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식여권 받아 고국 방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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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식여권 받아 고국 방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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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4.10.0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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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일한국민주통일연합(한통련) 김정부 의장
▲ 한통련 중앙본부 간부들. 왼쪽부터 박남인 조직국장, 김지영 민족시보 논설위원, 송세일 사무총장, 김정부 의장, 황영치 선전국장, 서행대 조직차장 ⓒ2004 박철현 왁자지껄한 선술집에서 막걸리를 마셔가며 취한 김에 털어놓은 속마음이 국가보안법이나 긴급조치 위반이라는 죄가 되어 국가기관에 끌려가 고문을 받아야 했던 60~70년대. 공수부대가 투입되어 남쪽의 한 도시를 쑥대밭으로 만들었던 80년대 신군부 시절. 조그마한 비판조차 허용되지 않던 그 엄혹했던 시대에 국내의 양심적 지식인, 노동자, 학생, 민중들은 해외 민주화 운동단체들의 굽히지 않는 투쟁에 용기를 얻었고 그들의 국제적 연대와 지원활동에 마음속으로나마 적극적인 지지를 아끼지 않았다. 그러한 해외민주화통일운동 단체의 맏형격인 재일한국민주통일연합(이하 한통련)은 그간 군사정부는 물론 문민정부가 들어섰는데도 '반국가단체'로 낙인찍혀 한국에 입국할 수 없었다. 그러다가 작년 가을 국내 한통련 대책위(상임공동대표 최병모)의 노력으로 한통련 인사 33인이 고국 땅을 밟을 수 있었다. 그렇지만 당시에는 여행증명서로 단 1회 방문만을 허용한다는 정부의 방침과 송두율 교수의 구속 등 여러 문제 때문에 한통련은 실지로 명예를 회복하지 못했다는 것이 세간의 평이었다.그로부터 1년여의 시간이 지난 오는 10월 10일 한통련 인사 144명은 정식 여권을 발급받아 한국 땅을 밟게 되었다. 국가보안법에 관한 정치권의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는 상황에서 이들이 고국을 방문함에 따라 국가보안법 철폐 주장에 큰 힘을 실어줄 것으로 예상된다. 한통련 김정부 의장 역시 "국보법 개정 논의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가운데 대표적인 반국가단체로 규정된 한통련 구성원 144명이 정식으로 '대한민국' 여권을 받아 입국한다는 사실이 무엇을 의미하겠느냐"며 설레는 마음을 감추지 않았다.김 의장은 또 "당사자 중 한 명인 제가 90년에 한국에 처음으로 갔는데 정식여권을 발급받으려고 해도 반성문을 쓰라고 해서 정식 여권은 필요없다고 했죠. 작년의 경우에는 반성문 이야기는 나오지 않았습니다만 곽동의 상임고문님이 갑자기 병세가 악화되셔서 같이 못갔었어요. 개운치 않았습니다. 또 송두율 교수도 그렇게 되고. 그런 의미에서 올해 방문은 홀가분합니다. 모두 정식여권이 나왔으니까요"하고 말한다.김 의장은 "아직 법적으로는 여전히 반국가단체지만 여권이 나왔다는 점에서 저희들의 명예회복은 실질적으로 이루어졌다고 봅니다"하고 덧붙였다.다음은 10월 5일 아키하바라의 한통련 사무실에서 1시간 가량 김 의장과 진행한 인터뷰 내용이다. ▲ 재일한국민주통일연합 김정부 의장. 그는 인터뷰 내내 한통련의 명예회복과 고국방문에 대한 기대감을 나타냈다. ⓒ2004 박철현
- 먼저 축하드립니다. 한통련 성원 144명이 10월 10일 한국을 정식으로 방문한다고 들었는데, 소감이 어떻습니까?
"감개무량합니다. 특히 이번에는 작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동지들과 같이 들어갈 수 있게 되어 너무나 기쁩니다. 아직 144명이 될지 더 늘어날지 모르겠습니다만, 한통련이 70여명, 한청이 60명 그리고 학생협의회와 민주여성회 동지들이 20여명 정도 됩니다."

- 한국에 처음으로 가시는 분들도 많으실 것 같습니다.
"재일동포 2, 3세 중에서 그런 분들이 꽤 있습니다. 1세 중에서도 몇십여 년 만에 한국을 찾는 분들이 있으시죠. 곽동의 상임고문님은 60년 5월 이후 처음이시니까 44년만이 됩니다.

