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중앙아시아 한인의 경제환경과 현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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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중앙아시아 한인의 경제환경과 현황>
  • 김진이기자
  • 승인 2004.09.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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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인의 뜨거운 교육열, 치열한 생존력

발문 - 이주 140주년 기념의 해에 노무현 대통령 방러까지 겹쳐 최근 러시아 고려인들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한많은 세월을 살아온 고려인들에 대해 학술적인 접근이나 다양한 분석도 나오고 있다. 올해 4월 세계 한상문화연구단 국제 학술대회에서 발표됐던 러시아·중앙아시아 한인들의 경제환경과 현황을 다시 살펴보며 오늘의 고려인들의 삶을 되돌아보고자 한다. 한상연구팀의 최한우·남혜경 박사의 발표문을 발췌, 정리했다.

현재 구소련에 살고 있는 고려인은 45만명이다. 그 가운데 러시아 연방공화국에는 약 15만 5천여명이 살고 있다. 러시아내 고려인들은 연해주와 사할린 주 등의 한반도 근접 극동지역과 모스크바, 상트페테르부르크, 러시아남부의 볼고그라드주와 로스토프부에 집중되어 있다.
연구팀은 2003년 말과 2004년 초에 러시아 현지를 방문하여 전환기에 살고 있는 고려인들을 대상으로 그들의 경제적, 사회적 생활여건에 대해 조사했다. 모스크바, 볼고그라드, 로스토프, 사할린주 및 연해주에 현재 거주하고 있는 18세 이상 고려인 611명을 대상으로 사례조사와 설문조사를 실시했다.

설문에 응한 고려인들의 가족 구성은 4명이 39.7%로 가장 많았다. 대부분 자녀 1~2명을 두고 있다는 것으로 고려인들이 다른 민족들에 비해 비교적 안정적인 사회생활을 영위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또한 응답자중 40%가 대졸자로 러시아 연방 평균 10.5%를 훨씬 넘어서고 있었다. 국가 전체 인구 중 대졸자 비율은 우즈베키스탄이 9.2%, 카자흐스탄 9.9%, 우크라이나 10.4% 정도 수준이다. 고려인들의 교육열이 매우 높다는 걸 알 수 있다.

한국어 모국어 인식 25%에 불과
고려인들의 모국어 인식은 러시아어 59.7%, 한국어 25%, 러어-한어 13.5%순이다. 이 결과는 세대가 지나면서 1989년 이후 러시아어화 현상이 더 심화된 것을 반영한다. 모국어 인식보다 일상어로 우리말을 사용하는 경우는 3.1%에 불과했고 83.1%가 러시아어를 사용하고 있었다.

1991년 발표된 한 조사에 의하면 20세 이상의 고려인들 가운데 2%만이 고려일보를 정기구독하고 있었으며, 8%가 한국어 라디오 방송을 청취하며, 5%가 우리 노래를 알고 있었다. 고려인 집단의 민족구성을 보면 아버지가 고려인인 경우 94.1%, 어머니가 고려인인 경우가 93.4%로 비슷했다. 동족간 결혼이 지배적임을 알 수 있다.

직업은 상업 및 자영업이 15.7%로 가장 높았다. 주부를 제외하고는 사무직이 10.8%, 농업이 10.1%순이었다. 교육직이 4.25%를 차지해 러시아 인구대비 고려인 인구 비율을 훨씬 상회해 고려인들이 소수민족으로 매우 잘 정착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법조인 종사자는 2%에 달한다는 사실에서도 잘 알 수 있다. 개인 월소득은 150~500$사이가 23.5%로 가장 많았다. 500$이상도 12.4%였는데 이는 러시아에서도 매우 높은 소득 수준이다. 모스크바 거주 고려인의 월소득이 타 지역에 비해 월등히 높다.

