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지르포>어느 킬링필드 생존자의 악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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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지르포>어느 킬링필드 생존자의 악몽
  • 박정연 재외기자
  • 승인 2014.06.09 1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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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살수용소 수감자 70%가 전직 크메르루즈 출신이란 사실을 아시나요?

▲ 외국 관광객들에게 킬링필드와 관련된 서적과 사진엽서를 팔고 있는 춤 메이씨. 수십종에 이르는 킬링필드 관련 책들 중에는 그가 쓴 자서전도 팔리고 있다.
오늘 아침도 어김없이 85세 노인 춤 메이는 그의 직장으로 향한다. 이른 아침인 7시 반 무렵, 그가 당도한 곳은 수도 프놈펜에 있는 뚜얼 슬렝 대학살 박물관. 그의 직업은 외국 관광객들에게 킬링필드와 관련된 서적과 사진엽서를 파는 일이다. 수 십여종에 이르는 킬링필드 관련 책들 중에는 그가 쓴 자서전도 있다.

그는 박물관이 된 이 뚜얼 슬렝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20여명 남짓한 생존자들 중에 한명이다. 그가 쓴 자서전은 10달러에 팔린다. 운이 좋은 날엔 하루에 10여권 이상 팔기도 한다고 그는 귀띔한다. 점심식사는 돼지고기를 야채와 볶은 반찬과 쌀밥 또는 쌀국수로 간단히 때운다. 늘 비슷한 메뉴다. 대신 그의 유일한 낙은 점심식사 후 그물침대에 누워 잠깐 낮잠을 즐기는 것이다. 그 시간만큼은 절대로 누구에게도 양보하지 않는다.
 
 그러나, 눈을 감으면 아련한 꿈속에서 잊고 싶은 오래전 기억이 다시 스물 스물 되살아난다. 방금 일어난 듯한 생생한 장면이다. 망고나무 아래 선들바람이 불어오지만, 꿈을 꾸는 사이 어느새 그의 옷은 땀으로 뒤범벅이 된다.
 
그가 그리도 잊고 싶은 악몽의 순간은 40여년 전 그날로 거슬러 올라간다.
 
검은색 면옷에 ‘끄로마’라고 불리는 머풀러를 목에 두르고, 페타이어를 잘라 만든 슬리퍼를 신은 자신의 40대 모습이 보인다. 그리고 그의 등 뒤에는 카빈소총을 든 앳된 청년들이 걸음을 재촉한다. 그는 십여명의 동료수감자들과 함께 하루종일 논두렁 길을 따라 어디론가 끌려가는 중이다. 저녁 무렵이 되어서야 그들은 이름 모를 작은 사원에 당도했다.
▲ 뚜얼 슬렝 수용소 7인의 생존자들(맨 왼쪽 인물이 춤 메이씨)
 그는 그곳에서 또 다른 그룹의 죄수 일행들과 조우한다. 그런데 거기서 정말 기적과도 같은 일이 일어난다. 자신이 그리도 찾던 아내를 만난 것이다. 아내의 품안에는 한번도 본적이 없는 자신의 갓 태어난 아들이 안겨 있었다. 그는 사랑하는 아내와 아들을 얼싸 안았다. 그러나 마음놓고 울 수도 기뻐할 수도 없었다. 간수들의 서늘한 눈길이 그들을 계속 응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만난 지 두 번째 되던 날, 세 사람은 사원 뒷편 식당 켠에서 함께 잠을 잤다. 군인 한명이 문앞에서 감시했지만, 그에게 있어서 생애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다. 그러나, 그 행복은 오래가지 못했다. 새벽녘 누군가 곤히 잠든 그를 깨웠다. AK-47소총을 든 간수 3명이 그와 가족을 모두 밖으로 불러냈다. 아들도 아내의 품에 안겨 곤히 잠든 채 끌려 나왔다. 그들은 그의 아내를 앞장서게 하고 남편 춤 메이가 그 뒤를 따르게 했다.

달이 무척 밝은 밤이었다. 다른 수감자들도 불안한 표정으로 이미 문밖에 나와 있었다, 간수들의 지시에 그들은 그렇게 1킬로 남짓한 논둑길을 따라 걸었다. 벼가 익는 들판에 당도하자, 간수들이 나란히 섰다. 불길한 예감이 머리를 스치는 순간 철컥거리는 쇠소리가 들려왔다.
 
