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애 실천한 독일목사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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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애 실천한 독일목사 떠난다
  • 김진이
  • 승인 2004.07.1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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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인노동자 운동가 요르그 바루트

한국의 크레파스, 물감의 ‘살색’없애기 운동에 앞장섰던 독일인 요르그 바루트(jeorg baruth)목사가 한국에서의 7년 5개월 생활을 마치고 귀국한다. 한국의 외국인노동자들을 돌보는 일에 앞장서온 인류애의 실천자 바루트 목사는 서울시 명예시민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1997년 2월 26일 입국해 성남 외국인 노동자교회 등에서 활동을 해왔고 7월 20일 귀국한다. 7월 18일 오전 10시 중국동포교회에서는 바루트 목사의 송별식이 열렸다.
  
- 7년 5개월간의 한국생활을 마감하는 느낌은? 
유럽인으로서 너무 어렵게 살고 있는 유색인(아프리카나 동남 아시아 사람들)보다는 잘 살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 백인들에게 한국사람은 너무나 친절하다. 또한 한국문화가 재미있고, 새로운 것과 엄청나게 많은 사건이 터지고 신문에 발표되고 있다. 독일에 비해 새로운 것을 많이 접하고 실험할 수 있다는 것을 느꼈다. 또 한국 사회는 너무 바쁘게 돌아간다. 항상 ‘빨리빨리’라는 말만 외치고 자신만을 위해 뛰어 가고 있다. 그리고 아파트만 있고 전통가옥이 없어져 가는 것에 대해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다. 한국에 와 있는 외국인노동자들이 힘들고 어렵게 살아가는 모습이 매우 안타깝다. 이들에게도 인간적인 삶이 보장되었으면 한다.

- 한국에 와서 가장 어려웠던 일은?
한국에 와서 가장 어려웠던 일은 한국어를 배우는 것이었다. 한국사회에서 목사로서 한국어로 설교를 하거나 대화를 해야 하는데 한국어를 잘 하지 못해서 매우 답답했고, 할 말은 많이 있는데 원하는 말을 할 수 없고 또 한국식의 표현을 할 수 없어서 매우 답답했다. 반면에 한국음식을 배우는 것은 쉬웠다. 한국 음식은 무엇이든지 잘 먹을 수 있고, 보신탕도 아주 맛있다. 그러나 뻔데기와 산낙지는 도저히 먹을 수 없었다. 

- 한국생활에서 가장 마음 아팠던 일은?
지금은 괜찮아졌지만 가장 마음 아팠던 일은 한국에 처음 와서 1~2년 동안 세 자녀가 이 한국에 살기 싫다고 독일로 돌아가자고 졸라대서 매우 괴로웠었다. 그 이유는 동네 놀이터에서 한국 아이들이 돌을 던져서 맞았기 때문에 울면서 돌아가자고 했다. 또 이 한국 아이들이 침을 뱉는 등의 행패를 부려 더 심각해 졌었다.  그러나 지금은 외국인이 독일에 와서 살면 그 외국인들도 똑같은 경험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이젠 아이들이 깨닫고 있기 때문에 이것을 이해를 하는 단계에 와 있다.

- 한국에서 외국인노동자의 집과 함께 ‘살색 없애기 캠페인’을 벌였는데. 
독일에도 같은 문제가 있고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지금도 있다. 한국인살색도 살색이지만  희거나 검은색도 살색임을 알아야 한다. 2001년도 말에 국가인권위원회에 살색이라고 표기된 크레파스, 물감회사 사장들을 상대로 제소를 하였다. 함께 일하는 백인인 미국인 잭 워터월드목사님과 나,  그리고 아프리카 흑인 친구와 스리랑카의 친구, 김해성목사 다섯 명이 함께 냈다. 이것이 국가인권위원회에 받아들여져서 크레파스나 그림물감 등에 살색이라는 명칭이 사라지게 되었다. 지금 한국에 와 있는 외국인노동자들은 너무나 많은 고통을 당하고 있는데, 이것은 결국 한국인들의 이와 같은 차별의식 때문이라고도 생각해 본다. 특별히 나는 독일인이고 백인이며 목사이다. 그래서인지 한국사람들이 참 친절하게 대해준다. 그런데 외국인노동자들에게 함부로 대하는 차별도 문제이지만 우리에게 특별하게 잘 대하는 것도 차별행위이다. 누구나 똑같은 대접을 받아야 한다.  