교육 법조인 비율 상대적으로 높아
주요 소득원은 직장수입이 설문조사 대상자의 40.2%로 가장 많았고 부업이 15.2%나 됐다. 이는 러시아의 경제환경의 특수성을 반영한 것이다. 공무원들이나 직장인들도 자가용 택시 운전이나 야간 부업을 통해 직장월급보다 더 많은 소득을 얻고 있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러시아내 고려인들은 다수 민족 러시아인 등 다른 민족들과 마찬가지로 소련 해체이후 장기화되는 사회 경제적 불안정의 영향을 크게 받고 있었다. 또한 소수민족으로 생존에 대한 끈질긴 노력을 읽어낼 수 있었다.

그러나 한민족 네트워크 혹은 한상 네트워크에 대한 고려인들의 인식은 긍정적이지 않다. 한국이나 다른 지역의 재외 한인들이 긴밀한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견인차적 역할을 감당해줄 때 장기적으로 고려인 집단의 잠재성이 개발될 것으로 기대된다.

<고려인들의 사례>
김판칠레이(로스토프-나-도누)
1927년 연해주 출생. 부모 함경북도 출신. 10살에 카자흐스탄으로 강제이주. 9남매. 일찍 부모님을 여의고 누나가 사는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에서 공업대학을 졸업하고 관개기사로 일을 시작, 1955년부터 57년까지 2년간 소비에트 공산당의 명령으로 북한에 파견되어 관개기술을 지도했다. 1958년 1월 당의 명령으로 로스토프-나-도누로 파견되었다. 67년부터 설계사무소에서 일하다 91년 부장으로 정년퇴직. 파견되어왔을 58년 당시 고려인은 거의 없었고 가끔 시장에 나가면 마주치곤 했다는데 올긴스카야에서 농사를 짓는 사람들이었다. 65년에서 70년도 사이에 고려인들이 많이 들어왔고 70년대 후반부터는 사할린에서도 오기 시작했다. 최근 2~3년은 우즈베키스탄과 북카프카스에서 많이 들어오고 있다.

이 니콜라이, 갈리나 부부(올긴스카야)
남편은 1930년 하라로브스크에서, 부인은 39년 타슈켄트 드미트리 농장에서 태어났다. 남편 니콜라이는 타슈켄트 기술전문학교에서 농업전기를 전공했다. 결혼을 계기로 57년에 부모가 사는 올긴스카야로 이주. 부모는 1952년에 이주했다. 당시 기사 월급이 120루블이었다. 고려인들은 식구도 많고 이 돈으로 살기가 어려웠다. 올긴스카야로 이주한 첫 고려인은 외삼촌 김 블라디미르. 그는 52년 카프카스에서 고려인 6가구를 데리고 이주해왔고 그해에 부모님과 형제들이 타슈켄트에서 곧 따라 이주했다. 10가구 4~50여명 정도 있었다. 그후 외가 친척들이 하나둘씩 이주해와서 59년에는 50여가구로 늘었다. 남자들은 농장에 적만 두고 고본질(고려인들이 공산주의 시절부터 부르는 자본주의 방식의 농업방식)을 다녔고 여자들은 농장에서 일하다가 수확철이 되면 휴가를 받아 합류했다. 아이들도 방학 때에는 다 나와서 움막에서 생활하다가 일을 도왔다. 59년까지는 벼농사를 지어 잘먹고 잘살았다. 그러나 물이 부족하다고 국가에서 벼농사를 못짓게 해서 농장도  양파농사로 전환했다. 60년에서 70년 사이에 약 150여가구가 들어왔다. 공기좋고 기후좋다고 소문이 나서 많이 이주해왔다. 그곳은 목화농장 때문에 공기가 나쁘고 더위 때문에 살기가 어렵다. 84년엔 특별히 사람들이 많이 이주해왔다. 소비에트가 붕괴되고 나서 매년 고려인이 늘고 있다. 올해도 이 마을에 10가구 정도가 들어왔다. 우리는 여기 토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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