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김효관·정성희 쿠웨이트 전현직 한인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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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김효관·정성희 쿠웨이트 전현직 한인회장
  • 이현수 기자
  • 승인 2019.04.24 14: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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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 진출 40년, 성공 일군 사업가…“청년들 겁내지 말고 부딪쳐라”

몇 주 전, 쿠웨이트로부터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쿠웨이트에서 건설회사 알하나를 운영하고 있는 김효관 대표와 쿠웨이트 한인회와 한상회를 맡고 있는 정성희 회장이 마침 비슷한 시기에 한국을 방문하니 인터뷰를 해보면 어떻겠냐는 귀띔이었다.

오래 전에 중동에 진출한 두 사람은 걸프전을 겪어내고 성공한 사업가이며, 한인사회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고, 조국에 대한 사랑이 남다르다는 점, 그리고 두 사람의 우정이 돈독하다는 등의 설명을 듣고 일단 인터뷰 약속을 잡았다.

“인터뷰를 꼭 해볼 만한 분들”이라는 인터뷰 제안자의 마지막 한마디에 도대체 어떤 스토리가 있는 인물들인지 더 궁금해졌다.

4월 19일 오후 재외동포신문사를 찾은 두 사람의 인상은 가식이 없고 진솔했으며 오랜 내공을 가진 사람만의 단단함이 느껴졌다. 자리에 앉자마자 자연스럽게 시작된 대화는 금세 한 시간을 훌쩍 넘겨버렸다.

▲ 김효관 알하나 대표와 정성희 한인회장

- 반갑습니다. 독자들을 위해 두 분이 본인 소개를 직접 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정성희 회장(이하 정) : 1949년생입니다. 올해 2월부터 쿠웨이트 한인회와 한상회 회장을 맡고 있습니다.

김효관 대표(이하 김) : 저는 2009년부터 2010년까지 쿠웨이트 한인회장을 맡았고, 2011년과 2012년 민주평통 자문위원으로 활동했습니다. 나이는 정 회장과 같습니다.

- 두 분은 어떤 계기로 쿠웨이트에 가게 되신 건가요?

정 : 1979년 한창 중동 건설 붐이 일던 시기에, 친구가 사우디에 가면 조경사업이 최고라는 말에 어렵게 비자를 만들어 사우디에 가게 됐습니다. 그런데 막상 가보니 조경 사업이 최고는 무슨...(웃음) 그렇다고 어렵게 떠나 온 한국으로 다시 돌아갈 수도 없고 해서 일단 정착했습니다.

그러다가 1990년 걸프전쟁이 나고 ‘미군들을 상대로 사업 한 번 해볼까’ 하는 생각에 쿠웨이트로 이주해 미군 부대 내에서 선물가게를 시작했습니다. 이후 한국식당, 미장원, 스파(마사지), 네일샵, 유닛배지 제작 등 점차 서비스를 확장시켜 지금은 쿠웨이트 미군 부대 외에도 한국 평택과 오산 미군 부대에서 같은 사업을 하고 있습니다.

김 : 저도 1979년 쿠웨이트에 갔습니다. 금년 6월 13일이면 쿠웨이트에 간지 만 40년입니다.  1979년 6월 13일에 쿠웨이트에 갔으니까. 다 잊어버려도 6월 13일 그 날짜만은 안 잊어버립니다. 그때가 또 라마단 기간이기도 했고요.

한국에서 일찍부터 건설업에서 일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한신공영 인력과에서 일하는 친구가 연락이 와서 ‘한 일 년 정도 해외 현장에서 뛰어달라’고 하더군요. 그 때만해도 사우디와 같은 중동 건설현장에서 일하면 1인당 30~35만원을 한국에 송금하던 시절인데, 저는 한국에서 일을 해도 월급이 50만원이 넘었었기 때문에 해외에 나갈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 친구가 하도 부탁을 하기에 결국에 쿠웨이트에 가게 됐습니다.

