지고 올드커머가 점차 쇠퇴하고 일본인들이 경영하는 양판점이 등장하여 올드커머들도 각지방으로 분산되어 흩어졌다. 결국 이곳은 단지 올드커머들의 마음의 고향으로서 남게 되었다.

그러나 1993년 코리안타운 추진위원회가 결성되어 구청과의 타협으로 아치형 가로등 설치, 신문과 방송을 통한 대대적인 홍보활동으로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갖게되었고 현재는 일본인 소학생부터 대학생에 이르기까지 이문화(異文化)체험장으로서 각광을 받기 시작했다. 일본인들의 차별속에 성장해온 재일 코리안타운이 이문화체험장으로서 우리식 문화를 전달하는 장소로 탈바꿈 되었다.

지금 이곳은 10년 전부터 구상하고 있었는데 작년에 조선은행이 부도가 나자 이익보다는 일본인들에게 우리문화를 전달하자는 취지로 구입하여 이문화체험센타를 개설하였다. 2002년 월드컵과 최근의 한류를 거치면서 한국의 전통음식을 체험하고 싶은 일본인들이 계속 증가하여 김치 만들기, 한국요리교실, 한국어강습 등이 이 센터를 통해 이루어지고 있다.

이곳은 1990년대까지만 해도 총련이나 민단간의 갈등이 심했는데 지금은 확연히 이념보다는 경제를 중시하게 되었다. 재일코리안 사회는 앞으로 경제적으로 안정된 사회를 서로 협력하여 만들어가지 않으면 안 된다. 또한 일본인들과의 협력관계도 중요하다. 정치적인 입장을 배제하고 서로의 권리를 존중하며 공생하는 사회로 나가는 것이 바람직하다. 일본인과 재일코리안 간의 공생과 신뢰관계를 새롭게 구축하여 협조분위기를 조성하고, 민족의 넋(혼)을 지키어 후세대에게 물려주어야 한다.

이곳이 이념적인 좌우 충돌보다는 민단이나 총련 할 것 없이 재일코리안들의 교류의 장소, 행사장소로서 이용되기 바란다. 지금까지 한국의 문화나 역사, 생활양식의 우수성을 몰랐기 때문에 감추면서 생활해왔지만 앞으로는 이곳을 통하여 문화이해, 일본인과의 공생과 상호이해의 장소로서 활용되어 공생사회를 구축하는 초석이 될 것이다.

현재 재일코리안으로서 정부의 도움없이 한인들의 위상을 드높이는데 많은 보람을 느끼고 있다. 앞으로 시설을 확장하여 한국의 전통관례에 대한 자료를 수집하여 차세대에게 전달하고싶다. 특히 생일, 환갑, 잔치, 혼례, 제사법등 유교적인 사상과 습관을 소개하고 싶은데 한국에서의 유교전통에 대한 관심이 희박하고 자료가 턱없이 부족하다.

특히 이문화체험장을 운영하면서 큰 보람을 느낄때는 이민2-3세나 일본인들에게 산증인으로서 코리안타운의 역사, 한국교포사를 설명해주면 학생들이 감격하여 편지를 보내오거나 김치 만들기 교실을 통해 학생들이 감동을 받았다고 할때이다. 이러한 조그마한 교류활동을 통해 일본인과의 공생교류의 시초가 된다는 것에 큰 보람을 느낀다. 또한 일본 각 학교에서 수학여행코스(중 고등학교)로 다녀가거나 한국요리를 통한 음식문화을 전달함으로서 단순히 ‘맵다’라는 선입관에서 ‘맛있다’로 바꾸어 돌아갈 때 정말 기쁘다. 무엇보다도 기쁜 것은 최근에 한국문화에 대하여 나쁘게만 생각하던 일본인들이 아이들을 통하여 한국문화를 새롭게 인식하고 아이들 손을 잡고 이문화체험장을 방문할 정도로 인식이 바뀌었다는 것이다. ”

사례2) KCC(재일한국 기독교 회관)간사(남, 50대)

“나는 재일코리안 2세이다. 이 회관은 1970년대 설립되었다. 당시 재일코리안 교회가 60여개 있었는데 현재는 90여개쯤으로 늘었다. 처음에는 재일기독교단 연수센터를 구입하여 인권운동을 시작하였다. 1960년대 미국에서는 흑인인권운동이 시작되던 시기이다. 당시 ‘재일기독교단’에 캐나다 선교사가 선교차 방문하여 “재일코리안은 무엇을 보고 있는가? ” 라는 보고서를 썼다.

