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한 만남] 오명 전 과학기술부 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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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한 만남] 오명 전 과학기술부 장관
  • 김운하 해외편집위원
  • 승인 2018.01.23 1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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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가을에 만난 ‘대한민국 황희 정승’ 오명 전 부총리와의 간담회

▲지난해 가을 오스트리아 비엔나 교외 ‘골프클럽 브룬’에서 열린 오명 전 과학기술부 장관과의 간담회 모습 (사진 김운하 편집위원)

계절이 막 가을로 접어들던 지난해 9월 중순 어느 날, 선물 같은 만남이 비엔나 교외 2340 브룬 암 게비르게(Brunn Am Gebirge)의 ‘골프클럽 브룬’(Brunn)에서 있었다. 그동안 한국 매체에서만 이름을 접하던 오명 전 과학기술부 장관의 오스트리아 만찬간담회에 초대받은 것이다. 오 전 장관의 이야기를 들으며 내 자신도 지나온 날들을 되짚어보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오명 전 장관은 198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노무현 정부의 장관을 두루 지내 ‘직업이 장관’, ‘대한민국의 황희 정승이라 일컬어지는 인물이다.  
 
▲대전엑스포 정원에 세워진 대전엑스포유치공로 '오명송가비' 제막식 (사진 김운하 편집위원)

함께 간담회에 초청받은 이들은 정종완 재 오스트리아 한인연합회장과 천영숙 명예회장, 강유송‧이덕호 부회장, 한만욱 재오스트리아 한인과학기술자협회 전 회장, 국제원자력기구 차흥렬 박사, 오스트리아 한인문우회 황병진 회장, 비엔나 한인골프클럽 송광수 회장, 필자 등 9명 이었다. 브룬 골프 오덕희 대표와 남편 이종호 브룬 골프 회장은 초청자로 배석했다. 

처음 만찬간담회 초청을 받았을 때 의아하게 생각한 사람도 없지 않았다. 유명한 오명 전 부총리가 어떤 연유로 비엔나 골프장까지 왔는가? 오덕희 대표는 어떤 사이 길래 오명 부총리와의 간담회를 마련하고 초청하는 것인가?

우리들이 골프 클럽 라운지에 차려 놓은 식탁에 둘러 앉아 인사를 나누고 즐거운 만남을 위한 건배를 들고 난 다음, 오명 부총리가 이런 기미가 있음을 미리 알아 차렸음인지 자신의 집안 내력부터 소개했다.

“제 위로 누님이 세분 계시고 저와 남동생 그리고 여동생 둘 모두 칠남매인데, 저기 있는 덕희가 막내 여동생입니다. 이번에 스토니 브룩(Stony Brook) 뉴욕주립대학교를 방문하고 귀로에 비엔나와 홍콩을 방문하게 되어 잠시 들렸습니다.“라고 방문목적을 설명했다.

전두환 대통령정부의 청와대비서관으로 관직에 입문한 오명 전 장관은 체신부 차관과 장관을 역임하고, 노태우 대통령정부에서도 체신부 장관, 김영삼 대통령정부의 교통부 장관과 건설교통부장관, 노무현 대통령정부의 과학기술부 장관과 초대 부총리 겸 과학기술부장관 등 20여 년 간 ‘장관’을 직업으로 삼았던 관계로 숱한 에피소드와 전설, 산 역사를 창조했다.
 
▲ 송도 한국뉴욕주립대학교에서 거행된 '오명홀' 헌명식 (사진 김운하 편집위원)

그가 학계-언론계가 뽑은 ‘광복50년, 한국을 바꾼 100인’,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한국을 이끈 관료 베스트 10’, 고위공무원들이 뽑은 ‘성공한 장관 4인’등에 포함된 것은 오명박사를 언급할 때 널리 인용되고 있는 관용어적 찬사들이다. 오명박사는 정부 각료 외에 한국야구위원회 총재, 대전 엑스포 조직위원장, 동아일보 사장-회장, 아주대학교 총장, 건국대학교 총장 등을 역임했다.

만 77세의 연세로 정정한 그는 현재 자신이 전자공학과 학사, 석사, 박사학위를 취득한 뉴욕주립대학교(Stony Brook)가 인천 송도에 설립한 ‘한국뉴욕주립대학교’의 명예총장으로 활동하면서, 웅진에너지-폴리실리콘 회장, 동부하이텍 회장과 카이스트 이사장직을 역임했다. 또한 남미 콜럼비아와 파라과이, 캄보디아 정부 등의 국가정보화 사업을 지원한 바 있다.