탕! 탕! 탕! 탕!
 
총소리 수 십여발이 연거푸 들렸다. 끌려온 사람들이 간수들의 총에 맞고 쓰려졌다. 그의 아내 역시 채 서 너 발도 도망치지 못한 채 그대로 바닥에 고꾸라졌다. 비명소리와 함께 아내의 쓰러지는 모습이 시아에 들어왔다. 아내는 가슴에 총을 맞은 채 피를 흘리며, 남편인 춤 메이를 향해 소리를 질렀다.
 
“빨리 도망가요!, 여보!”
 
다시 그녀의 외마디가 들려왔다. 아내품에 안긴 아들의 울음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또 한발의 총소리가 들려왔다. 아들의 울음소리마저 멈췄다. 그들이 다음 표적을 향해 총을 쏘기 시작했다.
▲ 뚜얼 슬렝 대학살 박물관 내외부 모습.
그는 무작정 어둠속으로 내달렸다. 흰개미집 둔덕 뒤편에 몸을 숨겼다. 순간 정적이 흘렀다. 간수들이 총알이 떨어져 재장전을 준비하는 사이, 벼가 자라는 논두렁속으로 있는 힘을 다해 기어들어갔다.

그들은 춤 메이가 여전히 흰개미 둔덕에 숨어 있을거라 생각하고 인정사정없이 총질을 해댔다. 그러나, 그는 이미 더 멀리 보이지 않는 곳에 숨어 있었다. 간수들이 사라지자, 그는 밤새 달렸다. 아내를 생각하며 죽은 아들을 생각하며, 다음날 아침 동이 틀 때까지 울며 달렸다. 결국 그렇게 그는 혼자 살아남았다. 그리고 전쟁은 곧 끝났다.
 
이것이 그가 기억하는 사랑하는 아내와 이제 태어난 지 2달된 아들과의 마지막 순간이었다. 그는 한번도 꿈속에서 이 장면을 잊은 적이 없다고 말했다.
 
 이 사건이 있기 약 1년 전, 그는 영문도 모른 채 군인들에 의해 프놈펜에 있는 수용소로 보내졌다. 과거 평범한 고등학교로 쓰였던 건물이다. 크메르루즈 정부는 이곳을 ‘국가보안조직’을 뜻하는 ‘산떼발’의 영문 앞자를 따 암호명 ‘S-21’로 불렀다. 이 감옥의 또 다른 이름은 이곳 지명을 따 ‘뚜얼 슬렝’이라고 불린다. ‘독나무가 있는 언덕“이란 뜻이다.

지금 이곳의 공식명칭은 뚜얼 슬렝 대학살 박물관(Toul Sleng Genocide Museum). 지금 춤 메이 노인이 킬링필드의 아픈 기억을 팔며, 살아가는 직장이기도 하다.
 
그는 지난 1978년 10월 28일 일반 죄수로 수감되어 이 곳에서 12일간이나 고문을 받았다. 그는 자신이 무슨 죄를 지은 지 지금도 알지 못했다. 그 역시 수천여명에 이르는 일반 수감자중에 한명일 뿐이었다. 수감자간에도 일체 대화가 금지되어 있었기에 다른 수감자들의 신분이나 과거 경력은 전혀 알지 못했다.

정치범으로 몰리거나, 전 정권 당시 일했던 공무원이나 경찰, 군인이었다는 사실만 만연히 추측하고 있었을 뿐이다. 가장 큰 다수를 차지한 수감자들이 놀랍게도, 억울하게 수감된 평범한 민간인이 아닌, 반역죄로 몰린 크메르루즈 출신들이란 사실을 알게 된 것도 그가 감옥에서 살아 나오고도 한참 뒤였다.
 당시 수용소에는 수 십여명의 간수 군인들과 수감자들을 조사하는 심문관 수명, 그리고, 사진촬영 기사가 있었다. 그리고 그 수용소의 최고 책임자는 두잇(본명 : Kaing Guek Eav)이라는 인물이었다. 그는 그의 얼굴을 가까이에서 본적이 있다.