그 외에도 저희들처럼 활동가도 아니신 재일동포 분이 계신데 이분은 몇 번이고 한국을 들어갈 기회가 있었어요. 그런데 저희들이 못 가게 되어 있으니까 의리를 지킨다고 일부러 안 들어가셨지요. 이분도 이번에 같이 갑니다. 또 10여년 전 어머님이 돌아가신 분도 계신데, 어머님이 한국의 고향땅에 묻히고 싶다고 유언을 남기셔서 그간 유골을 계속 보관하고 있다가 이번에 가지고 들어갑니다.

또 젊은 청년 동지들 중에는 학교다닐 때는 자유롭게 한국을 드나들었다가 한청 활동을 하면서 못 가게 된 경우도 있고… 아무튼 이런 사람들이 이번에, 그리고 다음부터는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다는 것이 너무나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 편집 중인 한통련 기관지 <민족시보>의 첫머리 기사. 한통련 고국방문이 톱기사로 올라가 있다. ⓒ2004 박철현 - 모두 다 정식여권이 나온 것인가요?"그게 좀 보도된 내용과 다른 게 있는데 여권은 다 나왔지만, 저희 중앙의 활동가들은 단수여권입니다. 그 외 분들은 다 복수여권이고. 단수여권 안에 적혀있는 문구를 읽어보니 1회에 한해 입국을 허용한다고 되어 있더군요. 그런데 이번에 다녀오면 다음부터는 복수여권을 받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일정은 어떻게 됩니까?"10일 들어가자마자 4·19 혁명묘지를 참배하고, 저녁에는 한통련 고국방문단 환영위원회(상임대표 최병모)가 주최하는 환영회(백범기념관)에 참가하고 다음날 광주로 내려가 망월동 묘지를 참배하고 5·18 기념재단 분들과 만납니다. 그리고 다시 올라와서 김대중 전 대통령님과 만납니다. 그 다음부터는 각자 자신들의 고향에 가거나, 또 일이 바쁜 분들은 일본으로 돌아갑니다. 공식일정은 2박 3일인 셈입니다."- 곽동의 상임고문님이 같이 가시는데 감회가 새로우실 것 같습니다."원래 곽 고문님께서는 이번에는 왠지 가고 싶지 않다고 하시더라구요. 이건 비밀인데(웃음). 그런데 환영위원회에서 보내준 비디오 테이프를 보시고서는 안 가면 안 되겠다고 어제부터 환영사 쓰시고, 영사관에 여권신청하시고 갑자기 바빠지셨습니다."- 비디오 테이프 내용이 무엇이기에 그렇게 바뀌셨나요?"한통련이 어려웠던 시절부터 국내에서 물심양면으로 저희들을 도와주신 분들의 육성인터뷰가 담긴 것인데, 최병모 대표님을 비롯해 홍근수 목사님, 이기욱 변호사, 오종렬 의장님 등이 곽 고문님 꼭 뵙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특히 이기욱 변호사는 '곽 의장님이 건강히 오실 수 있도록 하느님과 부처님께 기원드리고 있다'는 말씀까지 하셨거든요.(웃음)"- 일정을 보니 가장 먼저 4·19 혁명 묘지 참배가 들어 있습니다. "4월 혁명은 저희 한통련의 역사에 정신적 뿌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한통련의 전신인 한민통이 결성된 것은 1973년이지만 그 이전에 이미 민단유지간담회, 민단자주수호위원회 등 민단 내에 민주화와 통일을 바라는 모임이 있었지요. 그 모임이 결성된 계기가 바로 60년 4월 혁명입니다. 그때 저희들이 주축이 되어 민단에서 '우리 민단은 4월 혁명에서 나온 본국 민중들의 민주화 의지를 적극적으로 지지한다'는 성명서를 발표했습니다. 그런데 1년 후 5·16 쿠데타가 일어나자 민단은 굴복했습니다. 군사정권에 동조하는 세력이 민단을 장악하자, 당시 곽 고문님이 의장으로 계시던 민단 산하의 재일한국청년연합(이하 한청)이 '반 군정선언'을 발표했지요. 그 다음부터 김재화, 배동호 선생님을 비롯하여 한청이 주축이 되어 민단유지간담회 조직을 꾸린 것이 오늘날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즉 저희 재일동포들의 심장을 친, 민족의식을 일깨운 사건이 바로 4월 혁명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희에게 선배 동지들의 영령이 잠든 4·19 혁명묘지 참배는 특별한 의미를 띠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재일동포 2,3세들이 주축이 된 문화공연도 할 것이라고 들었습니다."네. 오사카 지부에서 준비를 한 것인데, 한통련이 걸어온 30년 역사를 영상과 음악으로 표현하고 또 일본에서 태어나고 자라난 우리들이 왜 이렇게 조국을 사랑하고 좋아하는지를 율동으로 표현한다고 하네요."- 이번 방문이 실현된 것으로 한통련이 명예를 회복했다고 봐도 되겠습니까?"저 개인적으로는 표면적인 명예회복은 이루어졌다고 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의 오해를 풀어야만 실질적인 명예회복이 된다고 보는데요. 크게 3가지가 있습니다. 먼저 박정희 군사독재 정권이 저희를 반국가단체로 몬 이유는 김대중 전 대통령을 죽이기 위한 모략이었다는 것, 그리고 해외민주화 운동과 국내운동과의 연대고리를 끊어 버리겠다는 의도가 담겼다는 것, 마지막으로 재일동포 사회를 분열시키고자 하는 음모가 담겨 있다는 것이 공개적으로 밝혀져야 실질적인 명예회복이 이루어진다고 보고 있습니다." - 박정희 정권이 개입되었다는 사례가 있습니까?"네. 지금도 여기 나이 드신 민단계열 재일동포 분들의 기억 속에 생생히 살아있는 1971년의 '녹음사건'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 여권을 펼쳐 보이는 김정부 의장. 태어나서 처음으로 대한민국 외무부에서 발행하는 여권을 가져본다며 감회어린 표정을 지었다. ⓒ2004 박철현
- "녹음사건"이란 어떤 사건입니까?
"71년 당시 민단 단장 선거가 있었습니다. 그때는 한청을 비롯하여 민단 내부 민주화를 요구하는 세력의 힘이 컸지요. 저희들은 당시 민주 후보로 유석준 후보를 내면서 민단 개혁을 실행하고, 재일동포 권익을 옹호한다는 초기 민단의 이념으로 돌아가겠다는 것을 공약으로 발표했습니다.