우리들 중에 정종완 회장이 먼저 인사말을 했고, 어떻게 하여 한국의 여러 대통령이 부르는 공직자로서 성공할 수 있었는가 며 그 비결을 물었다.

“선친께서는 저를 어렸을 때부터 똑똑한 사람보다는 덕 있는 사람이 되라는 말씀을 자주 하셨어요. 훌륭한 리더가 되려면 덕이 있어야 한다고 늘 강조하시면서 여기에 더해 장래를 내다보는 비전을 가져야 한다고 말씀하셨어요. 아버님의 말씀은 일생을 살아가는데 큰 교훈이 되었어요.” 오명박사는 말을 이어 갔다.

“경기고등학교에서는 매년 2, 3명이 육군사관학교에 지원했는데, 당시 김원규 경기고등학교 교장선생님이 ‘훌륭한 학자가 되려거든 서울대학교에 가라, 하지만 비전을 가진 훌륭한 국가의 리더가 되려거든 육군사관학교에 가라’고 하셔서 그 말씀에 영향을 받아 그 해 30여 명이 육군사관학교에 지원했어요. 몸도 약하고 키도 작은 제가 육사를 지원하니 모두들 걱정을 했지만, 많은 어려움을 성공적으로 이겨내고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여 친구들 간에 큰 화제가 되었어요.”

▲모교 뉴욕 스토니 브룩 주립대학교(SUNY)에서 공학박사를 받은 후, 다시 명예인문학 박사를 받은 오명 전 과기부장관 (사진 김운하 편집위원)

육사 졸업 후 군에서 복무하면서 모든 첨단장비들이 전자화 하는 것을 보고 전자시대가 올 것을 예견한 그는, 서울공대 전자공학과에서 수학하고 뉴욕주립대학교(Stony Brook)에서 전자공학을 전공하여 박사학위를 받는다.

1980년 청와대 경제비서관으로 관계에 입문해 1년 뒤 41세에 체신부 차관으로 발탁된 그는 무려 8년여 동안 체신부 차관, 장관을 역임하며 한국의 통신혁명을 주도하고 한국이 정보 통신 강국으로 발전하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한다. 이로 인해 그에게는 ‘한국통신의 대부’ ‘한국IT의 그랜드 디자이너’라는 닉네임이 따른다.

그는 미래를 내다보는 큰 비전을 가지고 조직을 이끌어 나가되 충분한 대화를 통해 부하들과 목표를 공유하고 부하들에게 과감히 권한을 위임하는 리더쉽을 발휘 했다. 그의 리더쉽은 아랫사람들에게 전폭적인 신뢰를 보여 주고, 그들의 능력과 경험을 믿고 일을 과감히 맡기되, 그 자신은 전체 흐름을 조율하면서 부하들의 일이 순조롭게 추진 될 수 있도록 뒷받침하는 방식이다. 또한 성공에 대한 모든 공을 부하들에게 돌리고 그 자신은 늘 겸손 했다.
 
▲ 인천송도에 건립된 한국뉴욕주립대학교 (사진 김운하 편집위원)

그는 명분이나 체면보다는 논리와 효율에 따라 움직이는 과학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으며, 온화하고 부드러운 자세를 가지면서도 한번 결정한 것은 끝까지 밀고나가는 단호함을 보였다. 그는 늘 “윗사람 눈치 보기보다는 아랫사람 존경을 받으라‘ 고 가르쳤다. 그 자신이 모범을 보이기도 했다. 이러한 공직자로서의 자세가 부하직원들로부터 존경받고, 오랜 기간 공직에 머물면서 많은 일을 성공시킨 근원이 되었다.

오명박사는 과학자들인 한만욱 박사와 차흥렬 박사가 화제로 끌어낸 과학입국 등에 대하여도 재미있는 에피소드들을 늘어놓았다. 그는 먼저 한국산업화의 초기 체신부 장관으로서 정보통신혁명의 기틀을 닦은 공적을 말했다. 이 시기 ‘전전자교환기’(TDX), ‘4메가 D램 반도체’, ‘슈퍼미니 컴퓨터 개발’을 과감히 추진해 한국이 세계적 IT강국으로 도약하는 기반을 쌓은 것이 큰 공적중의 하나라고 했다.