그러나, 당연히 한번도 그와 말을 섞어 본 적은 없다. 춤 메이는 지난 2009년 6월 크메르루즈 특별법정(ECCC)에 증인으로 참석 뚜얼 슬렝에서 일어난 참상에 대해 진술 바 있다. 교도소장이었던 이 인물은 상부의 지시 따른 것이라며 협의를 강력 부인했지만, 지난 2010년 무기징역을 언도받고, 현재 교도소에서 복역중이다.
 
남아 있는 기록에 따르면, 이 수용소에서 최소 14,000명이 고문과 처형으로 목숨을 잃었다. 수감된 자들 중에 살아남은 자는 극소수에 불과하다. 그는 고문과정에서 오른쪽 엄지발톱을 뽑히기도 했다. 전기고문은 기본이고, 거꾸로 매달린 채 일명 통닭구이(?)라 불리는 고문도 당했다. 미군용 탄피통이 대변용으로 쓰였으며, 만약에 조금이라도 흘리면 그 벌로 바닥을 혀로 핥아야 하는 등 동물만도 못한 취급을 받아야 했다.
 
배가 고파 쥐나 도마뱀, 벌레도 잡아 날 것으로 먹었다. 목이 말라 물을 더 달라고 하면 200대의 회초리를 맞아야 했다. 간수들이 어린 아이들이 운다는 이유로 3층 발코니에서 그대로 던져 죽이는 모습도 목격했다.
 
이 곳에 수용자된 자들은 그들의 죄가 무엇이든 상관없이 ‘앙카’라 불리는 최고지도부의 지시에 따라 처형당할 운명이었다. 춤 메이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매일 새벽 고문과 질병을 견디지 못해 죽은 자들의 시체들이 들것에 실려 나갔다. 이것이 지옥보다 더 한 감옥을 합법적으로 빠져나가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당시 심문관들은 수감자들이 진짜 어떤 죽을 죄를 지었는지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고문을 통해 없던 죄까지 실토하게 만들었고, 거짓진술이라 할지라도 이를 토대로 보고서로 만드는 일이 그들에게는 더 중요한 일이었다. 춤 메이 역시 고문을 견디지 못하고, 이미 진술서에 자신이 미국 CIA 첩자로 일했다고 거짓진술과 함께 손도장까지 찍은 상태였다.
 
진술서작성을 마친 자들을 기다리는 것은 오직 처형 뿐이었다. 진술서를 쓴 사람들이 대부분 다음날 이른 새벽 수용소밖에 대기중인 트럭에 실려 갔다. 그들이 어디로 끌려갔는지 다들 짐작했지만,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그의 차례가 곧 임박해오고 있었다.


그런데, 그 절체절명의 순간에 정말 기적같은 일이 일어났다. 그는 크메르루즈에 의해 지난 75년 프놈펜이 함락되기 전 시내 자동차 공업사에서 기술자였다. 봉제공장에서 재봉틀기계를 수리한 적도 있었다. 그를 직접 고문했던 심문관이 그 사실을 상부에 보고한 것이다. 그때부터 수용소내 간단한 기계들을 수리하기 시작했다.
 
당시 감옥내 고문실 작은방에는 백열등 아래 심문용 책상과 의자 그리고 타자기 한대가 놓여 있었다. 대부분의 진술은 심문관이 타자로 작성한 문건과 수감자의 흑백사진 한 장이면 그것으로 충분했다. 그런데 타자기가 낡아 고장이 잦았다. 시장경제를 죄악시 화폐마저 없앤 상태에서 새타자기를 구입하기도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그때 그는 고장난 타자기를 솜씨좋게 뚝딱 고쳐냈다. 그러자, 공장밖 봉제용 재봉틀을 고치는 일이 곧바로 그에게 부여됐다. 덕분에 그는 매일 새벽 수용소앞 대기중이던 트력 뒷자리에 타지 않아도 됐다.
 
그러는 사이 크메르루즈 정권 몰락의 시기가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수용소 밖에서 베트남군이 쏜 포탄소리가 들려왔다. 1979년 1월 7일 베트남군이 드디어 프놈펜에 입성했다. 크메르루즈군은 다시 정글속으로 숨어 들어갔다. 전쟁이 끝난 것이다. 그리고, 그는 운좋게 살아남았다.
 
