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주동포 김혁규의 뉴욕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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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주동포 김혁규의 뉴욕 시절
  • 안동일
  • 승인 2004.06.0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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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혁규 전 경남지사, 이제는 공식 임기가 시작된 17대 국회 김혁규 의원. 그이만큼 요즘 정치권이며 세간에 이름이 회자되는 이가 많지 않다. 차기 국무총리로 거론되면서 여기저기서 찬반양론이 끊이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알다시피 그는 재미 동포 출신이다.  71년에 도미해 92년 영구 귀국하기 까지 21년을 뉴욕에서  살면서 자신이 바라던 아메리칸 드림을 일정 부분 성취했다고 여겨지는  재미 동포다. ‘가난한 현실에서 벗어나 아메리칸 드림을 실현하고 싶었다’는  그의 미국 생활은 다른 성공 이민자의 그것과 크게 다를 바 없다.

30대 중반 단돈 1천달러를 쥐고 태평양을 건너 미국 땅을 밟은 이래 접시닦이, 행상일로 시작, 귀국 무렵에는 뉴욕 한인 사회에서 몇 손가락 안에 드는 부를 일궈냈던 입지전의 주인공이 바로 그다.  부인이 간호사였던 것은 적지 않은 도움이었던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일 듯.

  그가 사업가로 일어서게 된 것은 '벨트 파우치'라는 기발한 상품을 개발하면서부터 였는데 허리춤에 차던 전대에서 힌트를 얻어 '허리용 쌕'을 고안해낸 것. 당시 미국 텔레비전은 "아주 이상한 상품이 올해의 히트상품이 됐다"고 소개하기도 했고 이 아이디어로 그는 '혁 트레이딩'이라는 회사를 설립해 무서운 기세로 돈을 벌어나갔다.

뉴욕의 중심부인 브로드웨이 29번가의 5층 건물을 매입했고 빌딩 1층의 ‘혁 가방’에서 미국의 유명 택배 회사인 UPS에 전국으로 배달될 가방 박스를 손수 실어 나르는 그의 모습은 지금도 동포들의 뇌리에 남아 있다.

  사업 기반을 잡은 그는 사회 활동에 눈을 돌리게 된다. 주변 동포 사업가들을 모아 뉴욕한인경제인협회를 결성, 초대 회장에 취임(1978년)했다. 종래는 브로드웨이 한인 상인 번영회 였는데 명칭을 확대변경 했고 이후 경협은 뉴욕 최고의 직능단체로 역할하고 있다.  

뉴욕한인회 이사장도 깔끔했다는 평가와 함께 역임한 그는  5공 시절 민주화추진협의회 뉴욕지회를 통해  YS의 상도동계와 인연을 맺기 시작했다. 호남 출신인 박지원씨가 성공한 해외 기업인으로서 동교동계와 내왕한 것과 비슷한 맥락이었다.

이런 인연 끝에 그는 1992년 대선을 앞두고 귀국해 김영삼 후보의 사조직인 나라사랑실천운동본부의 총괄기획실장을 맡게 되면서 본국 정치권에 합류 하게 된다.

사실 그 무렵 동포들은 김혁규 씨와 박지원씨 등 동포 유지급 사업가들이 야당인 양 김씨와 연을 맺은 것을 보고 의아하게 생각한 측면도 많았다. 그간의 행적이며 성향들로 봤을 때 야당보다는 친정부 여당 쪽에 가깝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의 결단에 가까운 선택은 그들에게 큰일을 하게 했던 것.

김혁규 의원에 대한 뉴욕 동포들의 평가는 꽤 좋은 편이다. 평소에도 성실하고 사려깊은 그의 성정이 도백이 되어서도 또 다른 고향이었던 뉴욕의 동포들에게 변함없이 보여졌기 때문. 지사시절 그를 찾았던 동포들은 대부분 다른 출세(?)한 인사들과는 달리  성의 있는 응대를 받았다고 말하고 있다.

뉴욕의 한 활동가는 “군사 독재시절 민주화 성금을 걷기 위해 브로드웨이를 돌았을 때 흰 봉투에 돈을 넣어 건네면서 문까지 배웅했던 사람은 김회장 뿐이었다”고 지금도 칭송하고 있는데 귀담아 둘 대목.

김혁규 의원은 1939년  경남 합천군 시골 마을에서 태어났는데  5형제 중 맏이로 일찍이 부모를 여의었기에 고생스러운 소년 시절을 보냈다.  김해시 진영에 있던 한얼고등학교에 다니다 부산 동성고등학교로 옮겨 졸업했으며 부산대 행정학과에 진학했다.

대학을 졸업한 뒤 9급(요즘 기준으로) 공무원 시험을 치러 창녕군청 말단 공무원으로 공직 생활을 시작했다. 그 뒤 경남도청을 거쳐 내무부 근무까지 6년간 공무원 생활을 통해 7급에 올랐지만 더 큰 꿈을 이루기 위해 태평양을 건넜고 다시 태평양을 건너서는 ‘7급에서 도지사로의 금의 환양’, ‘성공한 3선의 CEO 지사’로 칭송 받았던  그는 이제 인생의 마지막 꽃을 피우려 하고 있는 중이다.

  열린 우리당 비례대표 순위 4번 당선자인 그는 총선 때 103억6324만3천원의 재산1000을 신고했다. 국내 재산과 미국의 재산이 반반가량인데 미국에는 동생이 운영 중인 기업체에 투자 지분이 있다고 . 국내 재산은 아파트와 오피스텔 1채씩에, 나머지는 현금?주식 등 금융재산이라고 밝히고 있다.  그는 자신의 자전적 에세이 집인 ‘나는 주식회사 경상남도 CEO’에서 이렇게 말한 바 있다.

‘봄을 찾아 짚신이 다 닳도록 하종일 온 산을 해매였으나, 찾지 못하고 집에 돌아왔더니 뜰 앞 매화나무 가지에 봄이 걸려 있더라.  인간사가 그렇다.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것에 대하여 그 소중함을 모르고 남이 가진 것을 더 크게 본다.’ 웬지 요즘의 그의 행보며 속에 품고 있을 생각과 관련 많은 것을 시사하고 있다 여겨지는 것은 왜일까?(안동일) 12.1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