88서울올림픽에서 성공적인 정보통신지원을 한 일, 개발도상국가로서 성공하기 어렵다던 93년 대전 엑스포를 성공시켰던 것은 지금도 자랑하고 싶은 경사라고 했다. 그가 정부대표 겸 조직위원장이었던 ‘93 대전엑스포’에는 108개국, 33개 국제기구, 1,400만 명의 관람객이 참여하는 대성공을 거둬, 그는 2007년 국제박람회기구(BIE)의 ‘황금 메달’을 받았다.

김영삼 대통령 정부의 교통부와 건설교통부장관 시절에는 경부고속철도와 인천국제공항 건설, 고속도로  버스전용차로제 시행, 물류현대화 마스트 플랜 수립 등을 통해 한국이 동북아시아 물류 허브로 자리 잡는데 큰 기여를 했다.

그는 경부고속철도를 성공적으로 건설했을 뿐만 아니라, 한국철도기술연구소를 설립하고 시속 420km/h의 고속열차를 개발하여 운용하는데 기여했다. 그가 역점을 두고 추진한 인천국제공항은 최고의 IT기술이 동원된 동북아 허브공항으로, 14년 째 세계 최고 서비스공항으로 평가되고 있다.

노무현 대통령이 5.6공 정부와 김영삼 문민보수정권의 장관을 지낸 오명박사를 기용한 것은 당시에도 큰 화제가 되었다. 노무현 대통령은 오명박사를 ‘삼고초려해서 모셔 왔다’고 발표하면서 전폭적인 신뢰를 보였다. 기술개발, 인력양성, 생산과 수출 까지 전체 미시경제를 총괄하는 부총리로서, 관련예산까지 총괄하는 과학기술 부총리 체제를 출범시킨 것이다. 

그는 초대 부총리 겸 과학기술부 장관으로 재직하면서 바이오산업 육성과 우주기술 개발에 앞장섰던 것을 회상했다. 우주개발진흥법을 제정하고 한국 최초 우주인을 탄생시켰다. 최초 우주인으로 여성을 선발하자 남성우월론자들의 비난을 받았던 일도 웃으며 소개했다. 우리가 만든 인공위성을 우리 땅에서 우리 발사체에 실어 우주로 쏘아 올린 장거를 신바람나게 들려주었다. 그는 우주기술 협력을 위해 직접 러시아를 방문하고 협정서에 서명했다.
 
▲ 오명 전 과학기술부 장관 (사진 김운하 편집위원)

미국, 프랑스, 일본, 독일, 러시아, 중국과 함께 ITER프로젝트에 참여한 과정도 자세히 설명했다. 이것은 방사능이 수반하지 않는 ‘핵융합발전소’건설사업으로, ‘지구상에 작은 태양’을 만드는 사업이라고 할 수 있다. 이 프로젝트가 성공하면 인류의 에너지 문제는 완전히 해결된다는 것이다. 이 역사적인 프로젝트에 선진 6개국의 하나로 참여한 것은 과학한국의 장래를 빛낼 쾌거라고 밝혔다.

그는 덕망 있는 지도자로서 갖출 요소의 하나로 ‘부하에 대한 마음으로 부터의 사랑’ 뿐만 아니라 ‘윗사람에게 의리와 충성을 다하라’는 말을 남기고 싶다고 했다. 자신이 솔선수범해야 아랫사람들이 따른다고 했다.

백담사에 갔다 온 전두환 전 대통령이 아들을 장가보낼 때 문민정부의 현직 장관으로서 참석하고 축하를 했다. 장관급 고위 관료는 자신 뿐이었다고 했다. 또한 자신이 모셨던 전두환 전 대통령과 노태우 전 대통령이 구속되었을 때, 그는 지역구 국회의원 후보로 내정되었으나, 모시던 상사를 비난 할 수는 없다는 이유로 후보 자리를 물러났다.

필자는 로스앤젤레스에서 미주동아일보를 창간한 김성수 전 부통령의 아들이며 국회의원을 지낸 김남 사장과 후에 김성수 전 부통령의 장손으로 훗날 동아일보 회장이 된 김병관 전무 체제 하에서 편집국장을 지냈다. 그래서인지 김병관 회장의 초빙으로 오명박사가 동아일보 사장과 회장도 역임한 내력이 흥미롭고 궁금해 이에 대해 질문했다.

