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먼저 축하드립니다. 한통련 성원
144명이 10월 10일 한국을 정식으로 방문한다고 들었는데, 소감이 어떻습니까? "감개무량합니다. 특히 이번에는 작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동지들과 같이 들어갈 수 있게 되어 너무나 기쁩니다. 아직 144명이 될지 더 늘어날지 모르겠습니다만, 한통련이
70여명, 한청이 60명 그리고 학생협의회와 민주여성회 동지들이 20여명 정도 됩니다."
- 한국에
처음으로 가시는 분들도 많으실 것 같습니다. "재일동포 2, 3세 중에서 그런 분들이 꽤 있습니다. 1세 중에서도 몇십여 년
만에 한국을 찾는 분들이 있으시죠. 곽동의 상임고문님은 60년 5월 이후 처음이시니까 44년만이 됩니다.
그 외에도 저희들처럼
활동가도 아니신 재일동포 분이 계신데 이분은 몇 번이고 한국을 들어갈 기회가 있었어요. 그런데 저희들이 못 가게 되어 있으니까 의리를 지킨다고
일부러 안 들어가셨지요. 이분도 이번에 같이 갑니다. 또 10여년 전 어머님이 돌아가신 분도 계신데, 어머님이 한국의 고향땅에 묻히고 싶다고
유언을 남기셔서 그간 유골을 계속 보관하고 있다가 이번에 가지고 들어갑니다.
또 젊은 청년 동지들 중에는 학교다닐 때는 자유롭게
한국을 드나들었다가 한청 활동을 하면서 못 가게 된 경우도 있고… 아무튼 이런 사람들이 이번에, 그리고 다음부터는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다는
것이 너무나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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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음사건"이란 어떤 사건입니까? "71년 당시 민단 단장 선거가 있었습니다. 그때는 한청을 비롯하여 민단 내부 민주화를
요구하는 세력의 힘이 컸지요. 저희들은 당시 민주 후보로 유석준 후보를 내면서 민단 개혁을 실행하고, 재일동포 권익을 옹호한다는 초기 민단의
이념으로 돌아가겠다는 것을 공약으로 발표했습니다.
군사독재정권에 놀아나지 않겠다는 뜻을 공개적으로 밝혔지요. 이게 호응이
대단했습니다. 그런데, 선거가 있기 한달 전 민단중앙위원회에 참가한 대사관의 김 아무개 공사가 갑자기 회의 도중 유석준 후보의 선거참모가
동경제국호텔에서 북한 쪽 총련 최고 간부와 만나 대한민국을 전복하기 위한 음모를 획책하는 대화를 녹취한 테이프가 있다고 발표했어요.
우리들이 녹음테이프를 보자고 하니까, 선거가 끝나고 보여주겠다라고 했어요. 그 이후 일대 혼란이 일어나고 소문이 꼬리를 물고 결국
민주 후보가 졌습니다. 그런데, 녹음테이프가 없어요. 저희들이 내놓으라고 아무리 말해도 본국에 보냈니 어쩌니 하면서 결국 유야무야되었지요.
그리고 민단 중앙은 그 이후 민단유지간담회와 한청을 굴욕적인 한일협정에 반대하는 데모와 7·4 남북공동성명 등을 지지하는 대회를
총련 계열과 같이 열었다는 것을 빌미로 저희들을 제명했지요. 그 이후 김대중 전 대통령 등 재일사회의 민주인사들과 결합하여 한민통을 만들었던
것입니다."
- 국내에서 국가보안법 개폐논란이 뜨거운 때에 고국을 방문하게 되었는데요. 혹시라도
염려되는 부분이 있습니까? "우리가 그간 해 온 것들은 다 조국과 민족을 위한 일이었습니다. 저희를 반국가단체로 낙인찍은 것은
박정희 군사독재 시절이고, 또 저희 초대의장이었던 김대중씨는 대통령까지 역임하셨습니다. 걱정된다고 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만, 한국사회의 흐름이
예전과는 많이 다르지 않습니까?
저희가 정식여권을 발급받아 당당히 들어갈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이미 한국사회의 민주적 성숙을
의미하는 증표이지요. 국보법 개폐논란 역시 당연히 시대와 역사의 흐름을 따르는 것으로 나타날 것이라 생각합니다."
- 고국을 다녀오신 다음 앞으로 한통련은 어떤 일들을 해 나가실 계획이십니까? "지금까지 해온 재일동포
3,4세들에 대한 민족의식 고취와 문화사업들을 계속 일상적으로 해 나가면서, 민단과 총련 사회로 대표되는 재일사회의 화합을 위해 힘을 기울일
생각입니다. 50년대 이후 정치권력의 개입으로 재일동포 사회가 많은 반목과 질시를 거듭해 왔는데, 이젠 조국과 민족의 자주평화통일을 위해 모두
힘을 합쳐야할 시기가 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대한민국의 자랑스러운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비록 몸은 여러분들과 떨어져 있지만 정신만큼은 언제나
민족과 조국을 사랑하는 여러분들과 같이 있으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