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동포들의 고향논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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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동포들의 고향논쟁
  • 서울특파원
  • 승인 2004.05.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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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 1세대와는 달리 2, 3세대로 내려갈수록 정체성과 뿌리의식이 거주국 중심으로 바뀌어 가는 것은 자연스런 현상이다. 이민의 역사가 길게는 150년 가량 되고, 역사적인 곡절로 수십 년 간 한국과 단절이 있었던 중국동포사회 역시 마찬가지다.

언젠가 연변대학의 김관웅교수는 <혼보내기>와 <낙엽귀근(落葉歸根)>이란 말로 중국동포들의 뿌리의식 변화를 설명한 적이 있다. 불굴의 혁명투사였던 고 김학철옹도 임종시에는 자신의 혼백을 담은 종이상자를 두만강 물에 띄워 고향 원산 앞바다로 보내달라고 유언했듯이, 이민 1세대들은 중국 땅에 살면서도 마음은 늘 한반도를 향해 수구초심(首邱初心)이었다는 것이다. 반면에 연변에서 태어나 성장한 이민 2세대인 자신은, 낙엽이 지면 뿌리를 덮는 부식토가 되듯, 사는 동안 지키다가 죽어 묻힐 고향이 연변이라고 고백한다. 원래는 이처럼 삶의 공간이동과 함께 정신적인 귀착점도 바뀌어 가는 법이다.

그런데 최근 중국동포사회 일각에서는 이런 자연적인 추세에 반하는 약간 변형된 고향논쟁이 전개되고 있다. 중국공민인 동포들의 미래는 중국 땅에 있을 수밖에 없음을 강조하는 주류층에 맞서, 한민족과의 보다 긴밀한 유대 속에서 활로를 모색해야 한다고 믿는 비주류층이 새로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대체로 중국사회에서 어느 정도의 기득권을 지닌 상류층은 전자의 입장을, 동포 노무자들과 유학생과 같은 비교적 젊은 세대들은 후자의 입장을 취하는 편이다. 물론 이것이 사태의 전부는 아니다. 여기에는 ‘코리안드림’의 심각한 부작용을 치유하고 무너져 가는 동포사회를 현지에서 재건하려는 대안적인 노력과, 임시방편으로 한국체류의 연장을 도모하는 일부 동포들의 실리가 충돌하는 면도 있다.

‘삼관교육’이니 ‘동북공정’이니 하는 중국정부의 일관된 조선족정책을 감안하면, 이런 변화는 분명 놀랍고 의미가 있다. 동포들이 한반도를 ‘조국’이라 부를 수 없게 하는 원심력의 작용에도 불구하고, 강한 민족적인 구심력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편에서 심각한 분열의 양상도 나타나고 있어 저어기 걱정된다. 주류 동포사회의 한 인사는 작년에 있었던 동포들의 투쟁과 농성을 ‘한치보기들의 난동’이라고 매정하게 몰아세운 반면, 동포운동에 참여하는 동포들은 주류층이 반민족적이고, 자기들의 보신에만 급급할 뿐이라고 거칠게 비난한다. 어느 면에서는 고향의 존재가 동포들 간의 갈등을 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갈등 자체보다는 갈등을 치유하고 합의를 이끌어낼 만한 장치와 구심점이 동포사회에는 아직 취약하다는 사실이 정작 문제다. 이런 가운데 설상가상으로 최근에는 동포운동의 노선 경쟁에 의욕적인 한국 내 일부 단체가 동포사회의 갈등에 개입하여 혼란과 갈등을 더욱 증폭시키고 있다.

동포운동단체든 정부든 한국사회는 궁극적으로 동포사회의 문제를 대신 해결해줄 수 없다. 지금은 감놔라 배놔라 하는 성급한 충고와 간섭 대신에, 동포사회의 입장을 고루 대변하는 새로운 주체를 세워 현실성있는 자구 노력을 펼칠 수 있도록 도울 수 있는 길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고민하는 것이 마음 깊은 고향사람의 올바른 자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