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브라질한인50년사는 우리 모두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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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브라질한인50년사는 우리 모두의 역사"
  • 이우태 기자
  • 승인 2014.07.02 1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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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기 변호사, "브라질한인사, 역사의 뒤안길로 그냥 흘려보내선 안돼"

▲김홍기 박사
일제에서 해방된 후 꼭 19년이 된 1964년 8월 15일, 먼 여행길을 앞둔 듯 저마다 두툼한 가방과 보따리를 이고 진 500여 명의 사람들이 부산항 제3부두로 모여들었다.

이들은 박정희 군사정권이 궁핍한 국가재정을 충당하기 위해 1963년도에 ‘한민족 해외 대웅비 100년 대계’라는 거창한 이름으로 추진한 파독광부‧간호사, 월남파병, 가족집단 정책이민 등 3대 해외정책 일환으로 지구 반대편 나라 브라질로 떠날 사람들이었다.

이들을 태우기 위해 부두에는 7000천톤급 네덜란드국적 화물선 ‘찌짜랭카’호가 정박해 있었다. 이 배를 타고 갈 사람들이 바로 ‘제2차 브라질 집단영농정책이민단’에 지원한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젖먹이 어린아이부터 80세 고령에 이르기까지 남녀노소 구분이 없었다.

▲1964년 제2차 브라질 이민단 500명을 리우데자네이로항까지 실어 날랐던 화란(네덜란드) 국적의 7천톤급 화물선 '찌짜랭카'호
정부는 미지의 세계로 떠나는 이들을 위한다며 대대적인 환송식을 벌였다. 군악대까지 동원해 팡파르를 울려댔고 부산시장은 격려와 희망을 담은 송별사로 불안에 떠는 이들을 달래며 인솔을 맡았던 김홍기 변호사에게는 ‘우리민족 해외 대웅비 100년대계의 선발대장’이라는 별칭까지 붙여주며 추켜세웠다.

부산항을 떠난 찌짜랭카호는 지구 한 바퀴를 돌아 정확히 두 달 만인 10월 25일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항에 닺을 내린다.

당시 30세의 나이로 세상 무서울 게 없었던 김홍기 변호사는 이 정책영농이민단 단장 역할을 맡아 이들과 함께 부산항을 떠난다. 이로부터 50년이 지난 올해가 브라질 한인이민 50주년이 된다.

1964년 당시 제2차 브라질 정책집단영농이민단을 이끌고 브라질 땅에 첫발을 디딘 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브라질 이민사의 산 증인인 김홍기 변호사가 한인이민 50주년 기념식 준비를 위해 고국에 왔다.

▲김홍기박사는 슬하에 2남2녀를 두었다. 이 가운데 브라질 이민전 한국에서 낳은 두 딸은 현재 상파울루시에서 치과의사와 대학교수로 재직 중이며 브라질에서 낳은 첫 아들은 상파울루에서 의류사업을, 막내아들은 미국 LA에서 변호사로 활동하고 있다.(사진 왼쪽 아이를 안고 있는 남자가 김홍기 변호사. 이 사진은 이민선 찌짜랭카호 선상에서 찍은 기념사진)
김홍기 변호사는 이처럼 애환과 굴곡으로 점철된 브라질이민 50년 역사를 아무런 의미 없이 지나치기에는 너무 아쉽고 허전하다면서 브라질 이민사에 얽힌 온갖 사연과 함께 50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자신의 계획과 포부를 거침없이 밝혔다.
 
그는 올해 80세라는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장대한 기골만큼이나 기억력도 건강도 꼿꼿한 모습이었다.
 
△1964년 당시의 브라질 제2차 정책집단영농이민단은 말 그대로 농사지을 사람들이 주축이었을텐데 김홍기 변호사님은 어떤 계기로 이 이민단에 합류하게 되셨나요?
 ▲당시 상황을 얘기하자면 책으로 써도 두 세권은 될 겁니다. 브라질 이민사를 이해하려면 앞서 대한민국의 이민역사를 알아야 합니다. 대한민국 근대사에서 우리 민족의 첫 번째 집단이민은 1902년 대한제국 고종황제 칙령에 따른 하와이‘농노동 청년이민(102명)이었습니다.