그래서 딱 일 년만 일하고 사직서를 냈는데, 현장 소장이 만류를 하더라고요. 원래 계획대로라면 일 년 일하고 본사로 돌아와 여권 반납하고 퇴직금 등 일 년 인건비를 정산했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소장님이 ‘한국에 가서 여권 반납하지 말고, 본사에 가지 말고 비행기표 니 돈으로 사가지고 다시 와라. 그 돈 내가 다 챙겨주마.’라고 말씀하시더라고요. 그래서 한국에 나갔다가 다시 돌아와서 현장에서 하청업자로 일을 하게 됐습니다.

- 이후 본격적인 쿠웨이트 생활이 시작되신 거군요.

김 : 그렇습니다. 이후 현지회사에 취업해서 일도 해보고, 그러다 보니 지금까지 있게 됐습니다. 원래는 쿠웨이트에서 5년만 일하고 사업자금을 마련해보려는 계획이었습니다. 그 때 당시만해도 중동에서 2년 정도 일하면 한국에서 28평짜리 연립주택 하나 장만할 수 있을 때였으니까요. 그런데 5년을 일해도 사업자금이 안 모이는 겁니다. 그래서 친구들에게 ‘내가 아직도 그 5년 계획을 못 이뤄 쿠웨이트를 떠나지 못한다’고 농담 삼아 이야기 합니다.(웃음)

- 정성희 회장님은 1979년 사우디에, 김효관 대표님은 같은 해 쿠웨이트로 가셨으니 두 분이 중동 진출 동기시네요. 쿠웨이트 한인사회에서 두 분 우정이 돈독한 것으로 알려져 있던데, 어떻게 인연이 되신 건가요?

정 : 김효관 대표 하고는 초중고나 대학교 친구도 아니고 고향 친구도 아니고, 1991년에 쿠웨이트로 옮겨가서 처음 만난 사이인데, 제 맘에 쏙 들고 존경할만한 면이 많더라구요. 그래서 나이도 같고 하니 ‘야 친구하자’고 했습니다. 이 친구가 진솔합니다. 한 길만 가고. 원래 소띠가 좀 미련하지 않습니까.(웃음)

▲ 정성희 회장

사실 한인회장도 안 하려고 요리조리 피해 다녔는데, 결국 이 친구에게 멱살 잡혀서 올해 2월부터 하게 된 겁니다. 나이도 있고 하니 마지막으로 봉사하라는 말에 꼼짝없이 하게 된 거죠.

- 두 분 다 1990년 걸프전을 겪으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 이야기를 좀 해주십시오.

김 : 쿠웨이트 가서 10년 5개월이 지난 즈음 걸프전이 일어났습니다. 자고 아침에 일어나보니 이라크군들이 다 내려와 있더라고요. 전쟁이라는 것이 미리 선전포고가 있는 것도 아니고. 사람이 죽기 살기로 일 하다가 어느 날 전쟁이라는 것이 나니 아무 생각이 없어지더군요.

그 때 제가 현대건설 케이터링 하청업을 할 때인데, 대사관과 교민들 다 철수해도 현대건설 간부들은 (본사 지시로) 현장을 지켜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저는 개인이니까 한국으로 들어와도 되는데 현장 케이터링을 하다 보니 소장이 ‘야 밥은 해줘야 할 것 아니냐’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주방장 3명을 모아놓고, ‘자 현장에 27명이 남았으니 주방에도 한 명은 남아야 할 텐데 누구 자진해서 남을 사람없냐’라고 했더니 ‘아이고 사장님, 지금 전쟁이 났는데, 처자식 먹여 살리려고 여기 왔는데 집에 가야죠’라고 하는데 맞는 말이더라구요. 잘못되면 누가 책임을 지겠습니까. 그래서 제가 남게 됐지요. 

