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은 삶, 가난한 캄보디아 국민들 위해 봉사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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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은 삶, 가난한 캄보디아 국민들 위해 봉사하고 싶다"
  • 박정연 재외기자
  • 승인 2014.11.11 10:4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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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캄보디아 정부 훈장 받은 박광복 전 한인회장

▲박광복 캄보디아 전 한인회장

박광복 캄보디아 전 한인회장은 칠순을 바라보는 나이지만, 요즘도 ‘노익장’이란 단어를 연상시킬 만큼 활기찬 삶을 살아가고 있다.

최근, 기자는 그의 초대를 받아 점심 무렵 부인 조혜숙 여사가 운영하는 식당을 찾았다.

얼큰하고 구수한 수제비 한 그릇을 내놓자마자, 박 회장은 다짜고짜 “왜 자주 들리지 않냐”라며 기자에게 마음에도 없는 핀잔부터 줬다. 그러면서도 이날 한사코 밥값까지 받지 않으며, 집에 가서 먹으라고 김치까지 한 보따리 싸줬다.

그에게는 장성한 아들을 걱정하는 늙은 아버지 같은 푸근함과 고향집 같은 정겨움이 있다. 친한 사람들에게만 국한된 인사치레가 아니다. 빈손으로 들어온 낯선 손님마저 문전박대는커녕, 따스한 국 한 그릇 더 퍼주는 그런 마음씨 좋은 동네 이웃 같은 분이기도 하다.

고향이 강원도 춘천인 그는 강원대 법대를 나와 대우중공업에서 평생을 일했다.

캄보디아에 정착한지 어언 십여 년. 은퇴 후 프놈펜 시내에 번듯한 중급 호텔까지 운영하는 사장님이 됐지만, 그 시간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믿었던 사람에게 사기를 당한 것이다. 일평생 살아오면서 한 번도 겪지 못한, 말로는 표현 못 할 속상한 일도 숱하게 겪었다.

그렇지만,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그는 이 또한 하나님 뜻이라 믿었다. 지금은 모든 것을 다 잊고 용서하고, 캄보디아를 제2의 고향 삼아 살아가고 있다. 남편을 묵묵히 내조하며 어려운 식당일을 손수 다 하는 아내 조혜숙 여사는 그에게는 평생 둘도 없는 친구같은 존재다.

2년 전 한인회장으로 일하던 시절, 그는 아무 사심없이 열심히 한다는 주변의 평가를 받았다. 한인회장 직함을 이용해 사업하거나, 이권을 챙긴다는 소리를 단 한 번도 들은 적 없었다.

역대 한인회장 중 그만큼 열정적으로 한인사회 발전만을 위해 일한 이도 드물다. 한인회장에 대해 자질을 운운하며 평소 비판적인 시각을 가졌던 일부 교민들마저도 이 사실만큼은 다들 인정하는 분위기다.

교민 상주 노릇까지 하며 보낸 2년간의 한인회장 재임 시절

2년이란 짧은 재임 기간에 그는 참으로 많은 일을 했다. 수재민을 돕기 위한 사진전도 열고, 디지털 도서관을 만들어 교민 자녀들을 위한 작은 문화공간을 만들어 주려고 애썼다. 교민들의 무료건강검진도 그의 아이디어로부터 시작됐다. 교민 원로들을 위한 조촐한 잔치도 벌였고, 진출기업들에 작게나마 도움을 주고자 세법과 투자, 노동법 자료집도 복사해서 나눠주고, 앙코르와트 등 각종 DVD 영상물도 여러 개 제작해서 무료 배포해 교민들이 현지문화와 역사를 익히는 데도 도움을 주려 애썼다.

그는 교민사회를 방문할 때마다 늘 박카스 한 상자라도 들고 찾아가 직접 민원을 수리하곤 했다. 이른 새벽 조기 축구회도 찾아가고, 한인회를 사랑방처럼 꾸며 교민들과 소통의 공간으로 활용하려 애썼다. 현지고아원도 한 달에 한 번씩 거르지 않고 찾아갔고, 늦은 밤 교민 환자가 생겨도 직접 나섰다. 체육대회 전날 교민 한 명이라도 더 참석시키려고 목이 쉬도록 직접 전화도 수백 통 넘게 걸었다.