그 내용은 재일코리안 선교사들이 위에 계신 하나님만 쳐다보고 있으며 구체적인 활동을 하지않는다는 충격적인 내용이었다. 이러한 보고서의 영향을 받아 재일코리안들의 인권향상을 위하여 1970년대 낡은 공장을 얻어 센터를 설립하고 본격적인 운동에 뛰어들었다. 처음에는 무엇부터 해야할지 몰라 일본인들을 위한 한국문화공연부터 시작했다. 그리고 점차 외국인 차별에 대한 인권운동으로 발전하였다.

당시 오사까에서는 부동산이나 주택이 외국인들에게는 불가하다는 푯말이 부쳐져 있는 데가 많았고 특히 백인에게는 임대해주는데 재일코리안들에게는 임대해 주지 않는 등 차별이 심했다. 부동산에 가서 항의하면 집주인이 그렇게 원하는 것이라고 변명하기 일쑤였고 오사까부에 직접 항의했더니 외국인차별을 하는 부동산은 허가서를 교부하지 않겠다는 조건에서 해결되었다.

유치원입학에 대한 재일코리안들의 차별도 심했다. 재일코리안들은 정원을 채운뒤 빈자리를 일본인들이 지급하는 입학금의 5배를 내면 받아주었다. 이러한 차별은 이들 어머니회가 중심이 되어 차별없이 똑같은 입학금으로 유치원에 입학할 수 있도록 유치원측과 교섭을 벌여 일단락되었다.

1971년 세계 ‘오일쇼크’이후 일본이 선진국 대열에 들어서고 미국의 흑인인권운동에 영향을 받아 일본사회도 점차 인권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재일코리안들도 2세들이 중심이 되어 인권운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되었다. 재일코리안 1세들은 모국중심의 아주 소박한 분들이 많다고 한다. 한번은 이런 일화가 있었다.

당시 한국에 큰 태풍으로 피해가 심했는데 예배시간에 어느 할머니가 한국에 태풍이 가지말고 대신에 일본에 태풍이 상륙하도록 기도했다는 것이다. 또한 재일코리안 1세들은 모국에 관심이 너무 많은 나머지 정치적인 이념이나 사상에 휘둘리기 십상이었다. 그러나 재일코리안 2세들은 인권이나 차별에 관심을 갖고 맞서나갔으며 오사까에서 부동산이나 유치원 차별이 해결되자 이 운동이 교토, 나고야, 도쿄까지 확대되었다. 일본 전국적으로 크리스찬은 1%도 채 안되지만 인권운동은 상징적인 의미가 있으며 더욱이 오사까에서 일어난 운동이 재일코리안 사회전체로 확대되었다는 것에 커다란 의의가 있다.

KCC는 산위 별장보다는 재일코리안들이 많이 살고 있는 이쿠노쿠의 현재의 위치에 설립되어 현장에서의 인권운동을 주로 강조하고있다. 일본에서 제일먼저 교회를 중심으로 조선어 학습소 운영, 한국어강좌, 문화활동(춤, 공연)을 주도했다. 현재는 YMCA가 문화활동을 주로 담당하고 있으며, KCC는 교육이나 인권에 관심을 가지고 주도해 나가고 있다. 최근까지의 재일코리안들에 대한 인권운동으로서는 지방정부차별(시운영아파트 입주차별), 소자화에 따른 아동수당 지급차별(처음에는 일본인만 지급), 1981년 난민조약 체결 후 국제인권조약에 따라 일본인과 동등권리 보장(난민조약 이전에는 전염병 방지권리만 보장하고 생활보호수당은 못 받았다.

당시에는 생활보호수당 받으면 강제추방 당한다는 소문이 자자했다.), 의료보험가입(하루는 납골당에서 한 할아버지가 납골을 끌어안고 울고있었다 한다. 사연인즉 의료보험이 없어 병원한번 못 가보고 죽은 아들의 납골이었다.), 군인근속 연금에 대한 재일코리안 차별, 70-80년대 들어서 지문날인 거부운동 등이다.

