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외 동포의 실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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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외 동포의 실상
  • ○○신문
  • 승인 2004.06.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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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재외 동포에 대한 올바른 자세
  위대한 조국이여! 나의 모든 것을 바치노라. 당신의 품속에 태어난 것이 행복하기에 당신을 위해 죽는 것은 더욱 행복하여라! -로베스피에르 : 로베스피에르 프랑스 혁명 당시 자코뱅당을 이끌면서 공포 정치를 전개하였다.

1) 재외 동포의 실상
  세계 여러 나라에는 우리와 혈통과 뿌리가 같은 한민족이 살고 있다. 미국, 일본, 중국, 러시아 등 5대양 6대주의 140여 국가에 수백만 명의 한민족이 거주하고 있다. 국외에 거주하는 한민족은 정부의 공식적인 통계로도 약 560여만 명으로 남한 인구의 약1/8에 이른다. 이들은 우리 나라를 떠나 이국 땅에서 국적을 취득하여 살고 있는 사람들이거나 그 후손들로서, 우리는 이들의 ‘재외 동포’라고 한다. 이민 1세대는 19세기 중반 이후 국내외의 복잡한 정세에 따라 고국을 떠나 타국에서 삶의 터전을 개척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온갖 고생을 무릅쓰며 살아보겠다는 의지와 부강하고 독립된 나라를 만드는데 보탬이 되겠다는 일념으로 간도와 연해주, 만주 등지로 옮겨 간 이주민들이었다. 그 후, 1962년 정부에 의해 이민법이 제정되면서 보다 나은 삶을 살아가기 위해 자의적으로 조국을 떠나는 개척 이민이 가능해졌다. 1960년대는 광부와 간호사들이 주축이 된 독일 취업 이민이 이루어졌고, 브라질, 아르헨티나 등 남아메리카 농업 이민을 비롯한 한민족의 외국 진출은 1970년대부터 본격화되었다. 특히, 1990년대에 이르러서 이민 절차가 용이하면서도 비교적 쾌적한 삶을 누릴 수 있는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 캐나다 등지로 진출하는 한민족이 늘어나기 시작하였다.

※국외 이주의 역사
시 작
삼국 시대 이전에 중국 대륙과 교류

일제 강점기
강제적이거나 불가피한 이유

1960년대 이후
미국, 남아메리카, 오스트레일리아,
유럽, 캐나다 등지로 자발적으로 이주

  이처럼 이민이 하나의 자연스러운 삶의 방식이 된 상황에서 재외 동포에 대하여 어떤 마음을 가져야 하겠는가? 재외 동포는 조상이 한국인이라는 점에서 한국은 그들의 조국이 된다. 한국과는 끊으려야 끊을 수 없는 결속과 유대 관계를 맺고 있는 셈이다. 따라서, 우리는 재외 동포에 대하여 뜨거운 관심과 깊은 애정을 가져야 한다. 더욱이 현대는 국가 간의 경쟁이 치열한 시대로 재외 동포와 일체감 형성을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 인터넷 시대 재외 동포와 일체감 형성을 위한 노력
?한민족 네트워크 공동체 구축
?국외 인터넷 방송 실시
?사이버 한민족 글로벌 네트워크 구축