“동아일보 김병관 회장과는 그리 좋은 관계가 아니었는데, 김영삼 정부의 건설교통부 장관을 막 끝내고 나온 나를 동아일보 사장으로 초빙 했어요. 의외의 초빙이었어요. 언론사 사장에게 직설적인 이야기를 하는 태도에 오히려 호감을 가졌던 것 같아요. 1996년 6월이었어요. 나는 취임하자마자 간부들과 기자들을 설득해 신문사의 전반적인 쇄신을 위한 컨설팅을 받기로 하는데 성공했어요. 이것은 아마도 한국 신문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일 거예요. 어쩌면 소리 없는 신문 혁명이었지요.”
 
▲모교 SUNY공과대학에 새로 세우진 명예의 전당에 1호로 선정된 오명박사에게 사무엘 엘. 스탠리 2세 총장(왼쪽)과 포티스 소티로포우로스 기계응용대학 학장이 '명예의 전당'이라고 쓰여진 입주자축하패를 수여했다. (사진 김운하 편집위원)

처음에는 반대와 반발, 비난도 있었지만, 회사의 모든 간부들과 직원들이 컨설팅 회사의 질문과 조사에 충실하게 응했다. 결과는 모든 문제가 노출되고, 그 해결책이 강구되었다. 과학적이고 논리적인 진단과 해결방안이 마련되었다. 오명사장은 이 방안에 따라 동아일보의 기술발전과 혁신, 신문의 새로운 모습을 창조 했다.

신문학 연구나 기자의 경력 하나 없는 비 언론계 인사였지만, 오명 사장은 명 신문사장이 되었다. 회장까지 승진하여 2001년 7월 까지 만 5년 넘게 동아일보의 발전을 진두지휘했다.

오명 부총리는 자신이 공학박사학위를 받은 미국 뉴욕주립대학교(Stony Brook University)의 ‘University Professor’로 임명됐으며, 명예인문학 박사 학위를 추가로 받았다. 그는 외국대학으로는 첫 번째로 모교인 뉴욕주립대학교를 인천 송도에 유치했으며, ‘한국뉴욕주립대학교’(SUNY KOREA)의 명예총장으로 봉사하고 있다. 그는 작년 4월 모교 스토니부룩대학에 만들어진 명예의 전당에 제 1호로 이름을 올렸다.

인천 송도에 있는 ‘SUNY Korea’는 한국의 최고 대학들과 같이 세계 랭킹이 높은 학교로, 수능시험을 보지 않고도 들어 갈 수 있는 대학이며, 입학절차는 미국대학과 같다. 등록금도 주립대학이라 사립대학의 절반수준이다. 전원 기숙사 생활을 하며, 1년은 미국본교에서 공부를 하게 된다.
 
▲지난해 가을 오스트리아 비엔나 교외 ‘골프클럽 브룬’에서 열린 오명 전 과학기술부 장관과의 간담회 모습 (사진 김운하 편집위원)

생활비가 많이 들고 여러 가지 어려운 점도 많은 미국생활을 하지 않으면서도 미국 대학교육을 받는 것과 같은 효과를 받을 수 있어 해외에서 고등학교를 나온 학생들에게 인기가 높다. 오 전 장관은 앞으로 이 대학이 한국과 미국의 우호증진 뿐만 아니라 학문교류와 발전을 위해 큰 역할을 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오 전 장관은 3시 간 가량의 간담회 후엔 ‘30년 후의 코리아를 꿈꿔라’와 자신이 발명특허를 가진 ‘넥타이 고정기’를 참석자들에게 선물했다. 저서에는 그 자신만의 ‘성공 방법론과 자기 경영법’이 자세하게 기술돼 있었다.

“큰 나라 한국의 저력을 믿고 나가라. 강력한 정보 통신 기반, 첨단을 달리는 과학기술력, 한국인의 뜨거운 교육열, 자랑스런 이 세 가지가 있는데 무엇을 두려워하랴. 우리는 계속 달릴 수 있다. 우리 할아버지와 아버지들이 한 것 보다 더 큰일을 해낼 수 있다. 우리 자신을 믿자. 우리가 태어난 대한민국의 저력을 믿자. 신념은 자부심을 부르고, 자부심은 사명을 낳는다.”  - ‘30년 후의 코리아를 꿈꿔라’ 서문 중에서

한국 최초의 과학기술 부총리 겸 과학기술부 장관인 오명 박사와의 만찬간담회는 길이 추억에 남게 될 것같다. 오명 부총리는 현재 한국뉴욕주립대학교에는 23개국 학생들이 수업을 하고 있다며 관심이 있는 학생들이나 부모들이 자신에게 문의하면, 성심껏 돕겠다는 말로 간담회를 마쳤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