군사독재정권에 놀아나지 않겠다는 뜻을 공개적으로 밝혔지요. 이게 호응이 대단했습니다. 그런데, 선거가 있기 한달 전 민단중앙위원회에 참가한 대사관의 김 아무개 공사가 갑자기 회의 도중 유석준 후보의 선거참모가 동경제국호텔에서 북한 쪽 총련 최고 간부와 만나 대한민국을 전복하기 위한 음모를 획책하는 대화를 녹취한 테이프가 있다고 발표했어요.

우리들이 녹음테이프를 보자고 하니까, 선거가 끝나고 보여주겠다라고 했어요. 그 이후 일대 혼란이 일어나고 소문이 꼬리를 물고 결국 민주 후보가 졌습니다. 그런데, 녹음테이프가 없어요. 저희들이 내놓으라고 아무리 말해도 본국에 보냈니 어쩌니 하면서 결국 유야무야되었지요.

그리고 민단 중앙은 그 이후 민단유지간담회와 한청을 굴욕적인 한일협정에 반대하는 데모와 7·4 남북공동성명 등을 지지하는 대회를 총련 계열과 같이 열었다는 것을 빌미로 저희들을 제명했지요. 그 이후 김대중 전 대통령 등 재일사회의 민주인사들과 결합하여 한민통을 만들었던 것입니다."

- 국내에서 국가보안법 개폐논란이 뜨거운 때에 고국을 방문하게 되었는데요. 혹시라도 염려되는 부분이 있습니까?
"우리가 그간 해 온 것들은 다 조국과 민족을 위한 일이었습니다. 저희를 반국가단체로 낙인찍은 것은 박정희 군사독재 시절이고, 또 저희 초대의장이었던 김대중씨는 대통령까지 역임하셨습니다. 걱정된다고 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만, 한국사회의 흐름이 예전과는 많이 다르지 않습니까?

저희가 정식여권을 발급받아 당당히 들어갈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이미 한국사회의 민주적 성숙을 의미하는 증표이지요. 국보법 개폐논란 역시 당연히 시대와 역사의 흐름을 따르는 것으로 나타날 것이라 생각합니다."

- 고국을 다녀오신 다음 앞으로 한통련은 어떤 일들을 해 나가실 계획이십니까?
"지금까지 해온 재일동포 3,4세들에 대한 민족의식 고취와 문화사업들을 계속 일상적으로 해 나가면서, 민단과 총련 사회로 대표되는 재일사회의 화합을 위해 힘을 기울일 생각입니다. 50년대 이후 정치권력의 개입으로 재일동포 사회가 많은 반목과 질시를 거듭해 왔는데, 이젠 조국과 민족의 자주평화통일을 위해 모두 힘을 합쳐야할 시기가 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대한민국의 자랑스러운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비록 몸은 여러분들과 떨어져 있지만 정신만큼은 언제나 민족과 조국을 사랑하는 여러분들과 같이 있으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