대사관도 없고 교민들도 다 떠난 상태에서 현대건설 간부들과 한 달 동안 현장을 지켰습니다. 더 이상 버틸 수 없게 돼 바그다드로 요르단으로 멀리 멀리 돌아서 간신히 돌아왔습니다. 그러고 나서 1년 뒤에 쿠웨이트로 돌아가 다시 시작해야 했습니다.

- 그럼 김효관 대표님이 현재 운영하시는 건설회사 알하나도 걸프전 이후부터 운영하신 건가요?

김 : 그렇죠. 94년 6월에 알하나를 설립해서 올해가 25주년입니다.

정 : 김 대표가 앞서 ‘아직도 5년 계획이 안 끝났다’고 말한 거는 농담인거고, 쿠웨이트에 정착한 후 5년 후부터는 개인사업으로 기반을 잡고 걸프전 이후 알하나를 설립한 겁니다. 김 대표는 완전 애국자입니다. 김 대표가 현재 운영하고 있는 건설회사 알하나에도 한국인 직원이 많습니다.

김 : 알하나에 전체 직원은 730명이고 이중 한국인 직원이 26명입니다. 인도, 네팔, 필리핀, 방글라데시 등 직원들 국적도 다양합니다. 인도사람 중에는 30년 된 직원도 있고, 대개 15~20년 된 직원들이 많습니다. 진짜 식구들이죠.

- 김 대표님은 2017년에 국민훈장을 받으셨던데 이러한 이유 때문인가 봅니다.

정 : 평소 사업 때문에 미국 독일 등에 자주 다녀보지만, 사실 한국인을 채용하는 한인사업체가 많지 않습니다. 제 밑에 한국인 직원도 1명밖에 안 남았습니다. 이라크 전쟁 때 한인청년을 7명 채용한 적도 있는데 저하고는 잘 안 맞더라고요. 그런데 우리 김 대표는 한국인 직원들을 잘 다독거려 주고 완전 전문갑니다. 현대건설, 현대중공업 임원 출신들도 많습니다. 정말 대단한 겁니다.

▲ 김효관 대표

- 크게 보면 쿠웨이트에 한인기업 생태계를 만드신 거네요.

김 : 현대중공업 등에서 오랜 시간 일한 경력자들이기 때문에 어디 가도 환영받을 사람들입니다. 물론 연봉이 높고 차도 지원해줘야 하는 어려운 부분도 있지만, 믿는 든든한 마음이 있습니다.

한 6년 전부터는 회사에 아들, 사위들을 다 불러다 놓고 훈련시키고 있습니다. 앞으로 5년 정도만 더 훈련시키면 되겠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정 회장하고도 ‘한 5년만 더 하고 한국에 돌아오자’고 얘기하곤 합니다. 

- 쿠웨이트 동포사회 규모가 어느 정도 됩니까.

김 : 지금은 건설사까지 하면 많습니다. 옛날에 한창 중동 건설 붐이 일 때 많았는데, 이후 한동안 줄었다가 최근 다시 많아졌습니다.
 
정 : 한 2,500명 정도 되는 것 같습니다. 

- 그럼 다시 쿠웨이트 내 건설 경기나 연관 산업 등이 커진다는 의미로 봐도 될까요?

김 : 아직도 쿠웨이트 건설산업이 전망은 있습니다. 큰 사업들이 있으니까. 그런데 금년 봄에 발주한다던 것들도 가을로 밀리고, 자꾸 미뤄지는 바람에 지금 상태에서 멈춰버린 것들이 있습니다. 자꾸 새로운 공사가 발주가 나와야 되는데...

- 유가하락 하고도 관계가 있습니까.

김‧정 : 당연히 관계가 있습니다. 큽니다.

김 : 한 200억불 이상의 공사가 나와 줘야 되는데 아직 잠자고 있는 겁니다. 계속 연기되고 있는데, 그런 게 또 터지면 잘 돌아갈 겁니다.

