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적 합의, 초당적 접근 보장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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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합의, 초당적 접근 보장해야”
  • 허겸 기자
  • 승인 2015.05.12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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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연간 1조원 주무르던 LA교육평의회 이사에서 인권운동가로 변신한 재미동포 컨설턴트 티나 박

▲ 미주 한인 정치사에 한 획을 그은 티나 박 前 LACCD 교육이사가 본지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사진=허겸 기자)

  “한국 정치는 보혁 구도에서 벗어나 정치적 화합과 통합을 달성하려는 노력이 꼭 필요합니다.”

  미주 한인 정치사에 한 획을 그은 재미동포 컨설턴트 티나 박(39.한국명 박다희)은 본지와 가진 내방 인터뷰에서 “몹시 고되고 지난한 과정일지라도 사회적 합의에 도달하려는 초당적 노력이 필요하다”며 이같이 강조했다.

  미국 최대 규모의 교육행정구인 LA커뮤니티칼리지교육평의회(LACCD)의 교육이사를 지낸 그녀는 이번 방한 때 눈 덮인 서울 거리를 처음으로 봤다고 했다. 겨울에 한국을 찾은 것이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티나 박은 자서전 출판 기념식을 겸한 전국투어를 하던 지난 3월 광화문에 있는 본지 편집국을 찾았다. 그러곤 누구에게도 꺼내지 않았던 그녀만의 에피소드와 정치적 신념을 풀어냈다.

  인터뷰가 시작되자 티나 박은 한국 정치에 관한 날카로운 식견을 드러냈다. 그녀는 또 이념적 차이에서 비롯된, 국론 분열을 조장하는 정치적 처신과 해묵은 입씨름에 대해서도 일갈했다.

  “한국 정치에서 어떤 합의가 도출되는 것을 좀처럼 본 일이 없어요. 정적이 하는 말 한마디 한마디마다 딴지를 걸곤 하거든요. (한국 정치는)중차대한 개선과 구조개혁의 실행, 강력한 초당적 리더십이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미국에서의 저의 경험으로 보면, 양당이 주요 이슈에 대해 대화를 통해 폭넓은 사회적 합의에 도달했을 때 목표를 달성하거나 초기 성과를 뛰어넘는 기대 이상의 효과를 얻었기 때문이죠.”

  “한국이 새롭게 도약하기 위해서는 초당적 정책을 보장하려는 할 수 있는 모든 노력들이 수반돼야 합니다. 그래서 단 한 명도 사회 성장의 혜택으로부터 배제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티나 박은 지난 2009년 역대 최연소 LA커뮤니티칼리지교육평의회 이사로 당선됐다. 미주 한인 이민 역사상 교육이사직에 선출된 최초의 한국계 정치인으로서 기록되는 순간이었다.

  그녀가 LA 카운티 전역에 걸쳐 소수민족 커뮤니티의 광범위한 지지를 등에 업은 현직 이사를 치열한 경선 끝에 큰 격차로 물리치고 교육이사로 선출된 것은 6년 전, 그녀 나이 33세 때의 일이었다.

  공화당 후보로 나선 티나 박이 승리를 거머쥔 것은 LA 교육구에서는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LA 정치는 민주당이 쥐락펴락 하는 부동의 표밭이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양쪽 당의 전폭적인 지지를 얻어 당선의 기쁨을 누렸다.

  공화당의 지지는 자명했다. 공화당은 보수적이고 낡은 이미지를 깨고 민주당 계열 현직 이사의 연임을 저지하기 위해 티나 박을 교육이사 후보로 내천했다.

  그와 동시에 공화당 소속의 정치 신예였던 그녀는 민주당 지지자들로부터도 충분한 표를 확보했다.

  사실 티나 박은 공화당이 아닌 민주당에서 정치 인생을 시작했다. 대학생 자원봉사자로서 공화당의 루디 줄리아니 뉴욕 시장 선거 캠프를 도왔던 일을 제외하면, 2008년 민주당 대선 경선후보인 힐러리 클린턴 선거캠프에서 본격 정치를 경험했다.

  티나 박은 교육평의회 선거에서 예선 때부터 줄곧 후보들 중에서 가장 나이가 어렸다. 그래서 일각에선 그녀의 나이를 걱정하는 이들도 있었다. 젊다는 것은 정치, 행정 경험이 부족함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이에 더해 그녀는 유권자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던 동양인 여성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선거에 앞서 매우 세부적인 전략을 수립했다. 교육평의회의 재정 투명성을 높이겠다는 공약을 전격 발표했다. 당시만해도 교육구는 불투명한 예산 운용이 뜨거운 감자였다.

  티나 박의 전략은 통했다. 그녀는 소수민족 커뮤니티의 젊은 여성임을 강조하며 자신의 약점을 강점으로 바꾸는 수완을 발휘했다.

  그녀의 이 같은 전략은 아프리카계 미국인인 현직 이사를 상대로 사실상 압승을 거두는데 주효했다. 티나 박은 결선에서 16만8367표를 얻어 53.87%의 과반을 확보하며 당선됐다. 2위와의 격차가 무료 2만4175표나 벌어질 지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미국에서 가장 큰 교육구이자 LA카운티에 있는 9개의 칼리지들을 관할하는 최초의 한국계 교육이사가 된 사실이 정말 기뻤습니다. 우리 교육구가 지속적으로 발전할 수 있도록 긍정적으로 이끌기를 원했었죠.”

  티나 박이 이사로 선출된 교육구는 LA전역의 36개 도시에 약 13만 명의 학생들이 공부하는 곳이다. 교육평의회의 연간 예산만 11억 달러(한화 약 1조 원)에 달하는 미국에서 단일 규모로는 가장 큰 교육구였다.