이와 같이 차별이 심했을 때는 일본인은 일본인을 중심으로, 재일코리안은 재일코리안을 중심으로 단결하여 도왔으며 총련, 민단, 일본인들 간의 상호협력은 불가했다. 그러나 KCC활동이 지금은 지역사회복지운동으로까지 확대되었다. 신체나 지적, 정신적 장애인 센터를 운영하고 있는데 장애인 모두가 일본인들이다.

특히 95년 고베지진때는 일본인이나 재일코리안 관계없이 누구에게나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베풀었다. 그때 한국식 떡국을 일본인 피해자들에게 요리해 주었는데 맛있다고 하면서 언제 다시 오느냐고 물어오기도 했다. 이러한 조그마한 활동이 문화교류의 장소로 활용되고 상호문화 이해를 돕고 더불어 사는 공생사회로 발전하는 계기가 되고 있다.

일본은 ‘메이지유신’ 이후 ‘탈아입구’ 라는 이데올로기가 지배적인 때가 있었다. 아시아를 탈피하여 서구유럽에 속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아시아를 열등민족으로 규정하고 그 중에서 특히 조선인은 일본의 지배와 교육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며 식민지시대를 열었다. 유럽에서도 이와 똑같은 식민지시대가 있었으나 그 피해나 보상은 여러 갈등단계를 걸쳐 해결되어 왔다. 그러나 일본은 아직까지도 식민지시대의 청산을 하지 못하고 있으며 단일민족이라는 허상으로 다른 민족에 대하여 특히 배타적이다.

이제는 인권운동으로 많이 좋아지고 있는 편이다. 벌써 세대교체가 길게는 재일4세가 등장하고 있으며 이들은 자기 할아버지가 한국인이라는 사실이나 한국어를 모르는 세대들이다. 재일4세들은 대개 일본식 교육을 받기 때문에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지내다가 외국인으로서 등록증을 발급받을 때 알게 되고 큰 충격을 받는다. 이러한 상황에서 ‘재일코리안’의 아이덴티티 확립과 일본사회에서 일본인과 동등한 권리을 보장받는 것은 중요하다. 아직도 외국인 참정권문제나 공무원응시 불가 등 차별적인 정책이 존재하지만, 1981년 국제인권조약 조인 이후 현저히 나아지고 있다. 일본인의 외국인차별도 경제성장시기나 호황기에는 좋아지다가 불황기에는 심해지는 경향이 있다.

일본에서의 ‘재일코리안’의 위상은 월드컵공동개최나 작년에 방영된 겨울연가를 통한 한류를 거치면서, 그리고 총련과 민단의 교류협력은 김대중 전대통령 방북이후 더욱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다. 현재 KCC의 인권운동은 종파를 초월하여 불교계와도 연대를 모색하고 있다. ”

4. 한류의 실체와 재일코리안의 전망

현재 재일코리안 사회는(총련이나 민단) 커다란 해체위기를 맞고 있다. 한 예로 총련이 세운 학교가 학생수의 감소, 일본정부의 재정적압박(세금부과) 등으로 폐교가 늘어나고 있다. 한때 총련계 초급, 중급, 고급학교가 많을 때는 150개 교였는데 현재는 통폐합 학교가 늘어나면서 효율적인 자산운영을 위하여 주차장이나 다른 용도로 전용된 학교를 제외하면 100개 정도라고 한다.

학생수 감소로 귀화자나 뉴커머도 입학이 가능하며 교과서를 개편하여 조선이나 한국이라는 구분보다는 우리나라 사람과 우리말을 중시하고 있다. 대부분 일본정부 지원없이 운영되고 있으며 학교로서 정식허가도 받지 못하고 있는데 학부모들의 애국애족심에 의거해 학교에 입학하는 경우가 많다. 현재는 일본정부에 공립학교에 준하는 교육지원을 계속해서 건의하고 있다. 민단도 마찬가지로 재일 2-3세나 귀화자 수의 증가, 조직의 매너리즘화로 해마다 축소되고 있다.