▲ 김효관 대표와 정성희 회장

- 중동에서 쿠웨이트가 가장 형편이 좋은 편 아닌가요?

김 : 제일 낫습니다. 투표율도 제일 높고요. 크기는 사우디가 크지만 쿠웨이트가 석유가 많기 때문에 만만한 곳이 아닙니다. 그리고 항상 얘기지만, 우리나라가 쿠웨이트 석유 수입 3위 국가입니다. 1위가 미국 2위가 일본이고요. 3위면 대단한 겁니다. 그래서 대사님들한테 “왜 우리는 입김도 못 넣나”라는 얘기를 많이 했습니다. 우리나라 장관, 대통령이 쿠웨이트 왕한테 ‘이것 좀 한 번 해보자’라고 제안할 수도 있는 건데, 쿠웨이트에는 (이런 분들이) 잘 안 옵니다.

쿠웨이트에 고속도로, 조금 높은 건물 공사는 우리 기업들이 다 했습니다. 물론 지금은 단가가 맞지 않아서 못합니다. 도로공사라든지 빌딩 공사라든지 이제는 지나갔고, 대신에 석유산업과 같은 기술집약적인 것들을 합니다.

정 : 예전에 우리기업들이 하던 공사를 지금은 중국, 인도 회사가 하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기업들은 좀 더 기술집약적인 산업으로 다변화시켜야 합니다.

- 미국 일본 다음으로 우리나라가 쿠웨이트에서 석유를 많이 수입한다는 사실이 놀랍습니다. 국내 정유회사에서 국내 소비보다 더 많이 수출하기 때문에 가능한 거겠지요? 

김 : 그렇습니다. 우리나라가 쿠웨이트로부터 한창 석유 수입을 많이 하던 시절에 건설공사 수주액은 10분의 1도 안됐습니다. 현대건설이 정주영 회장 시절 6천만불짜리, 1억불짜리 공사 땄다고 난리가 났을 때도 25억불 어치 중동 석유를 수입해 왔었습니다.

- 정부 고위관리나 정치인들이 김효관 대표님, 정성희 회장님 같은 식견을 갖고 있으면 좋겠습니다.

정 : 해외에 있으면 제3자 입장에서 객관적으로 보게 되는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 위정자들은 너무 본인의 안위만 챙깁니다. 사실 경제개발 초기에 박정희 대통령이 많은 걸 이뤘다고 생각합니다. 후대들이 그 덕을 보는 것이고요. 그런데 지금은 아니지 않습니까. 국민소득 3만불이라고 해도 정체상태를 돌파해 나갈 길이 있을 텐데 안타깝습니다.

▲ 정성희 회장

- 한국에는 얼마 만에 한 번 방문하십니까?

정 : 국내에도 사업체가 있고 또 98세 모친을 찾아뵙기 위해 일 년에 적어도 4번 이상은 한국에 들어옵니다. 그런데 한국에 올 때마다 사회 분위기가 예전에 비해 점점 더 양보심이나 배려심이 없어지는 것을 느낍니다. 이래서 어떻게 화합을 이루겠나하는 걱정도 되고요.

4~5년 전만해도 우리나라가 일본을 따라 잡는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잖아요. IMF 때 국민들이 금 모으기에 참여하지 않았습니까. 그때까지만 해도 서로 도와가는 분위기가 있었는데, 지금은 그때보다 잘사는데도 서로 돕는 분위기는 더 없어진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정말 먹고 살기 힘들어서 그렇다면 이해가 되는데...

이럴 때일수록 국민이 통합하고 화합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예의 교육도 있어야 되고, 헝그리 정신도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기본 교육이 가장 중요합니다. 1차적으로 가정교육, 2차적으로 학교 교육. 그렇지 않고서는 우리나라가 한 단계 더 발전하기 어렵다고 봅니다. 어려울 때 서로 도와주고 양보하는 사회 분위기가 만들어져야 국민통합이 이뤄질 수 있고, 그래야 우리나라가 한 단계 업그레이드 될 수 있습니다.