2) 재외 동포의 나라 사랑
  우리 한민족의 해외 이민 진출 과정을 되돌아보면 가시밭길을 헤맨 자국들로 점철되어 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재외 동포는 모국에 대한 강인한 귀속 의식과 애정을 간직하고 있었다. 특히, 조국 광복을 위해 절치부심( �S�했던 동포들로부터 지난 날 한국의 보릿고개를 퇴치하기 위해 눈물겨운 헌신을 하였던 동포에 이르기까지 한민족의 피와 땀은 오늘날 모국의 발전에 숨은 거름이 되었다. 중국에 거주하는 한인들의 애국심은 하나의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다. 당시 그들은 나라 전체를 일본에 빼앗긴 상태에서도 강렬한 항일 정신을 가졌었고, 이에 기초한 그들의 항일 투쟁은 일본과 전쟁을 치르고 있었던 중국인을 능가하는 수준이었다. 그러한 중국 거주 동포의 열정은 한국이 독립하는데 귀중한 자산이 되었다. 또, 그들은 중국에 사는 다른 민족에 비하여 민족 결속력과 응집력이 매우 강하여 아직까지 우리 고유의 문화를 간직하고 있다. 특히, 연변 조선족 자치주에서 살아가며 형성된 민족 의식은 중국 전 지역에 거주하는 한인들에게 새로운 활기를 불어넣어 한인으로서 긍지를 가지고 중국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중요한 구심 역할을 하고 있다. 그 밖에 미국이나 프랑스, 독일 등 유럽에 진출한 재외 동포의 활약상도 눈부시다. 그 중에서 음악이나 미술 등 예술부분에서 탁월한 업적을 남긴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해당 국가의 정치계에 입문하여 정책 결정에 상당히 중요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사람들도 있다. 또, 변호사나 의사 등 전문 직종 분야에서 성공한 사람들도 적지 않다. 그 밖에도 오지(        ��에 가서 어려운 사람들을 돌보는 등 인류애에 바탕을 둔 감동적인 헌신으로 한국인의 위상을 드높이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우리는 이러한 재외 동포의 활약상을 접할 때마다 같은 민족으로서 자긍심을 느낀다. 이국 땅에서 묵묵히 평범한 삶을 살아가는 동포도 적지 않다. 이들도 의미 있는 조국애를 실천하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들은 때때로 모국 상품의 수입상 역할을 함으로써 우리 기업의 외국 진출에 기여하는가 하면, 한국문화의 세계화에 첨병 역할을 하기도 한다. 한 예로 뉴욕에 진출한 한민족은 한국문화를 뉴욕의 여러 소수 민족 및 미국인들에게 알리는 데 큰 공헌을 하였다. 뉴욕 지역의 한인 수가 몇천 명밖에 되지 않았던 1970년대 초에는 김치를 맛보았거나 부채춤이나 사물놀이를 본 미국인은 거의 없었으나, 요즈음에는 김치나 부채춤은 미국인들에게 익숙하다.

※ 재외 동포의 조국애
?기업의 세계 진출에 기여 : 모국 상품의 수입상 역할
?한국 문화의 세계화 : 감차, 부채춤, 사물놀이 등 보급
?모국어의 확산

  특히, 미국 일부 지역의 고등학교와 대학교에서 한국어를 일본어, 중국어와 함께 동양의 주요 외국어로 선택하고 있는 곳이 늘어나고 있다. 이와 같이 세계 각지에서 살고 있는 재외 동포의 노력은 국가와 민족 발전에 기여하는 것은 물론이고, 통일 한국과 세계화를 위해 중요한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된다.

3) 재외 동포에 대한 올바른 시각
  오늘날, “그 나라 사람이 해외에 얼마나 진출해 있느냐?”하는 것은 한 나라의 국력을 평가하는 여러 가지 기준 중에서 하나로 등장하고 있다. 영국, 프랑스를 비롯하여 유럽 각국은 19세기 초부터 여러 지역으로 진출하였으며, 제 2차 세계 대전 당시 패전국이었던 일본, 이탈리아도 강력한 이민 정책을 통해 국가 활로를 찾았다. 특히, 부존 자원이 부족할 뿐만 아니라 인구에 비하여 국토 면적이 좁은 우리나라의 특수한 상황을 고려한다면, 우리 한민족이 세계 여러 지역으로 진출하는 것은 국가와 민족의 발전에 매우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할 수 있다.
  그런가 하면, 이민자들은 천신만고 끝에 이국 땅에 정착할 수 있었던 사람들이다. 특히, 남아메리카에 이주한 한인들의 애환은 우리의 심금을 울린다. 1인당 국민 소득이 미화 수십 달러 수준이었던 당시 상황에서 한국 정부는 이민을 떠나는 사람들에게 가지고 갈 수 있는 돈을 미화 1,000달러 이내로 제한하였기 때문에 돈이 있어도 가져갈 수 없었다. 따라서, 남아메리카 이민자들은 평생 입을 옷이라도 장만하기 위하여 많은 옷을 가져갔지만, 살길이 막막해지자 가져간 옷을 시장에 내다 팔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가져간 옷을 모두 팔고 난 이후에도 브라질 사람들은 한인만 보면 옷이 없느냐고 물어 볼 정도로 옷의 인기는 좋았다. 이 때문에 한인들 중에서 상당수는 옷 장사로 성공할 수 있었다.
  해외에 이주하여 살고 있는 우리 재외 동포는 조국에 대하여 깊고 큰 애정과 향수를 느끼고 있다. 이것은 뿌리에 대한 끈끈한 정과 그리움의 발로라고 할 수 있다. 우리도 재외 동포에게 동포애를 보여 줌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기댈 수 있는 따뜻하고 자랑스런 조국이 있다는 사실에 대하여 자신감과 긍지를 가지도록 해야 한다. 재외 동포에 대하여 공동체 의식을 가지고 사랑과 지원을 보내는 것은 조국의 당연한 임무이고 의무이다. 우리나라 헌법 제 2조 제 2항에도 “국가는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재외 동포를 보호할 의무를 진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재외 동포는 외국에 동화되어 살면서, 더 나아가 외국에서 출생하여 그 나라 국민으로 살고 있으면서도 조상의 나라를 조국으로 삼고 있는 정신적 한국인들이다. 따라서, 이민자들이 어느 나라에서 살고 있느냐를 떠나서 우리나라 동포이다. 모국이나 조국이 의미하는 것처럼 한국은 언제나 그들에게 어머니, 할아버지와 같은 존재이다. 비록, 그들이 한국을 떠나 국적을 바꾸어 살고 있다 하더라도 우리는 항상 가슴 속 깊이 그들과 하나라는 생각을 가지고 늘 함께 살아가야 할 우리 이웃으로 대해야 할 것이다.