그 후로 시간이 꽤 흘렀다. 80년대 후반 무렵, 그는 뚜얼슬렝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다른 동료 6명과 함께 한 통일 이전 동독방송국이 만든 크메르루즈 관련 다큐멘터리에 출연하게 된다. 이들 생존자 명단에는 춤 메이와 함께 3년 전 세상을 떠난 화가 완낫, 그리고 또 다론 화가 출신의 보우 멩도 포함되어 있다.

이 다큐멘터리 영화를 시작으로 그에 관한 기사와 책들이 쏟아져 나왔다. 2003년에는 영화 ‘미싱픽쳐’로 아카데미후보작에 선정되어 유명한 리티 판 감독이 제작한 크메르루즈 다큐멘터리(원제, S-21: The Khmer Rouge Killing Machine)에 출연한 적도 있다. 이 영상물에는 그가 당시 수용소 간수들과도 직접 만나 화해하는 장면도 담겨져 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을 괴롭혔던 간수들에게 단 한번도 왜 그랬냐고 묻지 않았다. 이미 지나간 일이고 죽은 아내와 죽은 자신의 아들이 살아올 리 만무이기 때문이었다.
 
그는 과거의 악몽을 잊기 위해 아주 오랫동안 이 수용소를 찾지 않았다. 그러다가, 2009년부터 크메르루즈 희생자 협회 회장이 되어 일하면서 이곳에 다시 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그를 알아보는 관광객들과 대화를 하다가 죽은 아내와 아들 생각에 함께 운 적도 많았다.
 나이 팔순을 훌쩍 넘긴 나이에도 이곳에서 자신의 자서전 파는 일로 하루를 보내게 된 것은 3년전 쯤 부터다. 요즘도 현지 신문뿐만 아니라 외국의 주요외신들과의 인터뷰 기사도 워낙 많이 실려, 그를 알아본 외국인들이 기념촬영을 요청하는 경우도 많다.

하지만 그는 싫은 기색없이 늘 인자한 미소를 상대를 대한다. 세상 풍파는 모르고 살아온 노인의 인자한 표정 그대로다. 아무도 그의 얼굴만 보고는 그의 불행했던 과거를 감히 짐작해내지 못한다.
 
워낙 유명세를 타다보니, 그는 종종 크메르루즈의 잔학상을 부각시킴으로서 정권의 정당성을 부여하는 정부의 홍보용 꼭두각시로 전락한 적도 있다. 다른 크메르루주 피해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지난 해 7월 총선을 앞두고 야당부총재가 뚜얼 슬렝은 조작된 진실이라고 말하자, 야당을 비난하는 관제규탄대회를 주도한 적도 있다.
 
그 후로 한동안 소식이 잠잠하던 차에 최근 그의 이름이 현지신문에 다시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뚜얼 슬렝 대학살 박물관 내 크메르루즈 희생자들의 이름을 새 기념조형물(스투파)에 새기는 프로젝트 건이 사건의 발단이 됐다.
 
춤 메이는 지난 5월 9일자 현지 영자신문 〈프놈펜 포스트〉와 가진 인터뷰에서 이 프로젝트에 대해 강한 거부감을 들어냈다. 수감되어 죽어간 인물들이 모두 억울하게 희생된 민간인이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게 그 주된 이유다.
 
일반인들에게 과거 이 수용소에서 죽은 14,000여명이 모두 무고한 양민들인 것으로 알려 있지만. 이는 실제적인 진실과 다르다. 그도 바로 이점을 지적하고 나선 것이다. 이 곳에 수감되었다가 희생된 자중 무려 70%가 전직 크메르루즈 출신들이라고 역사전문가들은 말한다.
 
당시 폴 포트가 게릴라군인 크메르루즈를 이끌고 수도 프놈펜을 함락, 정권을 장악한 것은 사실이지만, 여전히 지방 파벌들간에는 알력이 남아 있었고, 중앙정부의 지시나 명령이 제대로 먹히지 않는 지방도 많았다. 따라서, 이러한 파벌간, 계파간 갈등속에 반역자로 몰려 이곳에 수감된 자들도 상당수였다.
 