그로부터 60여 년이 지난 1963년에 시작된 파독광부, 간호사와 브라질이민이 현대사적 의미의 두 번째 집단이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당시 이민정책을 이제와 돌이켜 보건데 결과적으로는 군사혁명 초기 박정희정권이 추진한 이 정책은 ‘혁명적 발상의 위업’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왜냐하면, 전근대적 의미의 첫 이민 사례인 하와이 이민은 당시 시간당 68전을 받는 사탕수수밭‘농노’라는 고용계약형 이민으로 현지 농장주의 경비부담으로 이뤄진 ‘인력수출’이었습니다.

하지만 당시의 ‘가족집단정책이민’은 국민을 해외로 내보내는 ‘송민국가’인 대한민국이 주관한 이민이었기 때문에 모든 비용을 이민 당사자인 우리가 감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당시는 해방과 전쟁 후라 국민들은 내남없이‘보릿고개’로 신음하고 있었고 국가재정 역시 말할 것도 없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연 2.9%에 달하는 인구증가율로 사람들을 해외로 내보내 입을 줄이고 약간의 자본이 있던 사람들한테는 해외에 나가 자력갱생토록 권장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었죠. 당시 경부 고속도로 건설과, POSCO(당시 포항제철)설립 등으로 중화학공업과 인프라구축을 국가재건 사업으로 추진한 박정희대통령의 ‘국가개발 5개년 정책’과 해외 이민은 3대 핵심 사업이었습니다.
 
△브라질 이민은 쉽게 말하면 농업이민, 즉 농사지을 사람들을 보내야 했는데 당시 대다수가 이북에서 내려 온 실향민이거나 남대문, 동대문, 평화시장 등지에서 봉제업에 종사하던 사람들이 대부분이라고 들었습니다. 이들은 그나마 약간의 자본력이 있는 영세사업자들이었는데 여기에 무슨 사연이 있었나요?
 
▲NGO활동당시 연설모습
앞서 말씀드렸지만 해외 이민을 보내는 우리정부는 ‘송민국가’였고 브라질은 ‘수민국가’로 이민정책은 ‘지주 농업이민’이었습니다. 따라서 농지를 구입하고 농업에 직접 종사해야만 했죠. 여기에 영주권비자 발급과 연계해 이를 조건으로 내세웠습니다. 그러나 당시 소작농이거나 조그만 농토에 농사를 지어 겨우 끼니나 떼울 정도의 사람들이 대부분이라 광활한 브라질 땅을 사서 농사를 지을만한 능력이 전혀 없었죠. 또 국가재정도 허락하지 않아 자비부담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이남으로 내려와 부산국제시장에서 터를 잡았던 속칭 ‘38따라지’ 출신들과 그나마 약간의 자본력이 있는 평화시장, 동대문시장 상인들이 대거 지원하게 됩니다. 이들 대부분은 이북출신으로 뿌리를 내리기 전이라 남한에 별 애착이 없었습니다. 또 당시에는 국가재정이 어려워 무차별적으로 세금을 걷었습니다. 소위 ‘인정과세’라는 악명 높은 세법인데요. 당시 세무당국은 이들 장사꾼들을 ‘상습탈세집단’으로 여겨 무조건 주먹구구식의 세금을 강제로 걷었습니다. 이 두 가지 조건이 아마도 브라질 이민을 어렵지 않게 결정하는 요인이 되지 않았나 합니다.
▲본지 이형모대표와 함께(사진 왼쪽이 김홍기변호사)
 
△당시만 해도 드물게 대학까지 졸업한 김홍기 박사님은 이 사람들의 이민동기와 별 관계가 없어 보이는데요?
 
나는 이북(평양)출신으로 유복하게 살다 남한으로 내려온 사람입니다. 당시 북한은 국민소득이 100달러에 육박했고 남한은 절반가량인 65-68달러 정도였습니다. 여기에다 전쟁으로 남북이 분단돼 이 좁은 땅덩어리 안에서 궁핍한 삶에 부대끼면서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니 정말 답답했습니다. 혈기왕성한 젊은 때였으니까요. 때마침 브라질 이민 얘기를 듣고 한반도 보다 거의 100배에 가까운 광활하고 풍요로운 자원대국 브라질에 가서 젊을 꿈을 펼쳐보자 하는 나름의 포부를 갖고 이들과 함께 배를 타게 된거죠. 내가 브라질 이민을 실행에 옮긴 결정적 계기라고 봅니다. 50년 전인 당시에는 대한민국이 ‘한강의 기적’을 일으키고 마침내 오늘날‘세계 10대 경제대국’될 줄은 상상도 못했던 겁니다.
 