탐구 과제 재외 동포에 대한 올바른 자세 확립하기
  다음 글을 읽고, 재외 동포에 대한 우리 자세 중에서 문제점을 보완할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 보자.
  나라가 나라 구실을 못하던 시절, 등짐을 지고 떠난 이주민들을 끝내 다시 돌보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해바라기처럼 늘 조국을 향한 그리움을 간직하고 있었다. 항일 투쟁에 뛰어들거나, 쌀 한 숟가락의 성금을 거두어 보내던 마음이 그들에게 온전히 살아 있었다.

?일제 강점기, 이주민들은 사실상 고아 신세였다. 상주 인구가 70여 명에 불과한 일본 거주 동포지역에는 영사관을 설치하면서도, 강제 징용 1~3세대로 한인 4만여 명이 살고 있는 사할린에는 영사관조차 없다. 일본과의 오랜 보상 협상 과정에서 ‘힘없는 조국’을 뼈저리게 깨달은 사할린 동포는 더 이상 조국에 기대할 것이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따라서, 한인 3세대들은 지금 일본어를 배우고 있다. 한국보다 일본이 더 기회가 많기 때문이다.
?한인 2만여 명이 모여 사는 러시아의 하바로프스크에는 두 개의 한인회가 있다. 구한말부터 옮겨 간 동포와 최근 진출한 기업체 관계자 간에 깊은 골이 있기 때문이다. 한국 기업들은 고려인 채용을 꺼리고 있다. 다른 지역도 큰 차이는 없다.
?영구 귀국한 사할린 동포의 가족들은 고국 방문 기간을 3개월로 제한 받는다. 불법 취업에 대한 당국의 우려 때문이다. 독립 유공자의 직계 자손들도 불법 취업 의심자로 분류되어 쉽게 조상의 고향을 방문하기 어렵다. 여기서 우리 사회의 기묘한 이중 잣대가 노출된다. 연예인이나 사업가로 국내에 진출해 거액의 소득을 올리는 미국 동포는 성공담의 주인공이 되고, 식당이나 공사판에서 막일을 하기 위해 들어온 동포는 불법 체류자로 의심받는다.
?현재의 재외 동포법이 1948년 이전에 해외로 이주한 동포를 차별하고 있다고 판시하였다. 독립 운동이나 강제 징용을 회피하기 위하여 이주한 뒤 외국 국적을 취득한 동포에게 아무런 혜택을 주지 않는 것은 사실상 ‘동포 차별법’이라는 지적이었다. 이에 따라 정부는 노동부와 외교 통상부를 중심으로 법 개정 작업에 돌입하였다. 이는 광복 56년 만에 마침내 보인 희망의 징조이다. -○○신문, 2001년 12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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