김 : 정 회장 말에 덧붙이자면, 외국은 전부 월세입니다. 전세라는 개념이 없어요. 저도 40년을 쿠웨이트에서 월세로 살고 있습니다. 내 집을 소유도 못하고. 그런데 우리나라는 전세가 있지 않습니까. 전세 들어가면 원금은 안 까먹잖아요. 월세도 안내고. 그런 거는 우리나라의 장점이라는 걸 국내에 사는 사람들이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정 회장이 어려울 때 일수록 서로 돕는 분위기가 만들어져야 한다고 했는데, 우리나라 대기업들이 솔선수범해야 합니다. 돈 어디서 벌었습니까, 우리나라에서 벌지 않았습니까. 해외시장에서 돈 벌어온다? 요즘은 못 벌어옵니다. 옛날에나 그랬지. 없는 사람이 10만원 내는 것보다 대기업에서 10억 내는 것이 더 쉬운 일입니다.

▲ 김효관 대표

-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운동권 출신이 하는 얘기인줄 알겠습니다.(웃음)

김 : 저 운동권 아닙니다. 나만 열심히 살면 된다는 생각으로 사는 사람입니다.(웃음)

정 : 우리 둘이 만나서 자주 하는 얘기인데, 우리나라 일부 지자체에서 청년수당 등을 지급한다고 하는데, 복지 지원은 없는 사람을 도와줘야지 있는 사람을 도와주는 것은 보람 없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 분위기를 바꿔서, 5년 후 75세가 되면 한국으로 돌아오실 계획이라고 하셨는데, 40여 년간 삶의 터전을 일군 쿠웨이트를 떠나오는 것이 쉽지 않은 결정일 것 같습니다.

김 : 쿠웨이트뿐만 아니라 해외생활이라는 것이 그렇게 만만한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내가 그 모든 것들을 다 들고 한국에 올 수도 없는 노릇이고요. 그래서 애들을 가르쳤으니까 부려먹어야지요.(웃음) 지금부터 한 5년 정도만 일하면 그 다음에는 자녀들에게 맡기고 한국으로 돌아올 수 있겠다는 판단이 들었습니다.

- 알하나에서는 주 소통 언어가 영어입니까.

김 : 언어가... 사실 손짓 발짓하면 다 됩니다.(웃음) 기본은 영어입니다. 대신에 각 나라 직원 중 수퍼바이저, 매니저급들과 중요한 소통이 영어로 이뤄집니다.              

사실 한국 사람들은 영어나 현지어 실력이 부족해도 어느 나라에 가서든지 살 수 있습니다. 세계 만국 공통어인 ‘손짓발짓’이 있지 않습니까.

▲ 본지 이형모 발행인과 대담하는 김효관 대표와 정성희 회장

- 많은 한국 청년들이 언어를 완벽히 준비한 뒤에 해외에 진출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들에게 한 말씀 해 주신다면요?

정 : 저도 초창기에 영어 하나 안 되는 상태로 미군 상대로 사업하면서 항상 사전을 들고 다니며 의사소통 했습니다. 먹고 살려니까. 한국 청년들도 도전해야 합니다. 이로 인한 희열감, 성취감을 느껴보려 애써야 합니다.

김 : 40년 전에 영어는 물론 아랍어의 ‘아’ 자도 모르고 갔었는데, 어떻게 갔겠습니까. 도전한 겁니다. 배고팠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그런데 한국 사람이 가서 못 사나? 잘 삽니다.

요즘 젊은 친구들은 겁부터 나는 겁니다. 부딪쳐야 됩니다. 그래야 기회가 있습니다.

- 두 분 오늘 말씀 감사합니다.

                                                            
대담 : 이형모 발행인 / 정리 : 이현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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