사실 이들 전직 크메르루즈 출신에 대한 처우도 일반 수감자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대부분 고문 끝에 죽거나 공개처형을 당하는 등 비참한 말로를 경험했다. 그중에도 크메르루즈 전직 수뇌부들도 있었다. 폴 포트와 함께 정글을 누볐던 좌익지도자로, 캄보디아 당시 공보부장관을 지낸 후 님(1932~1977)도 반역죄로 몰려 이곳에 있다가 처형당했다. 그리고 뒤늦게 밝혀진 사실이지만, 현 외무부장관이며, 과거 크메르루즈 일원이었던 하오 남홍의 딸도 이 수용소에서 목숨을 잃었다.
▲ 춤 메이씨 테이블 건너편에서 자서전을 팔고 있는 또 다른 생존자 보우 멩(Bou Meng)씨.
 그런 이유 때문에 춤 메이는 수용소에 갇혀 죽었다는 이유만으로 이들 모두의 이름을 새겨 넣을 수는 없다고 주장한다. 이는 희생자들의 명예를 더럽히는 일이며 살아남은 가족들에 대해 또 한번의 죄를 저지르는 것이라고 그는 말했다.
 
그러나, 또 다른 생존자 보우 멩(Bou Meng)의 생각은 춤 메이와 전혀 다르다. 화가 출신인 그 역시 춤 메이의 테이블 건너편에서 자서전을 팔고 있다. 불과 10미터 떨어진 거리다. 보우 멩 역시 수용소에서 춤메이처럼 고초를 겪은 끝에 극적으로 살아남은 생존자다. 당시 함께 수감되었던 자신의 아내도 고문 끝에 목숨을 잃었다. 그는 크메르루즈 정권 당시 희생된 사람들인 만큼 모두의 이름이 새겨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두 사람을 구분 짓는 다른 점이 있다. 그 지난 1970년 크메르루즈 게릴라군의 일원이었던 전력을 가지고 있다. 이들 두 사람의 공통점은 오직 뚜얼 슬렝에서 살아남은 몇 안되는 생존자라는 사실뿐이다.
 
춤 메이의 주장대로 된다면, 크메르루즈 출신인 보우 멩의 이름도 당연히 그 명단에서 누락되어질 수 밖에 없다. .
 
스투파에 이름을 새기는 이 프로젝트는 내년초 추진될 예정이나 현재 캄보디아특별법정(ECCC) 희생자 지원담당 부서와 문화예술부는 이와 관련된 논란이 계속 되자, 향후 계획에 대해 어떠한 의견도 내놓지 않은 상태다. 참고로, 현재 40여명에 이르는 이슬람교 출신 희생자들은 종교적인 이유 때문에 이름을 새기는데 반대 입장이다
 
스투파 제작에 8만 7천 달러 기금을 낸 독일 정부 구호단체 산하 시민평화봉사 코디네이터 마르코스 스미스(Marcos Smith)씨는 “스투파에 희생자들의 이름을 새겨 넣을 지 책으로 기록할지 논의된 바 없다”고 〈프놈펜 포스트〉와 인터뷰에서 밝혔다. 그는 또한 “사실 크메르루즈라고 해서 모두가 나쁜 사람들은 아니었다. 그 사이에는 애매한 경계가 존재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춘 메이의 생각은 확고하다.
 
“세상의 어느 나라도 (무고한) 사람을 죽인 사람들의 이름을 스투파에 넣은 경우는 없다”고 같은 신문에서 그는 주장했다.
 
크메르루즈 정권 희생자를 추모하는 ‘분노의 날’ 행사가 열린 다음날인 지난 21일 오후(현지시각) 뚜얼 슬렝에서 춤 메이씨를 만났다. 벌써 4~5번째 만남이라 그도 기자를 알아봤다. 그에게 이 문제에 대해 단도직입적으로 의견을 물었다. 그러나, 그의 답변은 현지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말한 내영과 거의 다르지 않았다.
 
다만, 이 말을 덧붙였다.
 
"크메르는 내 가족을 내 인생을 모두 빼앗아갔다. 나는 매일 밤 울었다. 그러나, 나는 이미 그들(크메르루즈)을 모두 용서했다. 이제는 그들에 대한 분노도 없다. 그저 측은할 뿐이다. 그러나, 이들의 이름이 비문을 새기는 것은 전적으로 반대한다. 그런 자들과 함께 희생자들의 이름이 올라가는 일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다. 그것은 사랑하는 내 아내와 아들, 그리고 희생된 모든 이들을 욕되게 만드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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