불의의 사고로 사망한 교민과 여행객 장례까지 숱하게 치르며 상주 노릇도 마다치 않았다. 그간 치른 장례만도 30건이 넘는다. 억울하게 수감된 한인 여성들을 위해 한 번도 거르지 않고 재판에 참석했고, 쌈짓돈을 모아 수시로 교도소 영치금까지 넣어주었다. 그 덕에 오지랖이 넓다는 빈정거림까지 들었지만, 모든 것을 감수해가면서 그저 묵묵히 일했다.

또한, 한인회비까지 직접 걷으러 다니기도 했다. 한인회장 체면에 회비를 걷으러 다닌다고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는 사람들도 일부 있었지만, 그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대신 두 달 마다 걷어 들인 회비와 지출내역을 교민지를 통해 낱낱이 공개했다.

“내가 그 돈 마음대로 쓰는 것도 아니고, 오로지 한인사회를 위해 한 푼이라도 더 모으려고 하는 게, 그게 무슨 잘못이냐?”고 그는 늘 당당하게 말했다.

버르장머리 없는 젊은 대기업 법인장 혼내기도

연세 탓에 그의 평소 말투는 좀 어눌한 편이다. 늘 웃는 낯으로 상대를 대하다 보니, 한인사회를 대표하는 수장임에도 불구하고, 식당주인이라고 깔보는 경우도 없지 않았다. 그러다가 모 대기업 법인장으로 나온 이가 함부로 무시하려 들었다가 박 회장에게 보기 좋게 된통 당한 적이 있었다. 이 사건은 소문이 삽시간에 퍼져 지금도 교민사회에서 알만한 사람은 다 안다. 비록 칠순에 가까운 나이지만, 태권도 5단 유단자답게 기백과 강단만큼은 여전히 젊은이 못지않다.

한인회장 자리를 물러난 후에도 사회봉사에 대한 그의 열정은 여전히 식지 않았다. 2012년부터 강원새마을회 지회장으로 활동을 본격 시작했다. 사재를 털어 사무실도 따로 만들었다. 강원새마을회와 협력해서 2년간 공들인 덕에 ‘카우뱅크 프로젝트’로 불리는 현지농민소득증대를 위한 송아지 공급사업도 최근 성공적으로 마무리 지었다.

그렇지만, 그가 시작한 새마을사업이 처음부터 순조롭게 풀렸던 것은 아니었다. 강원새마을회로부터 정식으로 지회장 임명을 받았음에도, 새마을중앙회가 뒤늦게 딴지를 건 것이다.

“현지인만 지회장이 될 수 있다는 쓸데없는 원칙만을 고수하는 바람에 제대로 된 지원을 단 한 번도 받은 적이 없다”고 그는 말했다. 이 부분을 설명하는 순간만큼은 미간을 잠시나마 찡그렸다. 그는 뜨던 국 숟가락을 놓고 다시 말을 꺼냈다.

“새마을 정신을 이 땅에 심어주는 게 중요하지, 새마을운동을 전 세계에 보급한다는 사람들이 지회장은 반드시 현지인이야 한다는 그런 고리타분한 원칙 따위에만 얽매여 있다는 사실이 지금도 답답하다. 이건 모두가 다 잘 살아보자는 새마을 정신의 숭고한 가치마저 왜곡시키는 것”이라며 따끔하게 질타했다.

지금도 박 회장은 남을 돕는 일이라면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봉사정신이 강하다. 그 흔한 명예욕 때문이 아니다. 그의 핏속엔 남을 돕는 유전자가 원래부터 있는 듯하다. 그 덕에 현지 지역사회 발전과 새마을사업 공로를 인정받아 캄보디아 정부로부터 최근 훈장까지 받았다. 새마을중앙회 측도 이 사실을 이미 알고 있다.

하지만 그동안 공로에 대해 중앙회로부터 고맙다는 말 한마디 들은 적 없다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런 건 별로 중요치 않고 이제는 서운한 감정도 없다. 그저 내 일만 하면 된다”고 말했다.

인터뷰 말미에 앞으로의 계획을 물었다. 그의 대답은 단순명료했다.

“내 나이 곧 칠순이다. 남은 여생, 가난한 캄보디아인들을 위해 봉사하며 살고 싶다. 지금 더 돈을 더 벌 욕심 부려서 뭐하겠는가? 이렇게 사는 게 남은 인생을 보람되게 사는 것 아니냐”고 오히려 기자에게 되물었다.

슬그머니 부끄러운 마음이 드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