△브라질에 당도해 시작한 이민생활에 대해서 말씀 해주시죠.
 
이제 다 지난 얘기지만 아직도 잘못 알려진 게 있어서 브라질 이민 초기의 비사를 말씀드려야 될 것 같습니다. 당시 브라질 대사는 2대 대사인 박동진 씨였습니다. 초대는 박정희정권 당시 오랜동안 국회의장을 역임한 정일권 대사가 북미(미국)과 남미(브라질)미주지역 통합 대사였죠. 박동진 대사는‘당시 브라질 이민자들이 계획적으로 농업을 피해 상파울루 등 도시로 도피했다’고 본국에 허위보고를 합니다. 이는 사실과 전혀 다른 얘기입니다. 저와의 악연도 이때부터 시작됩니다.
 
1963년 제1차 브라질이민단은 ‘에스삐리또 싼또 주’의 수도인‘빅또리아 시’근처 아열대 지방에 구입한 땅을 찾아 몇 개월간이지만 실제 농사를 지었습니다. 하지만 땅이 척박해 농사가 어려운데다 밧줄을 늘어놓은 것처럼 큰 뱀과 새끼 잠자리만한 모기들이 밤낮없이 괴롭혀 도저히 농사를 지을 수가 없었습니다. 여기에다 ‘네바다비아’라는 현지 협잡꾼 지주에게 속아 고가로 사들인 땅을 1%값도 못 건진 채 그냥 버리다시피 하고 무작정 도시로 나오게 된 것입니다.
 
내가 이민을 떠났던 1964년도 2차 이민도 경우도 1차 이민 때와 비슷했습니다. 약 500명의 2차 이민단이 구입했던 땅이 몽땅 국제사기를 당했던 것입니다. 이 땅은 지금도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농사지을 땅이 없자 우리는 일본인들 100만 명이 상파울루에 살고 있다는 얘기를 귀동냥으로 듣고 동양인들이 사는 곳으로 가자는 암묵적 동의아래 무작정 그곳으로 흘러 들어가게 됩니다. 농사를 피해 도시로 도피했다는 박동진 대사의 당시 보고는 이렇게 터무니없는 거짓입니다.

더욱 기가 막히는 것은 당시 요코하마 주재 브라질 영사를 대동한 지주대표가 그럴 듯하게 구획된 지도와 함께 50여장의 땅문서를 들고 이민업무 주무부처였던 보건사회부장관실에 나타나 나와  만나게 됩니다. 당시 정희섭 장관이 입회했기 때문에 일말의 의심도 없이 내가 대표/단장 자격으로 당시로서는 거금인 45,000달러를 주고 이 땅을 계약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고생을 각오하고 처음부터 농사를 지으려고 했던 것은 딱히 다른 일들이 우리를 위해 대기하고 있었던 것도 아닌데다 농업정책이민은 한국, 브라질 양국의 약속과 요구였습니다.

특히 여러 사정으로 떨어져 있던 가족들과 후진들을 위해 선발대의 책임과 의무를 다해야 했고, 나는 이민을 떠날 때 인솔단장으로 정부당국에 각서까지 쓰고 왔기 때문에 땅을 찾았다면 단원 모두를 인솔해 농사를 지었을 것입니다.

단장이었던 나는 실제 농사를 지을 생각으로 한국에서 군용천막과 군용부츠 열 켤레, 조선낫 50개(결국 브라질 농법에서는 쓸모가 없게 됐지만)까지 준비했습니다.
 
세상일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듯이 돌이켜 보건데 이런 우여곡절이 오히려 전화위복이 되어 비교적 짧은 시간에 브라질에서 성공한 이민사회의 토대가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에 지금 이 시점에서는 사기를 쳤던 그 지주에게 감사를 드려야 되는 역설이 됐습니다. 제가 믿는 하나님에게 감사드릴 따름입니다.
 