  그녀의 정치적 성공은 한국계 미국인으로서도 놀라운 일이었다. 한인들이 집중 거주하는 LA는 한인사회로서는 가장 큰 규모였지만 정치 측면에서 크게 활성화된 지역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유권자들의 선거 무관심에 대한 우려가 컸다. 하지만 실제 선거에서는 티나 박에게 한 표를 행사하기 위해 처음으로 선거에 참여했던 한인 동포들이 매우 많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많은 동포들이 선거 캠페인에 열심히 참여했고 그들이 열정적으로 투표에 임해줬어요. 그분들이 없었다면 저의 당선은 있을 수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녀는 이번 인터뷰에서 다시 한 번 자신을 지지하고 신뢰해준 LA 한인 유권자들에게 감사함을 전했다.

  민주당 표밭에서 공화당 소속으로 당선된 한국 태생의 미국 시민권자 티나 박은 4년이라는 재임기간에 기대치를 뛰어넘는 많은 일들을 해냈다.

  지난 2010년에는 광복절인 8월15일을 ‘한국 독립의 날(Korean Independence day)’로 제정하는 법안을 대표발의해 통과시켰다. 미국에서 광복절이 법정기념일이 된 것은 한인 역사상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티나 박’이라는 이름은 한국에서 가장 많은 방문자를 기록하는 포탈사이트 네이버의 인기검색어로 오르기도 했다. SBS가 그녀의 삶을 조명한 다큐멘터리 ‘티나 박과의 이틀’을 방영한 것이 계기가 됐다.

  그녀는 자수성가한 재미 여성동포이자 ‘아메리칸 드림’의 전형처럼 인식됐다.

  그러나 티나 박은 지난 2013년 임기가 끝날 무렵 그녀만의 길을 걷기 위해 돌연 재선 불출마를 선언했다. 사람들은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했다.

  티나 박은 “인권을 개선하는 일에 헌신하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녀는 이라크와 시리아에서 박해받는 아시리아 기독교도들을 보호하는 일에 뛰어들었다. 그들은 종교적 신념 때문에 이슬람 원리주의 무장단체 이슬람국가(IS)로부터 거센 탄압을 받고 있었다.

  티나 박은 유엔이 아시리아 기독교도 보호에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한다고 촉구했고 미국 내 아시리아 커뮤니티의 대규모 캠페인을 도와 4시간 만에 60만 달러의 기금을 모금하기도 했다.

  그녀는 유년시절부터 개신교 봉사활동 프로그램에서 자원봉사하면서 인권과 여성, 소수민족에 대한 관심을 키워왔다.

  독실한 기독교 가풍에서 자란 티나 박의 선친은 목사이자 교육자였다. 그래서 그녀는 비영리 자선단체 또는 방과 후 학교, 무료 급식소 등 많은 단체에서 자원봉사를 하면서 성장했다.

  재미동포 1.5세인 티나 박은 6살 때 가족을 따라 뉴욕으로 이민을 갔다. LA로 다시 이사하기 전에 그녀는 뉴욕의 호프스트라대학교에서 회계학을 전공했다.

  티나 박은 졸업과 동시에 뉴욕증권거래소(NYSE)에 입사하며 감사 부문에서 사회에 첫 발을 내디뎠다. 당시 뉴욕증권거래소는 전국에서 단 12명만 선발했다. 그녀는 같은 학교 지원자 250명 중에서 유일하게 합격했다.

  다양하고 중요한 과제들을 수행하며 능력과 재능을 인정받은 티나 박은 감사부로 자리를 옮기게 됐다. 거래소 직원들은 감사부를 중앙정보국(CIA)으로 비유했다. 거래소 직원들의 부정비리를 적발, 조사할 뿐만 아니라 그 위치조차 어디에 있는지 공개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인생의 터닝포인트를 만난 것도 이곳에서 일할 때였다. 감사부의 비공개 회의가 월드트레이드센터(WTC) 22층에서 열리기로 했던 것이다. 그날은 바로 2001년 9월11일이었다.

  “부서 동료들과 월드트레이드센터 빌딩에서 비밀 회의를 열기로 했던 날이었어요. 빌딩과 연결된 지하철역에서 내렸는데 이미 첫 번째 비행기가 충돌한 다음이었죠.”

  티나 박은 건물에서 벗어나 황급히 달려가면서 두 번째 비행기가 충돌하는 장면을 목격한다. 그녀는 벽돌과 종잇조각 같은 것들이 바닥으로 쏟아지자 겁에 질린 채 충격에 휩싸였다.
  

  “꼼짝없이 갇혔다고 느꼈을 때 택시 한 대가 멈추더니 올라타라고 했어요. 차에 앉아 뒤를 돌아봤을 때 첫 번째 건물이 무너지는 것을 두 눈으로 보게 됐습니다. 도저히 현실이 아닐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도대체 무슨 일이 저에게 벌어지는 지 믿을 수가 없었죠.”

  그녀는 9.11 테러 당시 건물 내부에 있다 빠져나온 다른 수천여 명처럼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졌다. 이런 경험은 삶에 대한 그녀의 자세에 변화를 가져왔다.

  티나 박은 더 가치 있는 활동들을 찾는데 모든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회고록을 출간한 이유도 그 중 하나이다.

  그녀는 자신의 인생 역정을 담은 책 ‘바로 지금부터야, Just Live!’(카모마일북스)의 2쇄 출판을 준비 중이다. 첫 번째 에디션은 시중에 나온지 몇 달 만에 전량 판매됐다.

  “책을 더 보완할 거예요. 제가 겪은 경험에서 우러나온 유용한 교훈들을 공유하고 싶기 때문이죠.”

  허겸 기자  khur@dongponews.net
                kyoumhur@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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