이러한 총련과 민단의 해체위기 속에서 새롭게 등장한 것이 총련과 민단이라는 사상과 이념을 초월한 ‘재일코리안’ 들의 문화운동 이다. 총체적인 위기의식 속에 오랫동안 사상과 이념, 차별에 매인 사슬을 스스로 끊고 경제와 문화를 모토로 과감히 상호수용과 협력을 전개하고 있다. 세계화나 김대중 전 대통령 방북, 월드컵 공동개최, 한류 등으로 재일코리안 들은 사상이나 이념을 초월하여 하나로 다 함께 잘사는 경제공동체를 모색하는 새로운 민족주의로 발전할 가능성이 커졌다.

일본에서 작년 ‘겨울연갗 방영과 ‘욘사마’의 일본방문에 의해 본격적으로 불기 시작한 한류는 실제로 한국보다 일본에서 여전히 뜨겁고 식을 줄 모른다. 어떤 사람들은 일시적으로 일어난 인기라 금방 사라질 거라 생각하지만 날로 그 인기가 일본사회 전반적인 곳으로까지 파고들고 있다. 재일코리안 들은 누구나 만나면 겨울연가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싶어하고 일본인들의 ‘욘사마’에 대한 열풍은 가련하다못해 불쌍할 정도이다. 한국기업들은 이러한 현상에 쾌재를 부르고 있으며 인기가 반전되지 않을까 조바심마저 갖고 있다.

사실 이러한 한류 덕택에 지금까지와는 달리 일본인들로부터 한국인이나 한국기업은 한단계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국기업 뿐만이 아니고 일본기업도 한류의 덕을 톡톡히 보고 있다. 가령 한국어나 한국문화강좌의 증설, 한국어 인기로 인한 학원증가로 큰 재미를 보고 있다. 그러나 일본인들의 관심사는 “왜 한류, 한국사람이 일본사람들에게 이렇게 인기가 많은 걸까? ” 라는 질투심에 가깝게 촛점이 맞추어져 있다. 이것은 한국사람이 일본인들에게 인기가 있을 리 만무한데 왜 지금에서야 이렇게 일본인들이 난리인가 반문해보고 일본인들의 자기찾기 (아이덴티티), 그리고 그 원인이 무엇인가를 열심히 찾아 다양한 해석을 내놓고 있다. 이러한 가십성 기사가 지금 일본의 방송가나 신문잡지의 중요한 지면을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한류는 어느날 갑자기 불어온 바람이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중국이나 베트남에서부터 불기 시작했다고 주장하며 거품처럼 사라질 거라 한다. 일본에서 한류가 단지 ‘겨울연갗라는 드라마에서 시작된 것이라고 한다면 그들의 주장이 타당할 수도 있다. 그리고 그 드라마에 대하여 일본식 드라마 베끼기, 일본인의 잃어버린 노스탈지아 현상, 그리고 한국인 미남미녀 배우의 성형논란까지 해석이 분분하다. 그러나 현재의 한류가 불기까지 거의 20여년간을 피땀 흘리며 기업을 일구고 문화사업을 전개한 뉴커머기업가들이 일본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또한 지금까지 숨어서 ‘재일코리안’의 인권운동을 전개해온 봉사자, 김대중 전대통령의 방북, 월드컵 공동개최가 한류와 직결되어 있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이러한 사회적 사건들이 일본에서 뉴커머가 주도해온 한류와 연결되어 사회적현상으로 나타난 것이며 전술한 오사까의 경우처럼 이제는 올드커머가 한류를 적극적으로 이용하게 되면서 트렌드를 주도해나가고 있는 상황이다. 이제는 한류로 인해 지금까지의 사상이나 이념을 초월하여 재일코리안들이 경제와 문화을 중심으로 포괄적으로 통합될 수 있는 길이 트인 셈이다.

이러한 재일코리안 사회의 변화와 맞물려 오사까에서는 지금 재일코리안이 하나가 되어 시민레벨의 지역주민과의 다양한 다문화 공생사회 프로그램이 활기를 띄고있다. 이러한 때일수록 한상과 네트워크 연구는 한민족 경제공동체 형성과 인류평화에 크게 이바지 하게 될 것이다.

2004년11월3일

전남대학교사회과학연구원
세계한상문화연구단
연구교수/사회학박사
임 영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