▲사진오른쪽(반기문 유엔사무총장)
△변호사님 얘기를 듣다보니 브라질 50년 이민사의 산 증인이라는 말씀이 실감이 됩니다. 현재 브라질에서 교민들의 위상과 실제 살아가는 모습은 어떤지요
 
우연인지 주님의 축복인지는 모르겠으나 50년 전 박정희대통령의 선경지명인‘브라질 한민족사회 구축 100년 대계의 기반’이 마치 ‘잔디밭을 떠서 옮긴 것’처럼 이곳 브라질에서 그대로 실현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50년 전 가내공업 수준의 재봉틀 한 대로 시작한 동대문, 남대문, 평화시장의 의류산업을 동포 1세대들이 지구 반대편에 있는 이곳 브라질 상파울루에 뿌리를 내리고 양적성장의 기반을 닦아놨습니다.

이 튼튼한 반석위에서 반세기가 지난 오늘날에는 수백 여 명의 일류대 출신 동포1.5-2세들에 의해 전산화, 패션화, 고급화, 브랜드화 되는 등 패션의 질적 성장으로 이제 거대 브라질 2억 시장을 장악하게 될 날이 멀지 않았다고 자부합니다.

추측컨대 앞으로 5년 이내에 브라질 한인들의 패션산업은 ‘샤넬’이나‘베르사체’ 등과 같은 세계적 패션업계를 능가하게 될 것입니다. 남미 전역에 산재해 있는 동포사회의 의류산업은 브라질이 그 원조입니다. 파라과이, 볼리비아, 아르헨티나 등은 후발주자인 셈이죠.
 
▲IPU브라질 대표로 북한을 방문했던 당시 김홍기변호사(사진 왼쪽에서 두번째)
△김홍기 변호사님께서 브라질이민 50주년에 대해 남다른 의미를 두고 기념하려는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의류산업뿐이 아닙니다. 최근 20여 년 동안 브라질에서 이룩한 한국의 자동차 산업도 눈부실 지경입니다. 현대와 기아차는 연간 15만대를 만들 수 있는 현지 생산 공장이 있고 남미 전역에 판매망도 갖추고 있습니다. 이같을 기반을 쌓는데는 수백 명에 달하는 고급 전문경영인들의 노력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자랑스럽게도 이들 모두가 우리의 자녀들이라는 것입니다.
 
그간 브라질 동포사회의 경제 기여도는 한국에는 물론 브라질 국가성장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는 점에서 양국 모두 되새겨야 할 것입니다. 또한 향후 50년 동안에는 양국 간 어떤 변화와 발전이 있을지 예측하기 어려울 정도로 역동적입니다.
 
따라서 정확히 50년 전 박정희대통령이 꿈꾸었던 ‘한민족 해외 대웅비 100년 대계’의 위업이 현실이 된 만큼 브라질한인이민사는 전 세계 175개국 720만 재외동포사회 가운데 ‘최고의 한민족 경제사회’를 이뤘다는 사실에 대해 우리 모두가 자부심과 긍지를 갖고 환호할 일이며 꼭 기념해야 할 반세기이민사인 것입니다.
 
브라질이민50년 역사를 브라질동포들만의 축제로 그치게 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제가 팔을 걷어 부치고 나서는 겁니다. 누군가는 나이가 여든이나 된 노인네의 ‘노욕’아니냐는 곱지 않은 시선도 있습니다.

하지만 나는 먹고 사는데 전혀 지장이 없는 사람입니다. 국제변호사이며, 브라질 국회의원도 해봤고 자녀들도 다 성공해 잘 살고 있습니다. 이민가기 전 한국에서 낳은 두 딸은 상파울루 치과대학을 나와 모두 교수와 치과의사로 재직 중이고, 상파울루에서 낳은 큰 아들은 의류사업, 막내 아들은 미국 LA에서 변호사로 일하고 있습니다. 이만하면 자식농사는 별 흉잡을 데 없죠? 그런데
이 나이에 내가 더 이상 무슨 영예를 누리겠다고 그러겠습니까.
 
나는 1964년 8월15일을 잊을 수 없습니다. 500여 명의 이민자들을 인솔하고 부산항을 떠나던 그 순간, 그 장면을 어찌 잊을 수 있겠습니까. 말이 50년이지 그 켜켜히 쌓아온 세월동안 고난과 역경을 딛고 브라질에 정착한 동포들의 지난 50년의 역정을 그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한다는 것이 너무 아쉬워 우리 모두에게 꼭 상기시키고 싶을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