- 감옥에 있는 외국 사람들을 도왔다는데?
감옥에 있는 이 외국인들은 가족, 친지 등이 면회를 올 수 없어서 너무 외로움을 느끼고 있다. 그리고 이들은 돈도 없고 또 외부에서 넣어 주지 않으면 외국 책도 볼 수 없기 때문에 영치금과 외국 책과 신문과 편지 등을 보내주었다. 그곳에서 면회는 10~15분 정도만 할 수 있는데 좋은 데서는 3시간씩 면회 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외국인으로서 긴 시간 이 사람들의 말을 충분히 들어 줄 수 있도록 면회 시간이 좀 길어 졌으면 좋겠다.

- 한국 사람들에게 바라는 점은?
첫째, 한국인들이 유럽인에게는 친절하지만 흑인을 만나면 무서워하거나 싫어한다. 이들도 같은 사람임을 깨달았으면 좋겠다. 둘째, 한국사람들은 공원, 지하철, 교회에서 너무 큰소리를 내거나 외쳐대는 모습을 자주 보는데 이 점을 고쳐서 참 고요하고 평온한 모습을 가졌으면 좋겠다. 셋째, 학교에서 교육상 필요하다면서 아이들을 때리는 것은 참 이상한 일이다. 그리고 부모들도 아이들을 때리는 모습을 종종 보게 되는데 어렸을 때에 맞으며 자라는 아이는 부모가 되어서도 자녀를 때리는 일이 많아지게 된다. 지하철에서도 친구들끼리 장난삼아 서로 간에 매우 세게 후려치는 모습들을 보게 되는데 이것은 폭력적인 한국의 문화를 보는 것 같아 안타깝다.
한국 살면서 아주 큰 아픔 느낀다. 내가 사는 곳 집 주변에 작은 동산이 하나 있었는데 이년동안 공사를 해서 산을 없애고 아파트를 세웠을 때 큰 아픔을 느꼈다. 여기저기 많은 곳에서 이와 비슷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사람들 생각대로 환경을 마구 바꾸고 있는데, 이 자연은 하나님의 것이고 우리 자녀들 위해 보호해야 하는데 것인데 이처럼 환경과 자연을 파괴하는 모습이 참으로 안타깝다.
아내와 함께 모임에 나가면 한국 남성들이 나하고만 악수를 하고 내 부인은 그냥 인사를 하고 멋적게 서서 바라만 보게 하는 일 때문에 부인에 대해 항상 미안한 생각이 든다. 이것은 유럽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이러한 현상은 한국의 남성 중심의 문화, 남녀 차별적인 모습에서 출발했다고 보여진다.

- 독일의 통일과 한국의 분단에 대해서는?
독일은 통일 문제에 있어서 한국보다는 선배인데 한국의 분단 상황을 볼 때 독일의 통일도 매우 어려웠지만, 한국의 통일은 더 어려울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 이유는 분단 독일에서는 편지나 전화를 대부분 필요시에 항상 할 수 있었고, 75년부터는 서독 사람이 동독을 방문해서 자유롭게 개인 집에서 만날 수 있었다. 나의 어머니도 베를린 장벽이 세워짐으로 이산가족이 되었었는데 75년 이후부터는 세 명의 언니들은 서독에 살고 있었고, 종생인 어머니가 살고 있는 동독에 편지, 전화도 하고 자유롭게 동독을 방문도 할 수 있었다. 이런 면에서 한국은 편지와 전화, 그리고 방문도 할 수 없기 때문에 독일보다는 통일을 이루는데 있어서 좀 어려울 것이라는 생각이다.
위에 설명했던 독일 상황은 서독정부의 정치 덕분에 가능할 수 있었다. Willi Brandt과 같은 정치가들이 서독과 동독사이에 왕래를 통해 다리를 만들었다. 보수적 정치가들은 항상 그 정치를 비판했지만, 결국에는 서독과 동독사이에 걸음걸음으로 다리를 만들었던 그 정치가 특히 통일 이유들 중에 한 중요한 이유가 되었다.
그렇지만 한국과 북한이 서독과 동독처럼 걸음걸음으로 접근하지 않는다면 통일은 많은 세월이 흐른다 할지라도 이뤄질 수 없다고 생각한다. 원수들 사이에 있는 차별은 작은 걸음으로써 없어진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느 한쪽의 나라가 먼저 첫째 걸음을 시작해야 한다. 그런데 한국이 먼저 첫째 걸음을 벌써 시작했기 때문에 앞으로 내국과 외국 정치가 중에 반대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고 하더라도 나는 한국의 통일을 향한 정책에는 문제가 없을 것이라 생각을 하며, 또 한국정부가 앞으로도 계속해서 북한에 걸음걸음으로 다리를 만들어 가기를 바라고 있다.

<자료제공 :  외국인노동자의 집/중국동포의 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